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 수요 예배 2011. 9. 7.
영성 회복의 7 단계 - 1. 항복하라!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마을로 들어섰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바쁜 걸음을 재촉합니다. 자기가 들었던 예수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서로에게 쏟아놓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한 소년을 붙들고 물어봅니다. “얘야, 도대체 사람들이 어디로 이렇게 바쁘게 가는게냐?” 소년은 귀찮다는 듯 대답합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가 우리 동네에 온대잖아요. 이거 놓으세요.”
나사렛 예수라.... 그 청년이라면 삭개오도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많은 바리새인들과 싸웠다든지 그가 병자를 고쳤다든지 그가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이야기는 아마 유대인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우리 동네에 온다고....? 나도 한 번 가볼까...’ 삭개오도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힐긋힐긋 자신을 쳐다봅니다. 마치 당신도 이런 일에 관심이 있었느냐고 묻고 있는 듯 합니다. 갈릴리에서 온 청년들, 그 청년들의 스승이라는 예수로부터 전해지는 놀라운 소식에 어떻게 당신처럼 돈만 아는 사람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입니다. ‘에이... 돌아가 버릴까...?’ 내딛는 발걸음과 다르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어느새 삭개오는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저기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모여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저 가운데 예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사람도 나에게 같은 눈빛, 같은 말을 하겠지.... 더러운 세리, 더러운 죄인이라 비난하겠지... 나 같은 사람은 상대도 하지 않겠지.... 하긴 누가 나를 좋아하겠어.... 삭개오는 혼자 중얼거리며 쓴 가슴을 어루만져 봅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머리 뒤에 뽕나무 이파리가 서걱거립니다.
삭개오는 그리 크지 않은 뽕나무를 바라봅니다. 그래... 저 나무 이파리에 숨어서 예수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보고나 가자.... 설마 잠시 보는 것도 거절하겠어? 어디 무슨 말을 하나.... 어떻게 말하나 봐야지....
사람들의 눈동자가 빛납니다. 평생 갈망해 왔지만 단 한 번도 만족해 보지 못한 사람들, 모두가 목말라하지만 아무도 채움을 얻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에게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그 무엇, 어쩌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을 예수에게서 찾으려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예수와 삭개오를 번갈아 보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더 놀라서 멍하니 예수를 보고 있습니다. 뽕나무 위에 있는 자신을 예수가 부를 때만 해도,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겠다고 이야기할 때만 해도, 그 예수 앞에서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며 부정한 재산을 토해 놓을 때에도 이렇게 가슴 떨리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한 번도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지옥의 땔감이라는 이방인들보다 더 무서운 형벌 속에 괴롭게 될 것이라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만난 예수가 자신을 영접해 줬습니다.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했습니다. 온 집이 구원을 얻었다 했습니다.
눈물 글썽이는 삭개오에게 예수님이 다가옵니다. 떨리는 그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그래, 삭개오야, 믿음은 자신을 던지는 것이란다. 깨닫는 순간 던지는 것이 믿음이지. 오늘 너는 이 많은 사람 중에서 단 한 사람, 믿는 대로 자신의 삶을 던진 사람이란다. 내가 나를 던져 이 땅에 온 것처럼 나를 믿는 사람은 자신을 내게로 던져 내 뜻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너의 삶에 평강이 넘칠 것이다. 너를 사랑한다.”
삭개오의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가슴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자꾸만 커지는 것 같습니다. 터질 듯한 가슴이 눈물로 넘칩니다. 이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1. 그들의 공통점
삭개오와 예수님 주변에 모든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무엇인가에 갈급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평생을 갈급해 하며 살아갑니다. 모두가 갈망하지만 아무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갈급함의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무엇을 채워야 할지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앞에 있던 그들의 삶의 결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왜 삭개오와 다른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른 방식으로 만날 수 밖에 없을까요? 그것은 삭개오에게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항복하기’(surrender)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2. 이것은 항복이 아닙니다.
항복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요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협상 도구가 아닙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항복을 통해 하나님을 조종하려 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께 항복했으니 하나님은 이제 나를 책임지고 성공시켜 달라는 요구가 포함되기도 합니다. 항복이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계획하고 설계하시도록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항복은 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항복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일 뿐, 하나님의 능력이나 역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항복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를 조급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결과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항복은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삶의 연속적 과정입니다. 우리의 삶을 드리는 일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보다 정확하게 항복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항복한 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이것이 항복입니다.
웹스터 사전은 ‘항복(surrender)’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다른 사람의 권력이나 통제, 또는 소유에 굴복하는 것; 영향력과 같은 무엇인가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항복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선 삭개오의 삶을 통해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삶의 부족함을 발견하자 곧 자신에게 있는 것을 그리스도 앞에 던집니다. 이전에 자신에게 중요했던 것, 이전에 자신의 인생을 그것을 위해 던졌던 것, 그러나 이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의미 없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항복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두신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자신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항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일들을 실행할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우리의 생각과 지혜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항복은 또한 다른 사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불완전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큰 공동체의 일원으로 만드셔서 우리를 보호하고자 하십니다.
항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겸손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것보다 더 좋은 은혜의 도구는 없습니다.
4. 항복할 수 없는 이유 / 항복해야 하는 이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의뢰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신앙의 본질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왜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항복하는 일을 잘 해 낼 수가 없을까요?
인간에 대한 사탄의 최초의 유혹은 ‘항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항복(surrender)의 반대말은 ‘control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다가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가운데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던 두 사람에게 이 말은 벗어날 수 없는 유혹이었습니다. 인간은 그 이후 스스로를 다스리고 싶은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예측 가능하고 조종 가능한 삶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바쳤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지 않으면 자신의 미래가 불안해지거나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 131편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다윗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예축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품 속에 있으므로 평안 가운데 잠들 수 있는 아기의 영성을 자신의 영성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전적인 의탁을 해야 하는 이유, 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종의 신분’으로 아버지 집에 들어왔지만 ‘아들의 신분’으로 변화된 사람이요, 생명과 경건이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이미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벧후 1:3) 하나님은 이미 우리들에게 모든 능력과 은혜를 허락하셨고 이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그 놀라운 뜻과 은혜 가운데 우리를 통해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진흙’과 같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뜻대로 빚으실 것입니다.
15세기의 작가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의 삶을 평안 가운데 주님의 손에 맡기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무슨 일에서든지 주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나를 사용하소서. 주께서 나로 더불어 하시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선하신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둠 속에 거하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기꺼이 그리 하겠나이다. 내가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기꺼이 또 그리하겠나이다. 주께서 나에게 편안함을 주시든 고난을 주시든 모두가 주의 뜻이니이다.”
오늘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만난 삭개오 또한 같은 평안을 가졌습니다. 그는 평안 가운데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진리가 우리들 모두의 마음에 뿌리 내리며 열매 맺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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