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2011. 9. 21.
영성 회복의 7단계 - 3. 고백(confession)하라.
다윗은 범죄는 ‘과정’이 있습니다. ‘과정’이 있는 범죄는 순간의 유혹이나 충동으로 인한 범죄보다 심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긴 과정을 거치면서 과연 다윗은 죄에 대한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했을까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범죄했을 때 자기만의 방법을 사용하여 그것이 드러나는 것을 막으려 합니다. 때로는 더 크고 심각한 죄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는 우리야를 죽이고 우리야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는 방법으로 저지른 죄를 수습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 때 다윗의 영적인 상태는 어땠을까요?
시편 32:4에는 다윗이 스스로에 대해 느꼈던 영적인 위기감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연약하고 비참하고 힘이 다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죄를 몰랐거나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인정하지 않고 고백하지 못한 것입니다.
1551년 트렌튼 종교회의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죄를 고백할 때 의심할 여지없이 그 모든 죄를 긍휼하신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들과 의도적으로 죄의 일부를 고백하지 않는 자들은 선하신 나님 앞에 아무 것도 내어 놓지 않고 용서를 구한다. 병자가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자신의 상처를 의사에게 보일 수 없다면 모르는 부분을 어떻게 고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다윗이 이러한 영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복했음을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회복의 과정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위기의 순간 ?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나단의 표정이 변했습니다.
갑자기 변한 그의 표정에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손이 나를 향했습니다.
내 가슴이 천둥치듯 쿵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나단의 입술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불꽃이었고 그것은 칼날이었습니다.
나는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날은 정말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왕국은 크게 번성했고 군사력도 날로 커졌습니다.
평생을 말달려 전쟁터를 누볐었는데
이제는 장수들에게 전쟁을 맡기고
왕의 궁에서 누워있어도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날 아침 군사들을 출정시키면서
처음 맛보는 기분에 사로 잡혀 잔을 들었습니다.
비로소 왕이 된 기분, 비로소 세상 위에 올라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나는 이스라엘의 왕,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붉은 노을이 창을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나의 군사들이 피 흘리며 싸우고 있을 때에
이렇게 오수를 즐길 수 있다는 것에 잠시 기분이 묘해졌습니다.
그렇지... 이것이 바로 왕의 생활이지....
나는 산책을 즐기기로 했습니다.
내가 이룬 업적을 둘러보고 싶었습니다.
어디선가 여인들의 까르륵대는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것 같았습니다.
내가 들판에서 양을 먹일 때
가끔 여인들이 무리지어 시냇가로 나온 모습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 소리를 향해 옮겨졌습니다.
내 머리 속에는 이미 그 모습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마치 말을 달리듯 죄를 달려왔습니다.
죄를 계획하고 실행했습니다.
죄를 숨기기 위해 더 큰 죄를 만들었고
죄를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더 악한 마음을 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죄인 줄을 몰랐냐구요?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어떻게 계속 범죄할 수 있냐구요?
나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왕이 된 사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지,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지,
그 일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이지
내가 왜 느끼지 못했겠습니까?
다만 나의 범죄가 드러나는 것이 부끄러웠고
처음으로 맛본 이 즐거움을 버릴 수가 없었고
내가 이룬 이 큰 업적을 잃을까 두려웠을 뿐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
포기할 수없는 중요한 것들이 너무 많이 생겼습니다.
이전에는 돌맹이 다섯 개로 골리앗과 싸웠는데,
그것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지키고 싶은 것, 버릴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내 삶에 들어온 죄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일로 인해 잃어야 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습니다.
내 영혼의 진액이 마르고
죄로 인한 고통이 골수에 스며도
나는 그 죄의 긴 여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내 죄는 이렇게 항상 내 앞에 있었습니다.
외면할 수 없고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피하고 도망쳐도
하나님은 이 깊은 곳에 나를 찾아와
나의 죄를 고백하게 하십니다.
죄는
외면하고 부정하여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고백하며 자유로워지는 것,
사유하심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의 악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2. 직면할 것인가? 도피할 것인가?
어쩌면 다윗은 지금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을 때보다도 더 위험한 순간입니다. 죄를 인정하면 그가 쌓은 모든 업적을 잃을 수 있습니다. 영성을 잃을 만큼 소중했던 즐거움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모든 잘못과 죄를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결정해야 합니다. 다윗은 왕으로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나단을 가둘 수도 있고 모든 것을 부인하고 죄를 계속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때 어떻게 하십니까? 다른 사람에 의해, 혹은 말씀에 의해 여러분의 연약함이 드러났을 때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잘못이 드러날 때 먼저 방어의 자세를 취합니다. 행위를 합리화하거나 최소화하려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는 사람을 오히려 공격하기도 합니다. 도피 ? 이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습니다. 그는 삼하 12:13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편 51편의 고백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3. ‘고백’(confession)의 의미
고백한다는 말에는 “진실을 드러낸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진실을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을 치유하시는 가장 바르고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고백한다는 말에 헬라어 homologeo에서 나온 말로 “같은 것을 말하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말씀하는 것과 같은 뜻을 내 입술로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즉 내 삶에 들어온 죄에 대해 하나님과 같은 의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관한 진실을 말할 때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끊임없이 실패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관한 진리를 말할 때 우리는 소망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 섭리와 계획하심 가운데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음의 두 가지에 동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성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입니다.
4. 누구에게 고백할 것인가?
그렇다면 성도는 과연 누구에게 고백해야 합니까?
1) 하나님에 대한 고백
요일 1:9의 말씀과 롬 10:9-10의 말씀을 함께 읽읍시다. 하나님은 성도들과의 친밀함의 수단으로 고백을 요구하십니다. 비밀은 관계를 상하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비밀을 가진 성도가 하나님과 친밀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맡길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의 영적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2) 같은 성도들에 대한 고백
가끔 성도들 간에 서로의 비밀에 대해 말하는 것은 큰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이 이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 5:16을 읽읍시다. 서로에게 진실을 말하는 행위, 즉 믿음을 확인하고 그 믿음을 표현할 말을 찾고,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 놓는 것은 ‘책임감’과 ‘연함됨’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서로의 삶에 대해 책임지면서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함께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비판해서도 안되며 나의 연약함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3) 고백을 가로막는 두려움들에 대해
하지만 여전히 고백은 힘이 듭니다. 위험스럽게 여겨지는 고백을 하는 것보다 다소 불편하고 힘들지만 혼자 짐을 지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옳게 보이기도 합니다. 고백 이후에 감당해야 할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떤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까?
가장 먼저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과연 내가 나의 이런 연약함까지 드러냈을 때
내가 유지하고 만들어 놓은 명예와 사회적 위치, 혹은 체면이나 자존심에 심각한 위기가 찾아오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당장 내가 깊은 수치심과 고통을 느낄 수도 있고 그동안 쌓았던 재정적인 부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고백보다는 도피를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시기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이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시 32:3-4)” 그리고 곧 다시 고백하기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셨나이다.(시 32:5)” 죄에 대해 가장 안전한 선택은 그것으로 숨기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비로소 자유가 있습니다.
또한 좋아하고 즐기던 죄를 중단해야 하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삶의 습관만큼 죄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영성 회복과 습관적인 죄를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백한다는 것은 그 죄와 결별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영성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의 언어에 큰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 그 능력을 사용하고 싶으십니까? 그 출발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하나님에 관한 진실을 말하게 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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