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 수요 예배 2011. 9. 7.
영성 회복의 7 단계 - 2. 인정하라!
하나님 앞에서 영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곧 자신과 하나님과의 본질적인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신이 주도하던 삶의 방향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무엇으로부터 시작하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파악하고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자신의 죄와 악함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윗을 통해서 한 개인에게 찾아온 영적인 위기와 회복의 과정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1. 바로 당신입니다.
다윗은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인 사람’이라 함은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꿈 꿔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만날 때 그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행 13:22에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칭찬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그의 이러한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께 전해지고 하나님의 마음과 교통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지울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는 실족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과 교통하는 은혜의 삶을 산다 해도 또 누구나 범죄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는 우리야의 아내를 범했고 그 죄를 덮기 위해 계략을 사용했고 악한 꾀를 사용하여 충성된 신하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우리야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행동했고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삼하 12:1-4에서 선지자 나단을 그에게 보냅니다. 악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나단은 말합니다. “그 악한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2. 싸우지 않는 군대, 고난 없는 성도
왜 영적인 사람이었던 다윗에게 이런 위기가 찾아왔을까요? 삼하 11:1은 우리에게 중요한 단서를 주고 있습니다.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어쩌면 이 장면은 다윗의 왕국 이스라엘이 강성해 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성경은 그 전쟁이 ‘왕들이 출전하는 전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성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무엇을 합니까? 2절에서 그는 저녁에 침상에서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군사로 싸우던 사람이 ‘쉬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더 이상 전투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부하들이 싸우던 낮에 잠을 자고 부하들이 칼과 창을 씻던 저녁에는 궁궐 지붕을 거닐었습니다. 사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싸우지 않는 하나님의 장수의 영적인 검과 방패가 녹슬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도의 영적인 평안은 삶의 편안함과 다릅니다. 삶의 편안함을 기도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싸우기를 거부하는 군대와 같습니다. 사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다윗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 싸웠을 때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싸우는 장수였습니다. 골리앗도, 그 누구도 그를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삶의 편안함을 선택하고 싸우기를 포기했을 때 사탄은 연약한 여인 하나로도 그는 쓰러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는 고난 없는 신앙생활을 원합니다. 평탄하고 편안한 길을 원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수많은 선지자들은 스스로 광야로 나갔고 교회는 늘 고난 가운데 믿음을 지켜왔습니다.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내 삶은 과연 복음을 위한 싸움의 현장인가? 나는 날마다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승리하고 있는가? 내 삶은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의 문화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현장에 있는가? 나는 그 싸움에서 매일 승리하고 있는가?
3. 왜 부인하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미 세상과 어느 정도 타협하고 있고 그 속 에서 편안함을 즐기고 있습니다. 다만 여러 가지 논리를 사용하여 부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왜 우리는 부인하고 어떻게 그것을 합리화합니까?
부인(否認)의 사전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에 관한 진실을 볼 수 없는 상태이며 어떤 의미에서 부인은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한번 하게 되면 그것에 집착하여 믿게 된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왜 ‘부인’하는 습관에 길들여지게 될까요?
그것은 첫째 진실이 가진 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진실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불편합니다. 손실의 위험이 따르기도 하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것은 변화의 요구 앞에 스스로 서는 것이기도 합니다. 삭개오가 자신의 잘못된 삶을 인정할 때 새 생명의 삶이 시작되지만 그것은 곧 그의 삶이 추구해 온 목적을 버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의 진실을 애써 외면했던 것은 그가 원하는 정욕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인정하는 것은 이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둘째 우리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My Way’는 프랭크 시내트라가 불렀던 노래였습니다. 하지만 이 노래는 노래 이상의 그 무엇을 현대 사회에 심어 주었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나는 내 방식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한국인 남성들 가운게 4, 50대에서 이 노래가 가장 인기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존재 앞에서 내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돌이키기 싫다는 것입니다. 창조 이후 인류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스스로 책임 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My Way는 철저한 거짓말입니다.
세번째 자신의 현재의 삶을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표를 위해 달리는 것이 인생입니다. 빨리 달리는 차 안에서 길가에 핀 꽃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빠른 선택과 결정을 강요 받는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비췬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나는 이미 이 길에 들어섰고 돌아설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과 멀어지는 길을 부지런히 뛰어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는 길을 부지런히 달려가는 인생들을 하나님은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4. 우리가 만나야 할 두 가지 진실
성경은 우리가 만나고 인정해야 할 두 가지 진실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자신에 관한 진실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에 관한 진실입니다.
1) 자신에 관한 진실을 봅시다.
말씀 드린 대로 영적인 회복과 삶의 변화를 위해서는 가장 먼저 참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참된 회개는 선행되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그것은 죄를 인정하는 단계와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는 단계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이며 결함 많고 부정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필요한 존재이며 온전한 변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거쳐서 참된 회개가 이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곧 벽에 부딪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자신에 관한 진실’을 부정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음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만을 자신에게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왜 그들에게 그러한 복음을 주시는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8-32에서 우리들의 영적인 현실을 지적하고 있고 3:10-12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거울입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볼 수 없다면 회복될 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통해 자신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비로소 새생명이 삶의 첫발걸음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시편 139편 1-2,4절을 봅시다.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릴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2)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에 관한 진실을 봅시다.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은 자신의 인생의 전기가 되는 중요한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부정했던 예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다가왔던 복음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오히려 핍박했었는데 그 복음의 진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소경이 되었습니다. 아니 차라리 소경이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자신이 보던 모든 것, 자신이 만난 모든 것을 부정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빌 3:4-6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삶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 모든 자랑거리가 다 ‘똥’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사람의 자랑거리가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후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의 삶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
자신의 삶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 섭리를 볼 줄 안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신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우리 마음에서 떠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함께 나누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면서도 중요한지 생각해 봅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21-8:2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자신의 영적인 곤고함을 인정하는 사도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에 의지할 수 밖 에 없었습니다. 그는 복음 안에서 참된 자유와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 평안, 그 자유가 우리들의 삶에 풍성히 넘쳐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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