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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눔 이응도 2018-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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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영적인 강자로 살다.

2017. 6. 28.

8. 나 눔(16:3-4)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간 적이 있는데, 차를 타고 다가 보니 도로 옆 공터에 노숙자 몇몇이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있었다. 안내자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합니다. 저들 중에 굶주린 사람은 없습니다. 저들에게 다가가면 앉을자리와 마실 것과 먹을 것을 건네줄 겁니다. 가진 게 아무리 적어도 일정량을 나눠 주죠.” ‘그거 정말 놀라운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들을 자신만 못한 사람과 구분하기 좋아하는 대부분의 부자들한테는 같은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알고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모든 통계나 사회학적 관찰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더 잘 나누며 산다. 그럼 나눌 줄 안다는 것은 무엇이고, 무엇을 나눈단 말인가?

고든 맥도날드, 영적 성장의길 IVP p.122-123

 

성도와 교회라는 이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나눔이라는 말에 대한 반대는 없습니다. ‘섬김과 나눔은 마음에 있는 믿음이 삶으로 표현되는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성도와 교회가 섬김 혹은 나눔에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믿음을 삶으로 표현하고 실천하는 일에 성공했다면... 오늘날 수많은 사회적인 문제는 사라졌을 것입니다. 여전히 섬김과 나눔은 성도와 교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입니다.

 

1. 믿음과 나눔, 한계와 장벽

 

고든 맥도날드 목사가 만났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현실도 그렇습니다. 소수의 유럽에서 온 백인들이 다수의 원주민으로서의 흑인을 지배하고 다스려왔습니다. 모든 재화가 소수의 백인에게 집중되고 법적인 권리와 권력 또한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예수 믿는 신앙 또한 그들의 것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수의 흑인들에게 전도되었습니다. 그들을 폭압하고 지배하던 백인들로부터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받은 흑인들이 먼저 복음으로 살았습니다. 결국 그들의 권리와 자유를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했던 소수의 백인들은 여전히 신학의 주인이고 많은 재화의 주인입니다. 복음을 제한적으로만 그들의 삶에 적용했지만 그 복음에는 힘이 있어서 한 사회가 변화되고 있고, 복음의 주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던 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명령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순종하는 성도에게 능력이 되고 권위를 허락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백인들의 복음에 대한 권위는 없습니다. 오히려 오랜 핍박과 억압의 역사 속에서 스스로 역사의 주인이 된 흑인들의 용서와 관용에 신앙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나바호 인디언 원주민 교회의 현실도 그러하고, 그들에 대한 미국 교회의 입장도 그러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가서 그들의 삶에 흐르는 복음의 능력에 대해 말하고 있는 고든 맥도날드 목사도 미국인으로서, 미국의 영적인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 인디언 교회를 방문하지는 못합니다. 뉴욕 거리의 노숙자에게 다가설 수 있지만 미주 지역에 어두운 곳으로 흩어져 살아가는 인디언 마약 중독자들의 문제에 접근하지는 않습니다. 미국 교회가 해결하고 대답해야 할 숙제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마음에 있는 믿음을 삶으로 실천할 것을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사도 바울의 친구들

 

선교자로서의 사도 바울은 많은 동역자, 영적인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서신서 곳곳에서 그들에 대한 자신의 영적인 의존에 대해 고백합니다. 그는 늘 외로운 사람이었고,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바울이 기억하는 좋은 친구들을 찾아볼까요?

 

먼저 바울 하면 함께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나바입니다. 바울의 친구이자 동료이자 스승이기도 합니다. 그는 예수를 만난 후 떨면서 영적인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바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를 복음으로 가르쳐 인도했고, 위험을 무릅쓰고 바울의 보증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낙향하여 다소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다시 바울을 찾아가서 안디옥에서의 목회를 제안합니다. 바울의 선교 비전에 동의하여 함께 선교여행을 떠났고, 바울의 부족한 부분을 가장 잘 채우는 동역자였습니다. 만일 그가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바울과 나누는 것에 부담을 느끼거나 위협을 느꼈다면 신약에서 바울의 사역은 제한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에게 허락된 사역과 역할을 나누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함께 성장하고 함께 사역하는 좋은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디모데라는 좋은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바울의 영적인 아들이자 동지였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많은 사랑을 나누어줍니다. 사람은 마치 흐르는 강물과도 같습니다. 받은 사랑을 나누지 않으면 병들게 됩니다. 바울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고 또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교회와 성도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보다 더 큰 사랑을 주려고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사랑으로 성장한 디모데는 곧 그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2:19-22)

