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훈련과 성장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11-8
8. 내적 훈련 - 3) ‘홀로 있기’의 훈련 / ‘고독’에서 ‘홀로 있기’까지
소설가 공지영씨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라는 수필집에 어느 두 신부가 산장에 가서 경험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깊은 산에 산장을 가지고 있던 신도 중 한 사람이 두 신부에게 자신의 산장을 빌려줍니다. 두 신부는 그곳에서 기도하며 쉬기로 하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조금 늦은 저녁, 어두울 때 겨우 도착한 그들은 창문 아래 열쇠를 두기로 한 곳을 찾았지만 열쇠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헤매고 있을 때 이미 불이 켜져 있고,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산장으로 들어가서 짐을 풀었습니다. 놀랍게도 아무도 없는 산장은 이미 따뜻하게 난방이 되어 있고, 식사 준비도 되어 있었습니다. 한 신부는 “어.... 이거 잘 됐네...”하고는 맛있게 먹고 바로 골아 떨어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신부는 도무지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적막하고 깊은 산중에 고요하기만 한 산장, 도대체 왜 문은 열려 있고, 음식이 차려져 있고, 불은 켜져 있으며, 따뜻하게 잠들 수 있도록 난방까지 해 놨을까요....? 그는 이상한 생각에 잠을 뒤척입니다. 저쪽 방을 보니 다른 신부는 불을 이미 끄고 코까지 골며 자고 있는데, 자신은 불을 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멀리서 이상한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끊어질 듯 계속되는 말.... 그는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으려고 애썼습니다.
“이제 자나 봐.... 그 봐... 잠들었잖아... 자는 거지? 그래, 자는 거야... 자.... 자는 거야.....”
그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누군가가 자신들을 재우고 나쁜 일을 하려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후다닥... 그는 다른 신분에게로 뛰어갔습니다.
“신부님, 신부님... 일어나 봐요... 이상한 사람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어요....”
다른 신부는 부스스 일어나서 왜 그러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무슨 소리가 나는지 귀를 기울였습니다. 분명 무슨 소리가 나고 있었습니다.
“에이... 신부님, 불을 켜 놓으니까 신부님 방 유리창에 파리 욍욍대는 소리잖아요. 그러니까 불 끄고 빨리 주무세요...”
알고 보니 불을 켜 놓은 방 창문에 산에 사는 큰 왕파리들이 즈즈즈~~~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그것이 ‘자나 봐...자...자...’로 들린 것입니다. 다른 신부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고 이 신부는 머쓱해져서 불을 끄고 자리에 눕습니다. 막 잠이 들려는 순간, 다시 무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슥슥슥...... 스윽...... 스윽......’
이번에는 영락없는 톱소리입니다. 아니면 칼을 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릴 적 들었던 귀신 이야기가 생각이 나고 무서웠던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으아악~~~ 신부님, 큰 일 났어요.“
다시 다른 신부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이 집에 누군가가 있어요. 톱으로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요!” 그들은 다시 귀를 기울였습니다. 역시 무슨 소리가 나고 있었습니다.
“아, 신부님! 왜 그래요. 귀뚜라미 몰라요? 귀뚜라미! 좀 잡시다! 자요!”
다음 날 아침, 누군가가 산장 문을 두드렸습니다. 뜬 눈으로 밤을 샌 신부가 나갔습니다. 왠 아주머니 한 분이 서 있었습니다.
“밥 해드리러 왔어요. 산장 주인 아저씨가 불도 켜 놓고 밥도 해 놓으라고 하셨어요. 어제는 제가 문 열어놨으니 그냥 들어가면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돌아보지도 않으시데요... 계속 창문만 만지시고... 그래서 그냥 갔어요.”
1. 홀로 있기와 함께 있기
어쩌면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고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듣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울리는 것만 듣는지도 모르지요. 나의 마음 속에 있는 불안함과 염려, 두려움과 분노가 내가 듣고 보는 것을 해석하고 평가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먼저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욕망과 두려움과 염려를 잠재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비로소 바른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회퍼는 ‘Life Together’라는 그의 대표 서적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설명하면서 ‘더불어 사는 삶’과 ‘홀로 사는 삶’의 연관성에 대해 말합니다. 그 둘을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홀로 있지 못하는 사람은 공동생활을 조심하도록 하라.... 공동생활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은 홀로 있기를 조심하도록 하라.... 공동생활과 홀로 있기는 각각 다 깊은 함정과 위험을 가지고 있다. 홀로 있기 없이 친교를 원하는 사람은 공허한 말과 감정에 빠진다. 그리고 친교 없이 홀로 있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공허한 깊은 수렁과 자기 도취와 절망에 빠진다.” (Life Together, p. 77-78)
함께 살도록 지음 받은 것이 사람입니다. 하지만 ‘함께 함’ 이전에 먼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혼자 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들의 ‘홀로 서기’를 가장 크게 방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 속에 있는 수많은 말들, 온갖 두려움과 염려로 무장한 우리의 말들입니다.
