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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17. 10. 내적 훈련 - 5) 복종의 훈련 / 성경적인 복종 훈련(막 8:34) 이응도 목사 2011-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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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훈련과 성장(2011. 4. 27)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11-10

10. 내적 훈련 - 5) 복종의 훈련 / 성경적인 복종 훈련(막 8:34)

고등학교 3년 동안 세분의 담임 선생님은 정말 각각 다른 성품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1학년 때 담임이셨던 선생님은 지금 성함도 잘 기억나지 않을 만큼 제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공부를 특별하게 잘 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은 학교에 한 번도 오지 않는, 사고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는 학생이어서 그런지 매 한 번, 칭찬 한 번 기억이 없습니다. 다만 영어 선생님이셨는데, 술을 엄청 좋아하셔서 가끔 술에 취한 채 수업을 진행하신 것이 기억이 나고, 친구들 중에서 좀 잘 사는 녀석들의 부모님들이 자주 선생님과 술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2학년 때 담임이셨던 이차환 선생님은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 중 한 분입니다. 바르고 정직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는 분이셨습니다. 차근차근 수업도 잘 진행하셨고, 제가 회장이었던 기독교 동아리의 지도 선생님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속한 교단과 같은 교단에 속한 교회 안수집사님이시기도 했습니다. 드러나지 않게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관심을 보여주셨고, 세심한 지도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고등학교 때 수학에서 계속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선생님의 영향이었습니다.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성함보다는 ‘황대포’라고 기억이 나는 분입니다. 역시 수학선생님이셨고, 입시 관련 서적을 집필하실 정도로 유명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제가 주일에 학교에 나와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년 동안 철저하게 투명인간 취급을 하셨습니다. “너는 내 말을 안들었으니 입시 지도도 없어! 니가 알아서 해!” 굉장히 폭력적인 분이셨는데, 1년 동안 그 선생님에게 맞지 않은 학생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고, 전국 1등을 노리던 창용이라는 친구와, 주일에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고 아예 눈길을 안주셨던 저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각 선생님마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방법이 많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효율성을 강조하는 분이었습니다. 몇 명만 관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었고, 사고만 치지 않으면 서로가 별로 문제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모든 학생들과 적정한 거리가 있었고, 저 역시 그 거리 속에 있었습니다.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존경받는 분이었습니다. 때리는 일도 없고, 소리치는 일도 없었는데, 모든 학생들이 정말 잘 따랐습니다. 1년에 몇 차례 있는 각 반별 대항 환경 미화나 성적비교에 있어서도 늘 2-3등을 유지했습니다. 1등을 하는 반은 항상 바뀌었지만 항상 등수 안에 있는 반은 저희 반이었습니다. 다른 반은 선생님들의 열심으로 1등을 했지만, 우리 반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반이어서 1등은 못하지만 2-3등을 항상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너무 폭력적이었습니다. 한번은 선생님에게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맞고 또 맞아서 쓰러지는 학생이 있었고,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로 반나절을 코에 담배를 꽂고 있어서 코와 입에서 피가 나기도 했습니다. 워낙 성품이 거칠어서 교장 선생님조차도 어려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선생님들의 교권이 살아있던 때입니다. 하지만 그 권위를 발휘하는 방식은 각각 달랐습니다. 한분은 자신의 필요에 집중하는 분이었습니다. 이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듣기는 하지만 늘 최소한의 것만 하게 됩니다. 그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특별한 관심이나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엇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분은 교사로서의 사명을 생각하는 분이었습니다. 한 학생, 한 학생에게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자발적인 순종이 발생했습니다. 반의 분위가가 항상 밝고 좋았습니다. 선생님이고, 형님이고, 아버지셨습니다. 다른 한분은 어떤 방법을 택하든 목적을 이루는 분이었습니다.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학생들에게 ‘...........선생님’으로 불리지 않았습니다. ‘황대포’, 늘 뻥만 치고 말로만 한다는 비아냥으로 불렸습니다. 물리적인 폭력과 심각한 언어 폭력으로 학생들을 복종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존경도 사랑도 없었습니다.


1. 복종 훈련의 한계


오랫동안 복종의 훈련만큼 많은 오해를 가져온 영적 훈련도 없을 것입니다. 이 훈련은 뚜렷한 한계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계점에 이르게 되면 복종은 오히려 성경이 제시하는 사랑의 법, 겸손의 법, 나아가서 진정한 성경적 복종 정신과 부조화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교회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기관과 사람들은 이러한 부조화를 강요해왔습니다. 권력 혹은 권위를 가졌다는 사실과 다른 사람에게 복종을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동일시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지나치면 악함에 이르게 됩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국가 권력에 대한 복종을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총독에게 하라.“(벧전 2:13-14)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 정부가 초대교회에 대해 복음을 전하는 일을 금지했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19-20) 그리고 다시 말하기를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라고 했습니다.