 

디모데와 비슷한 방법으로 성장하는 사람이 마가요 또 디도입니다. 젊은 사역자들은 바울에게서 흘러내려오는 사랑을 먹고 성장합니다. ‘나눔은 받음과 베풂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를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과 그가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귀한 사랑을 나눈 사람들 중에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본 바와 같이 그들은 목숨을 내놓는 헌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함께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헌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골로새 교회를 개척하고 로마의 감옥에서도 함께 했던 에바브라 또한 귀한 섬김과 나눔의 본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은 늘 바울과 함께 있습니다. 바울이 이들이고 이들이 바울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울과 귀한 삶을 나누었기에 바울에게는 이들의 삶이 흔적이 함께 있는 것이고, 바울의 복음에서의 성취는 이들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이들을 소개하고 자랑하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2000년이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 또한 복음의 동역자요 섬김과 나눔에 헌신하는 성도와 교회로 살기 원하시기 때문이요, 또 다른 디모데와 에바브라가 되어 21세기의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의 선진들의 사역에 동참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3. 무엇을 나누었을까?

 

그렇다면 교회와 성도로서 우리들은 무엇을 나누어야 할까요? 가장 잘못된 생각은 나눔을 재물에 한정하는 것입니다. “많이 벌어서 많이 나누면 되지!”라고 생각합니다. 나눔의 핵심은 재물이 아닌 삶의 방식에 있습니다.

 

1) 자신이 할 수 있는 사역

 

먼저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초대교회의 어떤 성도들에게는 에바브라와 같이 감옥에까지 따라가서 바울을 섬기는 일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신은 도저히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바울과 함께 하는 선교의 사역에 도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 중 소수가 동참하고 나눕니다.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일이 나눔의 대상입니다.

 

2) 자신의 사람됨

 

하지만 정작 우리가 나누는 것은 우리들의 사람됨그 차제입니다. 때로 물질이 크게 보이고, 재능이 크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이요, 사람의 됨됨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그의 인격이 나눔과 섬김을 통해 흐를 때 모두에게 힘이 되고 회복이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오네시보로라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he often refreshed me)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딤후 1:16-18) 오네시보로는 유쾌한 사람이었고 자신을 통해 다른 사람을 회복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세우는 일에 은사를 가졌던 한 사람을 압니다. 바나바입니다. 그의 모든 사역에는 그의 사람됨이 드러납니다.

 

3) 소유

 

나눔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바로 재물입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그것은 우상 숭배와 관련이 있기도 합니다. 시간을 나누고 수고를 나눌 수 있어도 재물을 나누는 일에 주저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보다 한 번도 가난을 경험해보지 못한 부유한 사람들이 나누는 일에 정죄와 판단을 앞세우거나 인색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을 경험한 사람들이 가난에 대한 두려움 없이 헌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던 과부는 두 렙돈을 헌금했지만 가진 모든 것을 헌금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두려움 없는 전적 헌신을 기뻐하십니다.

 

4) 생명까지도...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복음 안에서 동지된 바울을 위해 목숨까지 헌신할 수 있었던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만납니다. 바울 또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심장(1:8)을 두고 헌신합니다. 하나 뿐인 생명을 나눌 수 있는가? 그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도전이자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장기를 기증하고 죽은 딸의 심장으로 살고 있는 한 청년을 찾아간 아버지의 사연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잠시 보실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ZcLYDs4J4Us

딸의 심장을 다른 청년의 몸을 통해서 듣는 아버지의 심정을 상상해 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아들의 죽음으로 살린 성도와 교회의 찬양소리를 듣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이 바로 그 심정 아닐까요?

4. 예수를 본받아서

 

따라서 우리의 모든 나눔과 섬김은 예수님을 본받는 과정입니다. 그 어떤 섬김도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섬김을 넘을 수 없고, 그 어떤 헌신도 예수님의 교회를 향한 헌신을 넘을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서 발자취를 따라갈 뿐입니다.

 

우리 교회가 성찬을 나눌 때마다 읽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4-15절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나눔과 헌신이 모든 사람의 생명과 관련이 있고, 모든 사람의 헌신으로 열매를 맺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고린도 교회에 대해 왜 자신이 생명을 다하여 그 교회를 섬기는지를 예수님의 헌신을 통해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본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섬김과 나눔 또한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의 본을 보며, 예수를 본받는 일에 성공하는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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