2. 한적한 곳으로 가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기록을 보면 40일간의 광야의 혼자 있는 시간으로 시작하십니다. 사람에 대한 일을 하셨지만, 사람과 함께 있기 보다는 혼자 있는 가운데 깊은 하나님과의 교통함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함께 가지고 있는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기 전에 혼자 하룻밤을 보내십니다.(눅 6:12) 세례 요한의 죽음을 들었을 때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어 가셨다”(마 14:13)고 했습니다. 5병2어로 5000명을 먹이시고 난 뒤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래 거기 혼자 계셨다.“(마 14:23)고 했습니다. 밤 늦게까지 사역하신 후에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 적한 곳으로...“(막 1:35)가셨다고 했습니다. 복음서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시지만 혼자 하나님으로 충만한 시간을 보내시는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조용한 곳에서 자신의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소리들을 잠재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채우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가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늘 한적한 곳,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셨을까요? 그것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가운데 예수님의 마음에 남은 수많은 사람들의 말들을 고요하게 하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들로 자신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그들과의 공동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말들을 삶으로 변화시켜내셨습니다.
3. 우리 마음의 빈 터
하지만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단순히 말이 없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고요함과 다른 의미입니다.
“소리와 음성으로 가득 찬 날이 고요함의 날이 될 수 있다. 만일 그 소리가 하나님의 임재의 메아리가 된다면, 그 음성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된다면 말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말할 때, 그리고 우리 자신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고요함을 떠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두신 그 친밀한 말씀을 되풀이할 때 우리의 고요함은 완전하게 된다.” (Catherine de Haeck Doherty, Poustina p.23)
우리는 ‘내적인 홀로 있기’와 ‘내적인 고요함’의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요함의 열쇠는 소리를 없애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은 소리를 잘 다스리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의 빈터를 마련하고 조용히 그곳 깊이 내려가서 내 속에서 나를 움직이는 말들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합니다. 그 말들이 만들어내는 파도가 무엇이며, 그 말들로 말미암아 난파된 내 삶의 파편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말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들어온 나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일 수 있고, 나의 이루지 못한 욕심과 성취되지 않은 목표가 만들어내는 외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내 안에 있는 말들이 나의 오늘의 해석하고 나의 내일을 인도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좋은 예는 우리의 내면이 영적인 빈터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들끓던 수많은 말들을 고요하게 하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말들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고요하고 안정된 빈 터를 마련하는 것 - 그것이 우리가 홀로 있기를 통해서 얻어야 할 삶의 지혜이자 용기인 것입니다.
4. 고요함의 훈련을 통과하다.
야고보서에서는 자신의 혀를 다스리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약 3:1-12) 야고보서에 의하면 혀를 여러 방법으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가 “혀는 곧 불이요”(약 3:6)라고 선언한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우리의 삶 전부를 불태울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야고보는 우리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많은 말들과 소리들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영적 훈련’입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훈련된 사람은 필요한 일을 필요할 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수한 축구 선수는 꼭 필요한 순간에 득점합니다. 오랜 훈련과 그 결과로서의 통찰력과 지혜가 그러한 능력을 가진 선수로 만들어줍니다. 마찬가지로 고요함의 훈련을 통과한 사람은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해야 하는 때에 할 수 있게 됩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 25:11)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경우’는 필요한 상황과 때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하는 것, 무엇을 말해야 할지 잘 알지 못하는 것은 고요함의 훈련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말하지 않아야 할 때와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문학과 예술에서 오랫동안 ‘고독’에 대해 말해 왔습니다. 어쩌면 이 깊은 고독의 수렁은 인류가 벗어나지 못했고 벗어날 수 없는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혼자 남겨진 것, 다른 사람과 따뜻한 가슴에 대한 그리움이 노래로, 그림으로,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져서 서로를 울리고 웃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류가 가진 ‘외로움’에 대한 처절한 고백이면서 절규입니다. 성경은 분명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홀로 있기를 선택하셨고, 홀로 있을 것을 권면하신 것입니다. 고독과 홀로 있기 - 닮은 듯 하면서도 전혀 다른 두 모습입니다. 고독은 남겨져서 두려움과 염려에 몸부림치는 모습이라면 홀로 있기는 우리 속에 넘쳐나는 그 모든 두려움과 염려의 소리를 잠재우는 시간, 고요함으로 훈련되는 시간입니다. ‘고독에서 떠나 홀로 있기’까지로 가는 훈련이 영성 훈련의 기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고요함의 훈련 끝에서 우리의 말과 생각을 다스리는 훈련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해 함께 생각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훈련의 과정을 신실하게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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