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강자 - 11. 용서를 선택합시다. | 이응도 | 2018-01-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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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영적인 강자로 살다. 2017. 8. 30. 11. 용서는 계속된다.(엡 4:32) ‘연금술사 하나님’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존 클레이풀(John Claypool) 목사는 이 요셉의 삶에 주목합니다. 창세기 25-50장에 이르는 요셉 가정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사람의 삶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합니다. 그가 다루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바로 ‘용서’입니다. 그는 또 다른 책 ‘The Preaching Event’에서 한 쌍둥이 형제를 소개합니다. 그 형제는 부모에게서 가게를 유산으로 받아서 함께 운영합니다. 둘은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 속에서 사업을 번창시켰습니다. 하루는 한 손님이 가게에 들어와서 물건을 샀습니다. 형은 손님을 배웅하면서 손님이 지불한 돈을 계산대 위에 두고 나갔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돈이 없어졌습니다. 형이 돈에 대해 동생에게 물었습니다. 동생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거 참 이상하네... 내가 분명히 계산대 위에 두고 나갔었는데.... 그 뒤에 아무도 안들어왔잖아...” 그러자 동생은 형이 자신을 의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짜증을 내면서 말을 받아칩니다. “지금 나를 의심하는거야? 형이 어떻게 한 것 아냐?” 말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신뢰가 무너져버렸습니다. 가족들의 도움으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키웠습니다. 결국 홧김에 동업관계를 청산하고 같은 업종의 두 가게가 나란히 건물에 들어섰습니다. 형제를 서로에 대한 적대감으로 서로를 비난했고, 경쟁했고, 서로를 해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계는 20년이 넘게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타주의 번호판을 한 차량 한 대가 동생의 가게 앞에 섰습니다. 잘 차려입은 신사가 내렸습니다. 그는 가게로 들어와 이곳에서 가게를 운영한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동생이 20년이 넘었다고 대답하자 그 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그렇다면 선생님께 제가 저지른 잘못을 회개해야겠습니다.” 그는 20년 전의 일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는 돈도 없고 머룰 곳도 없이 떠도는 신세였습니다. 가게 앞을 지나다가 계산대 위에 돈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가게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었고, 누구도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가게로 몰래 들어가서 돈을 훔치고 말았습니다. 이후에 그는 그날 일을 늘 기억했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파도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었는데 그날의 간절함은 그를 패배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는 옛날의 죄를 고백하고 보상하고 용서를 받기 전에는 마음의 평안을 회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늘 괴로워하다가 드디어 결심을 하고 먼 길을 돌아서 그 가게를 찾아 왔다고 말했습니다. 동생은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노년에 접어든 가게의 주인이 우는 것을 본 신사는 당황해서 이유를 묻습니다. 동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옆 가게로 가셔서 제게 들려주신 그 이야기를 다시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신사는 그렇게 했고, 똑같이 생긴 또 한 사람의 노신사가 같은 모습으로 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존 클레이풀은 이 이야기를 끝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용서에 대한 것입니다.” 1. 용서를 선택합시다. 사람의 본성은 용서에 반대됩니다. 우리의 내면은 늘 감정의 균형과 보상을 자기중심적으로 원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내가 받은 은혜나 관대함보다 상처나 고통을 크게 생각합니다. 용납하고 잊기보다 돌려주고 갚아주고 싶은 마음이 많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주도적으로 선택해야 하고, 의지를 가지고 배워야 하며, 훈련을 통해서 익숙해져야 하는 덕목입니다. 받은 대로 돌려주지 않겠다는 의지와 받은 은혜가 주도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자신에 대해 고백했고, 어머니께 부탁했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그중 첫 번째 말씀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가장 절박한 순간, 가장 깊은 육신의 고통과 영적인 괴로움의 순간 예수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선택하셨던 한 가지는 바로 ‘용서’였음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통과 위기가 절정에 달했던 그 순간에 선택하신 용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2. 용서는 과정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용서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18:21-22) 이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용서의 몇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용서의 당위성(當爲性)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는 그 수나 양에 따라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도와 교회가 해야 할 당위(當爲)에 해당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용서 행위를 자랑하고 자기의(自己義)를 강화하며 분노와 징계를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용서는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당연한 반응일 뿐입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행위입니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일만 달란트 빚진 신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용서의 시작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왜 용서는 당위성을 가지느냐 하면 우리가 먼저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흔 번의 일곱 번이 과하지 않은 이유, 오히려 은혜로 이 숫자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받은 사랑과 용서의 은혜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에게서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 과정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거나 용서를 잊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물길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세상과 성도에 대한 이해입니다. 