영적 강자 - 5. 예수님을 본받으라 | 이응도 | 2017-06-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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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영적인 강자로 살다. 2017. 5. 10. 5. 예수님을 본 받으라!(빌 3:17) “세상을 바로잡고 주위의 악과 싸움을 벌임으로써 자신이나 동료들의 불편을 없애려는 사람, 그러면서도 세상에 꼭 필요한 제 몫의 일이자 그의 첫 번째 관심사, 즉 자기 자신의 인격과 행실을 소홀히 여기는 자는 어리석다. 그러나 그런 인물들이 너무나 많다.” (Kay Kessler, Growing, p.41)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영적 성장의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되어 예수님이 살던 방식과 가치로 살아가고, 행동과 마음이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성도는 그 누구도 예수님이 될 수 없지만 모든 성도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 가운데 있게 됩니다. 문제는 ‘믿음’이라는 이전과는 다른 길에 들어선 성도들이 ‘닮아가는 과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향한 영적 성장의 계단’에 얼마만큼 올라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라가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계단이 사람이 가진 숫자로는 셀 수 없지만, 우리가 성도의 이름으로 사는 중에 최선의 노력으로 가능한 가장 높은 계단을 밟을 수 있다면... 그것이 성도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Kay Kessler가 언급한 대로 성경을 말하고 신앙을 말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주장하는 성도들이 자신의 인격과 성품의 변화의 필요에 대해서는 둔감하기 쉽습니다. 믿음과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율법과 자기의(自己義)에 대해서는 강력한 기준으로 도전하지만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과 인격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성도의 영적 신분의 변화와 더불어서(빌 3:20/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 신분의 변화와 어울리는 인격과 성품의 변화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참으로 놀라운 은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이 은혜에 맞는 인격과 성품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변화의 열매에 만족하고 기뻐하실까요? 1. 패배하지 않기로 결심하다. ‘리지외의 성녀’로 불렸던 ‘테레사’라는 수녀가 있습니다. ‘리지외’는 프랑스에 있는 지역이 이름입니다. 우리가 아는 마더 테레사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녀는 1873년에 태어나서 1897년 24세의 나이로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 9년 반을 수녀로 살았습니다. 그녀는 리지외에 있던 ‘맨발의 카르멘 수녀원’에서 영성 훈련을 받으며 생활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숨지기까지 잘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하고 조용한 수녀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테레사가 있던 수녀원은 성격이 까다롭고 질투심 많았던 곤자가의 마리아(Marie Gonzague)라고 불리는 원장수녀에 의해서 많은 갈등과 문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공동체는 분열되었고, 서로 비난하고 적대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테레사는 수도원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갈등들을 멀리하고, 자신의 기도생활에 열중했습니다. 수도원 규칙에 충실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작은 직무들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다른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고 속했던 조직의 갈등에 대해서도 소극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죽고 난 다음 그녀가 평소에 적어두었던 글과 일기를 모아서 만든 자서전에서 사람들은 놀라운 것을 발견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지내는 수녀원에는 사사건건 내 신경을 건드리는 수녀가 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다 거슬린다. 그녀의 인격 또한 사랑스럽지가 않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자매’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딸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 대한 ‘자연적인 반감’에 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성경의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행함의 문제이다. 앞으로 이 자매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그녀를 위해 기도하고 그녀의 미덕과 노력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 예수님도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실 것이다.” 아직 나이 어린 수녀였지만 테레사는 아주 중요한 결단을 합니다. 자기 안에서 생기는 비복음적인 감정들에 대해 지지 않겠다...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내 감정의 주인이 되도록 하겠다... 나는 복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는 이미 복음에 헌신했고,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로 살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24년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죽은 이후에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결단과 실천 때문입니다. 2. 변화될 수 있을까? 성경은 사람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에 대해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노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고, 슬퍼하며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우리가 배우고 얻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정화되지 않을 때입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에 대한 1차적인 반응은 역시 감정입니다. 1차적인 반응으로서의 감정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성경이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속한 환경과 가진 성품이 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그 모든 것들이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 가는 과정이 성도의 성화의 과정입니다. 