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강자 - 6.부르심 | 이응도 | 2017-06-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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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영적인 강자로 살다. 2017. 6. 7. 6. 부르심(출 31:2-6) “마지막으로 결과를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일을 했던 결과는 무엇인가? 내 주위 세상이 더 나아졌는가? 사람들이 나로 인해 격려 받았는가? 내가 있음으로 기관이나 기업이 더 일하기 좋은 곳이 되었는가? 가정, 직장, 동네, 교회에 작게라도 보탬이 되었는가?” 성 패트릭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아일랜드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여, 간청합니다. 우리에게 와서 우리 중에서 행해 주십시오.” 패트릭은 그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았고 순종했다. 아일랜드 곳곳을 누비며 족장들과 왕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곧 민족 전체가 복음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토마스 케이힐의 표현을 빌면, 패트릭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결과가 장기적으로는 한 민족을 변화시켰고, 더 나아가서 한 시대를 구원했다. (고든 맥도날드, 영적 성장의 길, IVP,p.108-109) 성경에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아브라함이나 다윗, 모세, 혹은 세례요한이나 베드로, 바울과 같이 역사의 전면에서 일하고 영광을 얻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성경이 대단히 주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갈렙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그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섰던 두 명의 정탐꾼 중 하나이고, 여호수아를 말할 때 함께 언급되는 사람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오히려 그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일반적 전성기를 지난 85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그는 유다지파를 이끌고 직접 정복 전쟁에 나서기를 원합니다.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수 14:12)라는 청원은 유명합니다. 하지만 실은 이 청원보다 더 중요하고 갈렙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고백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라이벌일 가능성이 많았던 갈렙에 대해 잊지 않고 기록해야 했던 고백입니다. 갈렙이 반복해서 고백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수 14:8-9)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의 삶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수 14:14) 1. 여호수아와 갈렙 우리는 쉽게 비교의 함정에 빠집니다. 가나안 정착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주 비교되는 대상입니다. 아마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던 시기에 백성의 지도자로서의 여호수아와 갈렙은 쉽게 비교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본인들이 원하지 않아도 마음의 중심을 지키기 어려운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갈렙이 그렇습니다. 역할이나 관심에 있어서 여호수아에 비해 중요하지 않은 사람처럼 평가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유지하기 어렵고 관계에서의 평안을 지키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갈렙 자신에게 이 문제는 심플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었고 평생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의 인생을 정리하여 기록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온전히 쫓았던 사람’(수 14:14)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서로 경쟁자일 수 있었던 두 사람은 아름다운 협력관계를 보여줍니다. 아름다운 협력이란을 50;50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그것은 보기에 따라서 1:99일 수 있습니다. 다만 두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서로에게 헌신하며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가에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각각 하나님 앞에서 받은 부르심이 있고, 그 부르심에 순종했으며 서로에 대한 존경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의 역사에 마치 여호수아가 주인공인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적어도 성경이 기록하지 않은 갈렙의 삶의 영역에 있어서 갈렙은 부르심에 합당하고 충분한 삶을 살았고, 성경은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2. 부르심, 각각 다른 길 사람들마다 하나님이 만나시고 부르시는 방법과 목적이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여호수아가 아니었듯....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목회자로 부르신 것 아니고, 그것이 가장 좋은 길인 것도 아닙니다.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에게 원하시는 목적과 부르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브살렐과 오홀리압 같은 사람을 봅시다. 그들은 모세가 발견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알고 지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목공과 세공 기술을 애굽에서 배웠을 것입니다. 한 때 그들은 노예였고, 그들의 모든 노동력은 애굽의 바로를 위해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받은 은사와 재능이 애굽의 왕과 섬기는 우상들을 위해 사용되는 것에 대해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와 더불어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셨고, 애굽의 왕과 우상을 위해 일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일에 부르십니다. 한 번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삶을 살게 됩니다.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배우고 익혔던 목공과 세공을, 이방의 왕과 우상을 위해 사용하던 기능을.... 하나님의 영광과 예배를 위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역사 속에서 필요한 사람들을 이렇게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시는 방법과 과정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일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아론을 부르시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부르시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출애굽의 역사에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부르시고, 그리고 성경이 기록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의 몇 가지 특징 성경에서의 부르심은 명백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모든 부르심은 삼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구별하지 않아도 되지만 또 각 삼위 하나님의 독특한 부르심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이사야와 아모스를 부르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열두 제자를 직접 만나시고 부르시는 분은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사울을 부르시고 바나바를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스스로 부르심을 받지 않습니다. 부르심의 두 번째 특징이면서 공통점은 사람의 예측이나 상식을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실 때, 모세를 부르실 때,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 그들은 모두 감당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스스로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임하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니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이니다.”(삿 6:15) 예측할 수 없는 방법과 시기로 부르심을 받았던 바울 또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부르심을 받을 때) 내가...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딤전 1:13) 또 다른 공통된 특징은 상황에 있습니다. 노아에 대한 부르심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에 대한 부르심을 보십시오. 삭개오에 대한 부르심을 보십시오. 제자들에 대한 부르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기를 원하시는 일과 그들의 상황과 능력은 서로 맞지 않습니다. 사실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가 아무리 탁월한 영성과 능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일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생각할 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향한 모든 부르심에서 하나님의 목적도 이루시지만 그 사람을 향한 목적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 다 부르심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고 믿음과 용기를 배웁니다.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하나님의 사람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4. 나는 충분하고 합당한가? 따라서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는가? 나는 어떤 부르심을 받았을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일까?” 한 단계 더 나아간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인가? 나는 자질과 능력에서 적합한가?” 의외로 답은 쉽습니다. 성경에서 부르심을 받았던 사람들은 우리의 고민을 쉽게 해결해줍니다. 그들 중에 그 누구도 원래부터 부르심에 합당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 중에 누구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합당함’과 ‘적합함’의 기준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사람 또한 없습니다. 비교적 훌륭한 자질과 많은 훈련을 통해서 잘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수하고 넘어졌습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그랬습니다. 원래 자질이 부족했던 베드로와 같은 사람은 더 자주, 더 크게 넘어집니다. 기드온이 그랬고, 바울이 그랬고, 수많은 사사들과 왕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흐름에 없어서는 안될 수많은 사명들을 그들에게 주시고 그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누구도 자질에서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하거나 능력에서 하나님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다만 우리는 자신에게 계속 질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충분하고 합당한가를 계속 질문해야 하는 이유는 패배감, 혹은 실패감을 맛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훈련시키고 격려하기 위함이며 겸손하고 헌신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답을 주십니다.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부르심과 헌신이 충분하고 효과적인지 주변은 좋은 실험실이 됩니다. 자질도, 은사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변화되고 개발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서두에 인용한 것처럼 나는 영적 유익을 끼치는 사람인지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이 나의 사역과 섬김을 통해 전달되고 있는지를 본다면 우리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우리 자신의 영적 상황을 점검할 수 있겠습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 - 히브리인들을 멸족하려는 왕을 위해 건축하고 세공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슨 준비가 되어 하나님이 쓰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의 왕과 우상을 위해 일하던 사람들을 들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맡기십니다. 그들이 준비되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이 땅의 먼지와 흙으로 지음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할 때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부르시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서로를 격려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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