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강자 - 9. 과거, 힘 혹은 함정 | 이응도 | 2018-01-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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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영적인 강자로 살다. 2017. 7. 5. 9. 과거 - 오늘을 만드는 힘, 그리고 함정(창 45:1-8) 어제 저녁에 자녀들과 함께 새롭게 만든 영화 ‘벤허’를 봤습니다. ‘벤허’는 원래 1880년 남북전쟁의 영웅인 루 월리스 장군이 쓴 베스트셀러 소설입니다. 1907년 무성영화로 처음 만들어진 후 1925년, 1959년에 리메이크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스펙타클한 전차경주 신으로 기억되는 ‘벤허’는 1959년에 만들어진 작품을 말합니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1개의 상을 휩쓸었고, 감독인 윌리엄 와일러는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신이시여, 이 영화를 정녕 제가 만들었단 말입니까!”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 세 번째 영화로 제작될 때까지 아쉬움이 있었다면 원작자가 소설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복음적 메시지가 약화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벤허의 개인적인 인생의 굴곡들을 묘사하면서 원래 소설에서 주고자했던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약화시켰다는 비평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세 번째 작품에서 예수님이 벤허에게 물을 먹이는 장면, 벤허가 예수님께 물을 권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모두 뒷모습으로 처리합니다. 예수님과 벤허의 대화 장면은 거의 없습니다. 지난 해 2016년 네 번째로 만들어진 ‘벤허’는 그 부분을 보완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1959년의 작품에서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전차경주 장면이었다면 2016년 작품에서 하이라이트는 예수님께 한 그릇 물을 장면입니다. 2016년 작품에서 영화의 절정과 벤허의 결정적인 변화를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네 번째 리메이크된 이 영화가 흥행에는 실패하면서 원작의 의도가 담긴 메시지에는 성공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 벤허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전에 벤허가 누명을 쓰고 채찍을 맞으며 노예로 팔려갈 때 목말라하는 그에게 물을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때 벤허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도 나중에 나에게 물을 주게 될 것이다.” 그 말을 기억한 벤허는 로마 군병의 반대를 물리치고 예수님께 물을 주려고 합니다. 채찍을 맞으면서도 물을 건내는 벤허에게 예수님이 천천히 말씀하십니다. “형제여... 괜찮습니다. 이 길이 바로 내가 선택한 길입니다.” 예수님과의 이 만남을 하고 난 다음 비로소 벤허는 형제이자 친구이며 원수였던 메살라를 마음에 품게 됩니다. 죽음으로 복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사랑으로 품기로 결정했습니다. 벤허의 마음 속 메살라가 있는 자리는 예수님이 만드신 자리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용서하고 예수님처럼 품을 수 있는 자리, 그 자리를 통해서 원수가 다시 형제로 변화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 영화를 흥행을 포기하고 메시지를 선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학창시절 말이 달리듯 뛰는 가슴으로 ‘벤허’를 봤던 기억을 지운다면 꽤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저희 아이들은 저와는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영화를 마치자 박수를 쳤습니다. 아빠가 좋은 영화를 보여줘서 고맙다는 ‘칭찬’(?)도 들었습니다.
1. 성도와 교회의 길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에 원래 ‘달려야 할 길’(딤후 4:7)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길은 자신에게서 말미암은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길입니다. 자신에게서 시작되지 않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제 자신은 그 길을 거의 다 달렸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그 일이 원래 자신에게 허락된 길이었는데 죄와 어둠 속에서 찾지 못하고 있다가 복음 안에서 비로소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성도와 교회도 그렇습니다.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고 우리는 순종할 의무만 있습니다. 따라서 그 길은 변함이 없습니다. 인류가 범죄 한 이후 사람은 왜곡한 시선으로 자신의 길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원망과 증오가 사람의 시선을 왜곡합니다. 아담은 하와를 원망하고 가인은 아벨을 죽입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가장 위험하고 해로운 존재가 됩니다. 마치 그렇게 사는 것이 사람이 원래 살아야 할 길인 것처럼 이해되었습니다. 사람의 본성을 악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계몽하고 선도해야 할 대상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인류가 걸어온 죄와 악의 걸음들을 볼 때 그런 해석들이 적절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이 살아야 할 길의 회복을 말씀합니다. 사람은 원래 그렇게 살도록 지음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고, 하나님이 그 마음의 심은 길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죄와 악이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목적이 주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악을 행하고 그 악으로 분노하고 두려워하고 염려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고 의롭게 살도록 지으셨고, 평안과 평강을 나누며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때로 사람이 사람을 해롭게 하고 부정적인 감성과 영성으로 흔들리게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지키고 보호합니다. 영화 벤허에서 예수님이 전하는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참된 평안과 위로를 전하는 것이 주님이 가실 길입니다. 로마와 유대의 죄와 악에 주님이 가시는 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2. 야곱의 길 우리의 현재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들 중에서 ‘해결되지 않은 과거’가 있습니다. 야곱의 인생은 과거의 삶의 흔적들이 현재의 삶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그가 삼촌 라반의 집에서 성공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형님 에서에 대한 잘못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잘못으로 예상하는 결과를 두려워합니다. 