가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시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 나의 10년 전, 5년 전, 그리고 현재는 어떠합니까? 나는 성장하고 발전했습니까? 무엇보다 나는 다른 성도와 이웃에게 그리스도인으로 더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나아가서 나의 5년 후, 10년 후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오늘 내가 발견하는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시간이 지난 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내 안에 있는 복음과 나와 동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나의 인격과 성품에 대해 어떻게 교통하기를 원하실까요? 누가복음 18장에는 예수님 앞에 있던 대조되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지위와 신분이 중요했습니다. 자신이 하는 행위가 중요했습니다. 자신이 드리는 제사와 예물이 중요했습니다. 정작 자기 자신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고, 지금 어떤 예물을 드리며, 어떻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것이 자신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치며 엎드립니다. 다른 사람의 죄와 악과 부족함에 대해 판단하거나 비판을 여유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죄를 앞에 놓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변화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되는 ‘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나’입니다. 3. 이익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고든 맥도날드 목사는 그의 책 ‘영적 성장이 길’에서 홍콩에서 비행기 좌석을 구하지 못해서 발이 묶였던 경험을 소개했습니다. 싱가포르 항공사 직원들은 이틀 내에는 좌석을 구할 수 없다고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혹시 있을지 모를 탑승이 취소된 좌석을 기다리면서 공항 주변에 머물렀습니다. 다음 날 일찍 공항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한 승객이 항공사 직원들을 찾아갔습니다. 고성이 오고가고 거친 말들을 주고받았습니다. 한참 지난 뒤에 돌아온 그의 손에는 탑승권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결을 가르쳐 드릴까요? 나는 항공사 직원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늘어놓으면서 당장 좌석을 주지 않으면 다시는 당신네 항공사를 이용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하하, 그랬더니 드디어 이렇게 탑승권을 얻었어요. 선생도 똑같이 해보세요.” 고든 맥도날드 목사는 이 말을 듣고 항공사 직원에게 갔습니다. 하지만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저 거칠게 말한 사람이 탑승권을 얻어왔네요. 나도 꼭 오늘 비행기를 타야해요. 하지만 저 사람처럼 할 수는 없구요... 다만 정말 가야 하니까...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그러자 항공사 직원은 “한번 해보겠습니다. 기다려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고든 백도날드 목사는 자랑스럽게 자리로 돌아와서 “보세요. 더 나은 방법이 있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옆에 있던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고든 맥도날드 목사는 홍콩에서 하루 반을 더 보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격적인 방법이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품이 이익을 주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는 이유가 이득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옳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상황과 결과에 관계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 예수를 닮은 인격과 성품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어떤 손해를 감당하셨는지를 잘 안다는 것이고, 그 손해를 나도 지는 일에 헌신한다는 것이고, 내게 허락된 십자가를 지는 일에 주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 내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주님을 믿고 따르는 길입니다. 4. 예수를 배운다는 것 ‘학교’라는 공적 교육 시스템이 인류의 문화적 자산으로 자리잡기까지 교육은 늘 스승과 제자의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의 인격적인 관계가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방송을 통해서 오직 지식만을 습득하기도 하고, 각종 전문 학원을 통해서 기능만을 익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류는 오랫동안 지식이 아닌 인격을 배우고 닮아가는 방식의 교육을 대물림해왔습니다. 예수님의 시대, 제자들과 예수님이 매일 함께 생활하며 예수님을 배웠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고대 모든 문명에서 스승의 지혜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승과 함께 생활하며 그의 습관까지도 이어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뛰어난 한 스승 아래에 세계관과 철학을 같이 하는 학파는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예수 학파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혹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승 예수를 닮은 또 한 사람의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배우고 익힌 예수를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이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바울의 자신감과 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있는 예수를 본 받으라고 권면하고 또 그런 성도들을 주목하라고 권면합니다. 각 성도들에게는 각자의 삶의 정황과 성품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아름다우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백성들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를 서로에게서 확인하며 날마다 예수 전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고치기 위함이 아니라, 내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을 따라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살 때, 그것이 영향력이 되고 능력이 되어 세상 가운데 복음증거자로 살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우리 초대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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