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성경 공부

  • 홈 >
  • 예배와 말씀 >
  • 수요 성경 공부
수요 성경 공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 1. 기도, 하나님과의 사귐 이응도 목사 2011-09-07
  • 추천 0
  • 댓글 0
  • 조회 280

http://chodaepa.onmam.com/bbs/bbsView/80/544732

 
우리가 드리는 기도 – 1. 기도 : 하나님과의 사귐



야곱은 강가에 섰습니다. / 흐르는 강물을 보며 지나온 싸움들을 생각합니다.
그는 단 한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습니다. / 단 하나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첫 번째 싸움은 형과의 싸움이었습니다. / 단순하고 어리석은 형은 너무 쉽게 속아 넘어 갔습니다. 야곱은 원하는 ‘장자권’을 얻었습니다. / 하지만 그는 형을 잃었습니다.

두 번째 싸움은 아버지와의 싸움이었습니다. / 아버지 이삭에게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연로한 아버지를 속이는 건 쉬웠습니다. / 하지만 그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전에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싸움은 삼촌 라반과의 싸움이었습니다. / 라반은 참으로 끈질긴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속아서 레아와 결혼해야 했습니다. / 하지만 그는 라반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 라반보다 많은 재산과 라반의 두 딸을 이끌고 / 의기양양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 하지만 그는 가정의 평안을 잃었습니다./ 네 명의 아내와 수많은 자녀들은 싸우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이미 식구들과 종들은 많은 재산과 함께 강을 건넜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도저히 강을 건널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 눈을 감아봅니다.
어릴 적부터 힘이 세고 단순했던 형의 분노한 얼굴이 / 바로 눈 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형의 씩씩대는 호흡이 코 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그는 떨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나를 축복하소서! 나를 살려주소서”

어느새 날이 밝고 있습니다. / 야곱은 온 밤을 씨름했습니다.
하나님조차 견딜 수 없도록 기도했습니다. /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적이 없는 야곱, 단 한번도 물러서 본 적이 없는 야곱이었습니다. / 온 몸이 땀으로 젖고,
환도뼈가 위골되어도 결코 물러 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승리했습니다. /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든든한 하나님의 축복을 얻었습니다. / 하지만 그는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는 절뚝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파라오 왕이 야곱에게 물었습니다.

“총리 대신 요셉의 아버지,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야곱은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돌아봅니다. / 생각해보면 자신이 속이고 싸워서 얻었던 그 모든 것 중에 /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지 않았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약속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소유하기 위해 / 그는 참으로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누구보다 잘 달려왔다고 생각한 그의 인생은 / 알고 보니 절뚝이며 쩔뚝이며 헤매던 인생입니다.

“왕이시여, 나는 참으로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 지난 130년 동안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지만 / 내게 주어진 많은 것을 잃고 살았습니다. / 나는 결국 이곳 저곳을 절뚝이며 헤매는 나그네였습니다.”

그가 잃었던 아들 요셉이 파라오 곁에 서서 / 눈물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야곱의 입술에 쓴 웃음이 엷게 베입니다.


1. 우리 속에 있는 기도의 이미지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 참배 반대로 옥에 갇혔다가 일본 경찰의 계략에 의해 잠시 석방된 적이 있습니다. 일본 경찰들의 생각으로는 가족들과 만나고 오면 마음이 좀 더 연약해져서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주목사님은 성도들과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일사각오’라는 말은 주기철 목사님이 사용하신 신앙고백입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기도자의 이미지를 가장 잘 그려주는 성경 이야기를 하나만 들어보라고 하면 아마도 많은 성도들이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기도했던 야곱의 기도를 꼽을 것입니다. 기도의 투사들, 기도의 용사들이 될 것을 격려했고 마치 전투하듯 기도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왜 한국 교회는 이런 기도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우리 속에 있던 전통 신앙의 ‘정성’을 쌓는 것과 하나님에 드리는 기도의 개념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 성장하는 종교들은 사람들에게 일정 정도의 정성과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새벽마다 일어나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해야 하고 산에 올라가 목욕재개하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고행, 혹은 수행은 고유의 미덕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나아가서 100일, 혹은 1000일 동안 치성을 쌓는 것, 최선을 다해 헌금을 하고 자신의 정성을 바친 후 소원을 비는 것은 자신이 믿는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로 인정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후 한국적 심성의 바탕 위에 성장하는 과정 가운데 이런 요소들이 함께 스며들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2. 무엇이 문제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될 것이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간구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이런 기도가 기도자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기도자가 어떤 목적으로 어떤 영적 상태에서 구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구하는 것’에만 초점이 있습니다. 기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약 4:2-3을 봅시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설사 그 기도대로 이뤄진다 한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사람이 마치 노예에게 말하듯 하고, 말하는 태도가 부주의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말하고,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반복한다면, 나는 그것을 기도라고 볼 수 없다. 하나님, 아무도 이렇게 기도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3. 기도는 ‘사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 참된 기도는 무엇입니까? 존 웨슬리는 ‘은혜의 수단’이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진심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기도는 모두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과의 사귐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하나님께 모두 드려야 합니다.” 그는 기도의 본질이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사귄다는 것은 마음을 열고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귐의 일차적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서로 교통하고 난 다음 서로를 아는 것이요 서로 닮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귐의 관계가 지속되어 가면서 성도는 하나님을 점점 닮아가게 됩니다. 그 생각과 성품에서 닮아가고 삶과 비전에서 닮아갑니다. 무엇인가 요청하고 요구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자신의 변화를 확인하고 자신의 열망과 의지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조율된 다음 우리는 비로서 입을 열어 무엇인가를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능력 있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관계 없는 일을 강요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사귐이 없이 능력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4. 젖 뗀 아이와 같은 영혼

그렇다면 기도자들이 마음 속에 두어야 할 이미지는 얍복 강가의 야곱이 아닌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이’(시 131편)의 이미지입니다. 이 시편은 바른 기도가 무엇인지, 그 기도는 성도의 영적 상태를 어떻게 인도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다윗은 이 시에서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는 지금 위대한 업적을 이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능력에 넘치는 일을 하게 해 달라고 조르지도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마치 젖을 막 뗀 어린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것처럼 평온합니다. 엄마와 아기는 많은 말로 요구하지 않아도 서로의 기쁨이 되며 평안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영적인 상태가 가능합니까? 그것은 다윗의 고백대로 ‘오직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수잔나 웨슬리의 기도를 함께 묵상하며 오늘 말씀을 마칩시다.

오, 하나님! / 기도를 통해 아버지께 나아가기 전 / 저의 생각을 정리하고 안정시킬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우주의 주님이신 주님께 드리는 말씀드리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들어가기 전 / 제 영혼이 안정된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 마음을 정돈할 수 있는 조심성을 제게 주십시오.

아버지는 우리가 함부로 대할 수 없이 지극히 크신 분이며 / 거짓 헌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없이 지혜로운 분이며 / 진정한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제사를 가증하게 보시는 분입니다.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느낄 수 있도록 저를 도우시며 / 냉랭하고 형식적인 의식에 빠지지 않게 도와 주십시오. / 아무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기도를 시작하지 않도록 하시고 / 어떤 즐거운 일을 하기 위해 기도를 중단하고 / 기도했던 기억을 망각해 버리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 2.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눅 11:9-13) 이응도 목사 2011.09.07 0 301
다음글 목장 헌신 예배 / 목장은 사랑입니다.(행 2:37-47) 이응도 목사 2011.09.07 0 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