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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강자 - 12. 소금기둥 이응도 2018-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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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영적인 강자로 살다.

2017. 9. 6.

12. 소금 기둥(1:21)

 

성경에는 기억에 대한 명령이 많습니다. 출애굽 때 하나님은 곳곳에서 이적을 허락하시고 기념비를 세우게 하셨으며 기억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계명을 새긴 돌판을 허락하신 것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주신 것과 썩지 않는 만나를 보관하게 하신 것은 모두 하나님이 허락하셨던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을 기억하라 말씀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할 때마다,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은혜가 부족할 때마다 그들은 성찬의 의미와 그것에 참여했던 때를 기억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억에 대한 모든 명령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롯의 처를 기억하라!’(17:32)는 말씀을 주십니다. 그녀는 롯의 아내였고, 소돔성이 죄악으로 멸망당했을 때 롯과 두 딸과 함께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사자의 경고를 잊고 뒤를 돌아보았고, 벌을 받아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녀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경고와 함께 주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 앞에 서 있는 롯의 아내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느껴야 하는 것일까요?

 

1. 10 1

 

누가복음 17장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열 명의 나병환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간절한 소원으로 예수님을 찾아왔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이 다시 주님께 돌아와서 감사드렸습니다. 예수님은 16절과 18절에서 오늘 우리가 고민하고자 하는 두 단어를 연결하십니다. 바로 감사영광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그 문둥병자의 감사의 행위를 19절에서 믿음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세 단어는 오늘 말씀을 연결하는 핵심고리가 됩니다.

 

예수님의 모든 설교는 의도적입니다. 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예화를 사용하시고 이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을 기록하고 편집했던 저자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기억을 편집하여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결국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각각 다른 관점으로 성경을 기록했고,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좋은 길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의 기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병환자들을 고치시는 놀라운 이적은 그 이후 환란 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정말 필요한 믿음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좋은 요소가 됩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인 삶 자체가 환란이었던 나병환자들을 만나셨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중 단 한 사람이 보여준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으로 해석하셨고, 그것을 믿음이라 설명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2. 그러나 롯의 아내!

 

예수님께서 감사와 영광으로 돌아온 한 명의 나병환자를 칭찬하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7:19)는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물론 이 구절에서의 믿음과 구원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는 좀 더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그의 감사를 통해서 마지막 때에 성도와 교회가 가져야 할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20절부터의 상황은 재미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언제 임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삶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접했고 가까이 있기도 합니다. 어쩌면 가난과 핍박이 일상화되던 시대에 율법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은혜를 이미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기를 묻는 그들에게 먼저 노아시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노아의 방주가 선포되고 준비될 때에 사람들은 복음이 바로 눈 앞에 있어도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삶의 일상들은 복음보다 더 중요하고 긴급했습니다. 예수님은 또 한 예를 듭니다. 롯의 시대입니다. 롯과 식구들은 심판이 임박할 때까지 소돔성의 화려한 문화와 삶을 즐겼습니다. 다행히 그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가까운 소알성으로 피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소돔성과 함께 심판과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명령은 심플합니다. 뒤를 돌아보거나 멈추지 않고 뛰어야 합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그 명령을 어깁니다. 소금기둥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롯의 아내를 기억해야 할까요? 롯의 가정에 복음이 전파되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19:15-17)

 

먼저 그들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단순하게 순종하지 않습니다.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고, 롯은 성을 떠나는 일을 주저합니다. 롯과 가족들은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성경은 그런 상황을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셨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명령하시기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롯은 한번 더 지체합니다.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19:19-23)

 

욥은 한 번 더 은혜를 입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지정하신 피신 장소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장소를 선택했고, 그가 그곳에 가기까지 재앙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거듭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만일 그의 아내까지 그 성에 들어가는 일에 성공했다면 롯은 그곳에서 다시 한번 믿음의 가문을 일굴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3. 감사와 영광, 믿음의 증거

 

그러나 불행하게도 롯의 처는 뒤를 돌아봅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 행하신 일은 감사의 제목도, 영광 돌리는 찬송의 제목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녀가 살아왔던 삶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신에 불과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소돔성과 함께 살았던 그녀에게 허락하신 은혜와 자비하심에 대해 그녀는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죄악의 도성에 내리시는 심판과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 허락하시는 구원에 대해 그녀는 영광돌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영광보다 중요한 것은 두고 온 소돔성의 삶에 대한 미련과 안타까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돌아선 그녀를 소금기둥으로 세우시고 많은 사람들이 보고 경험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예수님이 원하시는 성도와 교회의 믿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먼저 그것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 있습니다. 노아의 때에도, 롯의 때에도 심판이 임하기 전의 상황은 즐거운 일상이었습니다. 죄가 많을수록 삶의 긴장과 즐거움은 더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그들에게 필요없는 간섭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의 삶의 즐거움에 대한 욕망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가장 먼저 일상의 삶의 경건을 요청하십니다. 마지막 날은 아주 특별한 그 어느 날이 아닌 우리의 일상의 한 날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건강하지 않다면, 그 일상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통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신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들이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신앙적 덕목은 바로 감사와 영광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만난 날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었고,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 중 한 사람이 은혜를 만나고 감사드렸고, 사랑에 대해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마지막 때에 필요한 믿음이라 인정하십니다. 우리의 일상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은혜에 대해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우리 앞에 롯의 아내가 있습니다.

 

4. 소금 기둥을 바라보며

 

로마서 1:21에는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1:21) 온 우주만물 가운데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들이 반짝이고 있는데 그들은 스스로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영광을 우상들에게 돌리고 맙니다. 욕심과 욕망이 그들이 예배하는 우상이 되고 다스리는 왕이 됩니다. 32절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창세기 19장과 누가복음 17장에는 하나님을 알되 감사하지도 않고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자비 앞에서 오히려 세상을 더 사모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롯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욕망의 도시였던 소돔이 소금의 바다가 되었다면 그보다 더 단단하고 더 짠 소금으로 뭉쳐진 기둥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죄악의 도성을 더욱 사모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감사와 영광이 아닌 오히려 불평하고 불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를 소금의 기둥으로 세우셔서 후대에 많은 사람들로 보게 했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만족을 얻으려 했던 마음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대에 또 다른 소금기둥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으로 몰려와서 예수님의 복음의 길 아닌 자신들의 가치와 선택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이 지키는 율법을 지키면서 만족했고, 스스로 높아진 삶을 즐겼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그들은 또 다른 소금의 기둥입니다. 세상은 이미 소돔으로 변했고,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세상보다 더 악한 소금의 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복음이 주는 은혜와 자비가 즐겁지 않고, 세상에서 누리는 교만과 만족이 좋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여기 소금 기둥들이 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도 작은 소금 기둥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이 아닌 하나님의 복음은 때로 세상의 기쁨을 포기해야 하기도 하고, 나의 교만을 내려놓아야 하기도 하고, 고난과 고통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움직이는 소금기둥을 이기지 못할 때 우리는 롯의 처가 되고 바리새인이 되기도 합니다. 마음과 말과 삶이 소금투성이가 되기도 합니다.

 

복음은 분명 우리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길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감사와 영광의 일상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일상이 하얗게 욕심과 욕망의 소금으로 덮여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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