책임을 하나님께 미루려 합니다. 얍복 강가에서 그는 하나님과 씨름하며 자신의 과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서 져달라고 떼를 씁니다. 결국 하나님은 은혜 가운데 그에게 복을 약속하시고, 야곱은 에서와의 만남을 성공적으로 끝냅니다. 문제는 그가 그런 방식으로 과거를 해결하지 않은 채 현재의 위기만을 넘어갔었기 때문에 그의 과거는 현재에서 늘 반복됩니다. 과거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를 향한 목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역사하고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파괴합니다. 자신의 뜻과 욕심을 따라 살았던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야했고, 형의 마음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고, 삼촌이자 장인을 떠나야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모든 선택에 하나님의 은혜가 덧입혀져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벧엘 언약’을 잊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삼촌의 집으로 가는 광야에서 노숙하며 언약을 맺었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처음 맺은 언약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면 이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겠다고 했습니다. 비록 당시에는 가진 것이 없어서 돌로 제단만 쌓았지만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면 자신은 큰 영광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삶을 위기가 넘어가자 하나님과의 약속 또한 망각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삼촌과 형을 대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한 것이고, 과거에 그가 사람들을 사용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현재의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의 과거는 매순간 현재에 반복됩니다. 그의 삶의 결과는 애굽이었습니다. 3. 요셉의 길 그러나 사람이 만든 과거가 아닌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현재의 삶을 살아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입니다. 그의 삶에는 세상이 준 과거의 흔적으로 세상보다 더 악한 선택을 했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요셉의 열 명의 형들이 그들이며 요셉의 아버지 야곱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삶에 어려움이 찾아오자 서로를 원망하며 과거에 저질렀던 범죄의 기억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창 42:21-22) 생각해보면 그들이 범죄했던 이유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의 기억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로부터 해석되고 미래로 전진하지 못합니다. 요셉이 형들을 만납니다. 우리는 두 장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45:1-3에서 그가 방성대곡하는 장면입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창 45:1-3) 이 장면에서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누가 울어야 합니까? 죄를 범했고 약자의 위치에 있는 형님들입니다. 그런데 피해자이면서 지금은 강자가 된 요셉이 방성대곡합니다. 또 한 장면은 창 50:19-21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9-21) 그는 형님들을 위로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정확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삶을 인도한 것은 형님들의 악이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형님들이 행한 과거의 악에 얽매여 살 때 그는 과거의 사람이 되고 분노와 복수의 사람이 되겠지만,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지할 때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 됩니다. 4. 영적 성장의 길 고든 맥도날드 목사는 그의 책 ‘영적 성장의 길’에서 자신이 살던 뉴잉글랜드의 기후에 대해 언급합니다. “뉴일글랜드의 여름은 미국 남부에 비해 짧다. 그래서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따뜻한 날씨를 소중히 여기고 좋은 날씨를 잘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집 주위를 수리하는 데도 많은 시간을 들이는데, 칠이 벗겨진 데를 손보고 썩은 합판을 교체하고 지붕에 새는 곳은 없는지 점검한다. 휴가도 좋지만 주택보수를 미루면 겨울에 더 큰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때는 수리가 아니라 개축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사람의 내면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는 속에대 우리의 모든 어제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경험한 일과 거기에서 받은 영향들을 안고 산다. 지난 날은 오늘, 바로 지금에 큰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인간관계나 선택, 자아상, 하나님에 대한 이해까지 좌우할 수 있다. 우리의 어제를 잘 고쳐 놓으면, 곧 오늘의 힘이 된다. 그러나 치유되지 않은 과거는 오늘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뉴잉글랜드의 여름은 짧다. 그래서 우리는 혹독한 겨울을 편안히 나기 위해 집과 다른 것들을 수리하는 데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영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영혼은 항상 잘 고쳐 놓은 상태로 있어야 한다.“ (고든 맥도날드, 영적 성장의 길 IVP. p.133, 140) 오늘의 나는 과거의 모든 선택과 그 결과의 축적입니다. 때로 부끄럽고 죄스러우며, 때로 행복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무엇이든 어떠하든 우리는 과거로부터 성장의 계기를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의 과거는 내가 성장하는 힘과 능력이 되고, 내가 넘어지는 함정과 구릉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 열쇠를 우리의 마음에 새겨놓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새긴 구원의 복음과 하나님의 뜻을 꺼내들고 지나온 삶을 통해 오늘과 내일을 사는 날카롭게 준비된 지혜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지혜의 눈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를 향한 그 뜻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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