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훈련과 성장(2011. 5. 18)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11-13
13. 단체 훈련 - 1) 고백의 훈련 - 고백의 근거(요1 1:8-10)
이제 결혼 3년 차, 아직 신혼일 수 있는 새댁으로 사는 ‘명혜’(가명)씨는 매번 상담을 할 때 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은 너무 거짓말을 잘해요.”
명혜씨를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그 거짓말이 대단한 시험과 유혹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너무 사소한 일들에 대한 욕심 혹은 순간을 피하려는 비겁함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주에 있었던 남편과의 일을 생각하며 명혜씨는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목사님, 왜 그럴까요? 왜 빤히 보이는 거짓말, 오래 가지도 못할 거짓말을 그렇게 해대는 것일까요? 저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거짓말을 배우는 것은 크게 두 가지 경우입니다. 하나는 늘 궁핍할 때입니다. 궁핍함을 느끼는 아이들이 그것을 채우는 잘못된 방식을 환경을 통해서 배우면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절박한 필요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도덕성을 배우는 일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무엇에 대한 간절한 필요를 느끼고 있는지, 그것이 어떻게 채워지거나 비어 있는지를 면밀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소한 자기 속임, 혹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속임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평생 그 자녀의 발에 걸린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녀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권위와 도덕성 앞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때 거짓말을 배웁니다. 자녀들은 일반적으로 부모들의 논리적인 사고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합니다. 부모와 다른 생각과 판단을 하고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자녀들에게 자신을 충분히 설명하고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시간과 과정이 주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는 자녀들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부모의 가르침에 동의하는지, 순종할 것인지를 다그쳐 묻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순종하기를 강요합니다. 순종이 강요된다는 것, 그것은 파괴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그 중 하나는 거짓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자녀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도덕성이 어린 마음에 얹히면 자녀들은 ‘속임’을 쉽게 배우게 됩니다. 왜 동생과 나눠야 하는지, 왜 남의 물건을 가지고 오면 안되는지에 대해 천천히 그리고 바르게 설명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명혜씨의 남편은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소위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키우지 않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누구보다 잘 키워서 보란 듯이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했습니다. 일반 가정보다 더 엄격하고 강하게 키웠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늘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아버지 없는 가정에 보이지 않는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고, 어머니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했습니다. “아들 참 잘 키웠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어머니의 귀에 들려줘야 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일, 하면 안되는 일들에 대한 욕구를 숨기고,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들을 하면서 자라왔습니다. 그 둘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었고, 그 간격은 거짓말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두 가지 이유는 모두 ‘결핍’과 관련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적인 필요의 결핍’입니다. 충족되지 않는 필요가 거짓을 만듭니다. 두 번째는 ‘수용성’의 부족입니다. 권위나 도덕이 아직 어리고 성장되지 않은 마음의 욕구를 수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이 두 가지 필요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쉽게 ‘속임’을 배웁니다. 자신을 속이고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을 속입니다.
사소한 거짓말에 길들여진 사람들을 바로 잡기란 쉽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더욱 안전한 길이며, 때로 부족함과 연약함이 드러나도 이미 모든 관계가 안정되어 있으므로 비난받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각인시켜야 합니다. 그 사람의 연약함에 대한 포용적인 태도,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는 자기 인식, 정직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결국 자신과 모든 관계를 유익하게 한다는 확신이 필요하겠습니다. 나아가서 작은 속임으로 얻은 순간의 안식 뒤에 숨어서 다른 사람의 반응을 살피는 비겁하고 연약한 모습을 이길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이 필요하겠습니다.
1. 진노일까? 사랑일까?
우리가 아는 것은 십자가는 곧 형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죄와 악에 대한 하나님이 택하신 ‘징계’의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시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십자가에 대한 내면의 동기는 진노일까요? 사랑일까요?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의 전 과정을 계획하셨고, 시작하셨습니다. 그 계획은 십자가 위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우리들을 위한 구원의 계획의 열쇠입니다. 누군가 인간이 범한 죄를 책임져야 하는데, 아무도 자격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 없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스스로 용서와 구원의 길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진노의 상징이 아니라 사랑의 상징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수많은 억울하고 슬픈 죽음의 형틀이 설명하기조차 숨막히는 사랑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처음있는 일입니다. 용서와 용납, 사랑과 긍휼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욕구, 그것의 상징이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2. 버림받음과 이루심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던 두 마디에 집중해 봅시다. 어떤 사람들은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외침을 예수님의 연약함으로 설명합니다. 결국 예수님도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하여 실망과 분노를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상태, 스스로 하나님으로서의 아무런 자의식도 가지지 않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완벽하게 인간이 되셨습니다. 죄의 결과로 징계를 받아야 하는 인간으로의 완벽한 동화 - 그것이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십니다. 구속의 일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심을 선택하실 때부터 이 땅에서의 모든 사역은 바로 이 십자가 위에서의 완벽한 죽음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상태, 그것은 곧 완전한 성취였습니다. 완전히 자신의 의지와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린 상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만이 자신에게 남은 상태 -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모든 일의 마지막을 하나님 앞에서의 버림 받음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버림 받음’과 ‘다 이룸’의 그 넓은 간격 - 그곳에 하나님의 우리들을 향하신 용서와 용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간격만큼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용납하십니다. 그 넓은 간격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어떤 큰 죄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시며 그만큼 용서하시며 그만큼 용납하십니다.
3. 십자가 앞에서 고백하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필요가 없습니다. 꾸중과 징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의 죄를 믿음 가운데 자백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1 1:8-10)
본문은 세 가지 ‘만일’이라는 문장을 사용합니다. 먼저 만일 우리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면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죄성을 스스로 외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범죄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하나님을 오히려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두신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따라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4. 모든 고백은 선한 것일까?
그렇다면 모든 고백은 선한 것일까요? 물론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관계 회복의 효력이 있습니다. 대부분 가정이나 친분관계의 회복은 잘못에 대한 고백과 용서에 열쇠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압니다.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고 해서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며 삽니다. 우리들 모두는 예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해도 반복되는 죄와 악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열쇠입니다. 고백은 심리치료의 핵심적인 방법입니다. 많은 상담에서도 고백을 사용합니다. 관계 회복에도 그 중심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십자가 위에서 행해지지 않으면 이것은 심리학적인 치료행위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고백’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고백하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기’가 필요합니다. 용서를 전제로 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대가를 바라는 고백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고 맡기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고백 또한 그렇습니다. 지혜롭게 하되,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보장하는 참된 고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적인 변화를 전제로 해야 합니다. 상대가 나의 변화를 요구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 변화를 결단하고 ‘이루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맡겨놓고는 자신의 의지와 습관을 지키려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품에 안고 자를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나의 내면에서부터의 지속적인 변화를 고백하는 것이 참된 고백이며, 우리에게는 이 훈련이 필요합니다. 비로소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결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입니다. 진리 앞에 우리를 완전히 노출시키는 것 - 이것이 바로 고백입니다. 담대하게 용기를 가지고 이 훈련에 임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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