세상은 용서를 필요로 하는 죄와 악이 반복되는 현장입니다. 성도는 죄와 악이 실행되는 세상에 삽니다. 성도는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반복하는 죄와 악은 한편으로는 고난이자 고통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험이자 유혹입니다. 세상이 성도에 대해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성품을 따라 살지 않고, 세상의 질서와 성품을 따라 살 것을 시험하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달콤하지 않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다가온다고 해서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이 전하는 용서는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이라는 숫자에 대해 말합니다. 자신에 대해 잘못을 반복하는 형제에 대해 그 정도의 숫자면 이제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는 새로운 숫자를 제시하십니다.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그 행위의 성격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서를 한 순간의 행위가 아닌 삶에서 중단하지 말아야 하는 과정으로 설명하셨습니다. 한 순간의 행위가 아닌 삶의 과정입니다. 삶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받은 은혜와 사랑을 인정하고 기억하며 그 은혜와 사랑에 적합한 삶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사람, 어떤 일에 대해 이미 용서했다고 말하지만 다가오는 삶의 상황 속에서 다시 분노하고 괴로워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변화를 통해서 용서를 결단하는 것이 아닌 나의 변화를 통해서 용서의 삶을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용서는 유익합니다. 존 클레이풀 목사는 그 쌍둥이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들이 갇혀 있었던 분노와 정죄의 감옥에 대해서 말합니다. 만일 그들이 서로의 마음과 말을 신뢰하고 자신에게 있는 확신으로 서로에게 질문하기를 그쳤더라면 그들은 20년을 잃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혹시 형이나 동생이 돈을 가져갔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있었을 특별한 이유를 설명을 듣기 전에 이해할 수 있으면 좋습니다. 내가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다만 내가 아직 그 이유를 듣거나 이해하지 못할 뿐이라는 인정이 필요합니다. 그 때 우리는 분노와 증오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클레이풀 목사가 주목하는 요셉의 삶 또한 그렇습니다. 만일 그가 과거에 자신이 만난 불행과 악의에 그의 마음을 두었다면 아마도 그의 청소년기와 청년기는 분노와 증오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장년기는 복수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과 삶을 지키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허락하실 인도하심을 간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지킵니다. 하나님이 비록 그 뜻을 그에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 설명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에 근거하여 자신의 삶을 다시 해석합니다. 세상은 자신에게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선하게 바꾸셨고, 바꾸실 것입니다. 이 믿음과 선택이 요셉을 요셉되게 했습니다. 용서의 유익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죄와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며, 허락하신 귀한 시간을 분노와 증오에 맡기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닮아가는 삶의 과정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많은 삶의 영역에서 이 유익을 포기하고 삽니다. 4. 용서는 성도가 서로에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에베소 교회를 위로하고 권면하셨습니다. 먼저 그들에 대한 칭찬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엡 1:15)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성도들을 향한 사람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러므로 생각하라!’(2:11)고 권면하십니다. 이전에 그들은 죄인이었고, 이방인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밖에 있었고,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성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와 동력이 주어졌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4:1)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의 끝에 바울은 ‘용서’에 대해 권면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는 것, 그것이 용서에 대한 원리이자 이유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서로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서로를 용서하는 삶을 선택하고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반복된 잘못을 행하고 살만큼 충분히 어리석고 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사랑은 그보다 크고 더 넓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과 은혜에 의지할 때 용서는 우리의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우리의 본성이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로 얼룩진 과거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며 현재의 삶과 미래의 승리를 위한 가장 아름다운 선택, 용서입니다. 이 선택에 대해 끈기 있는 승리가 우리의 삶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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