바울 또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 복종하라”(롬 13:1)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정하신 의를 국가 권력이나 당국이 이행하지 않는 것을 볼 때 그 사실을 해명하고 잘못을 시정하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복종의 원리를 어기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복종의 원칙’이 강요되거나 파괴적인 방식으로 전달될 때 한계점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강요된 파괴적인 복종의 요구를 거절함으로 거기에 따르는 고난도 기꺼이 각오하는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독일의 사상가 요하네스 하멜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복종하는 삶에는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고난을 각오한 거부와 항거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때로 복종의 한계성을 명확하게 알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부도덕한 일을 교육을 하거나, 국가가 시민에게 성경의 원칙과 맞지 않는 요구를 할 때는 한계가 분명해 보이지만, 복잡한 인간 관계와 상황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우리의 삶은 때로 그 경계가 모호해지기도 합니다. 고용주가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특정한 사람을 편애하고 승진시킬 때, 교사가 지나치게 주관적인 방식으로 채점할 때, 운동 경기에서 심판의 판단에 심각한 오류가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때 우리가 복종의 한계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조명에 의존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께 의지하여 지혜와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종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과연 어떤 복종의 훈련을 시키셨을까요? 예수님은 참된 리더십은 낮은 데서 나오고, 권력은 자발적 섬김에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종의 형체를 입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모범”(빌 2:8)을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먼저 되고자 하는 자’, ‘높아지고자 하는 자’ ‘다른 사람의 지도자가 되고 싶은 자’들에게 철저하게 낮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낮아짐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의 존경과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가운데 삶으로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특별하게 대하셨고,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새로운 리더십은 당시 유대 사회를 흔들었고, 유대 사회의 권위를 지키고자 했던 당시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전하는 새로운 리더십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십자가의 삶은 자원하여 종이 되는 삶이라는 것을 몸소 보이셨고, 따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3. 사도들이 가르치는 복종


예수님은 모범은 사도들을 통해서 실천되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향해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권면했습니다. 베드로 또한 성도와 교회의 복종의 이유를 예수님에게서 찾았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가장 기본적 단위였던 가정에서부터 참된 복종이 무엇인지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엡 5:21)하라는 말씀은 당시 사회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사고였습니다. 또한 다양한 계층이 함께 있었던 교회의 성도들에게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은 상상할 수 없는 논리였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종의 훈련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사도들은 먼저 기존 문화와 사회 속에서 종속 관계에 있던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종들은 상전에게 복종할 것을 요청받았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시민은 국가에 복종해야 합니다. (골 3:18-22) 하지만 이러한 권면에는 깊은 새로운 사상이 흐르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전혀 선택의 기회가 없이 타성에, 혹은 강제적은 복종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을 도덕적인 자유의지에 의해 복종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도록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종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 자유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이며 영적인 자유입니다. 외적으로는 복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는 성도들에게 내면에서부터 흘러나는 복종의 자유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복종하면 종입니다. 두려워서, 혹은 이익을 위해 복종하면 노예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이전에는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삶을 본 받아서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순종의 삶을 살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발적인 종속이 ‘주 안에서 마땅한 것’(골 3:18)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당시 문화 속에서 지배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입장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질서를 가르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같은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을 향한 복종 혹은 종속의 명령은 상호적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상전들아 의와 공평은 종들에게 베풀지니....”(골 3:19-4:1) 이상의 말씀들은 ‘복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새로운 관계와 섬김으로 나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종들에게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상전을 섬기라고 권면하고, 상전들에게는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엡 6:9)라고 권면합니다. 종들의 상전에 대한 복종과 상전의 종들에 대한 대접이 실은 같은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신서들은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던 계급적인 사회구조를 그대로 받지도, 뒤집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에게 종속적인 관계에 있다고 밝힘으로 당시 사회의 질서를 상대화하고 허물었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새로운 질서, 그 질서의 근본적인 특징은 바로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고,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4.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우리는 과연 무엇에 대해 복종해야 할까요? 다음의 일곱가지를 통해서 우리의 복종의 대상과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1) 복종의 행위는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복종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것은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주께와 엎드려 경배드립니다.”는 찬양을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 엎드려 복종하는 그의 백성들입니다.


2) 복종의 행위는 성경에 대한 것입니다. 살아 계신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해 우리는 복종합니다. 자신의 의지나 판단에 의지하지 않고,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릴 줄 아는 믿음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3) 복종의 행위는 우리들의 가족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야”(빌 2:4) 합니다. 서로 교통하며 서로의 정서적, 영적 필요에 응답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4) 복종의 행위는 우리들의 이웃과 일상 중에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예수님을 본 받는 생활은 이웃을 통해 나타납니다. 작은 일상들을 통해 생활화된 복종이 필요합니다.


5) 복종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몸인 신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한 교회에서 만났습니다. 교회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복종이 있어야 하며, 성도들이 서로에 대해 복종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6) 복종의 행위는 상처받고 멸시받은 사람들을 섬기는데서 발생합니다. 어느 사회에나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로 표현된 사람들이 그들입니다.(약 1:27) 교회
와 성도의 책임은 그들의 눈물과 아픔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그곳에 있습니다.


7) 복종의 행위는 세계에 대한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상호의존적입니다. 일본의 재난은 곧 세계
적인 재난입니다. 아프리카의 기근과 아픔 또한 세계의 아픔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특히 교회는 세계적인 여러 문제들에 대해 주님의 뜻으로 섬기고 헌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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