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성경 공부

  • 홈 >
  • 예배와 말씀 >
  • 수요 성경 공부
수요 성경 공부
11.11.30. 교회론 - 3. 모이고 흩어지는 교회 이응도 목사 2011-12-03
  • 추천 0
  • 댓글 0
  • 조회 584

http://chodaepa.onmam.com/bbs/bbsView/80/544750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2011. 11. 30.

* 본 문 : 시편 133 편

* 제 목 : 교회론 - 3. 모이고 흩어지는 교회


“하나님 나라는 그대의 원수들 한가운데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하기를 원치 않고 벗들 사이에나 있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장미와 백합 꽃 가운데 앉아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 하지 않고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사람들이여, 만일 그리스도가 그대들처럼 행했다고 하면 누가 구원을 받을 것입니까?”


- Martin Luther


여러분은 위에 소개한 마르틴 루터의 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성도


이 글에 의하면 함께 교회로 모인다는 것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은 형제, 자매들과 함께 은혜와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부정적인 요소들이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러셨듯이 교회는 ‘원수의 세상’으로 나가야 하고 그곳에서 교회와 성도의 십자가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친밀한 관계 속에서 안주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더 이상 원수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았을 때 전혀 뜻하지 않은 결과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가 그 내부에서부터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복음의 원수된 성품들이 자라나기 시작하고 교회 안에 갈등과 분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지적하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빌 3:18)’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만방에 흩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슥 10:9를 보십시오. “나는 그들을 만방이 흐트러뜨릴 것이다. 그들은 먼 나라에서 나를 생각할 것이다.” 그들 스스로 세상으로 나아가고 원수된 것을 화평케 만드는 사역을 감당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흩으셔서 먼 곳에서 다시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로 모여야 합니까? 아니면 세상으로 흩어져야 합니까? 예수님은 교회로 모일 것과 세상으로 갈 것을 함께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명령 사이에 어떤 해결책이 존재하겠습니까?


2. 교회로 모이는 이유 – 성도의 교제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사명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가 예수님이 오실 때가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나아가는 그곳,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그곳이 바로 ‘원수’들이 있는 곳이요, 원수들이 우리의 평화가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곳이요, 원수들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변화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원수가 변하여 형제가 되는 현장이 됩니다. 교회는 복음의 원수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기 전에 먼저 교회는 함께 모여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봅시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모인 곳, 함께 교제하며 사랑하며 은혜를 나누는 그곳을 지금 시인은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원수들과 함께 살아가며 때로 지치고 힘들고 낙심하고 괴로울 때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살던 때, 은혜를 공급 받던 때를 기억하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원수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들고 싸우기 전에 우리가 먼저 모여야 하는 이유, 우리가 먼저 교제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영원한 생명을 나누는데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 원리를 건축물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 2:11-22를 봅시다. 우리는 원래 어떤 존재였습니까? 12절에서 우리는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 원수된 우리들이 가까워졌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가까워졌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되었지만 14절에 의하면 그가 우리의 ‘화평’이 되사 우리 사이에 있던 모든 ‘담’을 허무셨습니다. 이것을 16-17절에서 정리하기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평안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는 우리들의 완전한 신분의 변화를 선언합니다. 이제부터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가족이 되었습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우리 모두는 원래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같은 백성이요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두 구절로 요약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3.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귐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사귀는 사귐일까요? 말씀에 근거하여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만나기 위해 그리스도인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를 만나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할까요? 과연 어떻게 그리스도
의 은혜가 서로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요?


성도가 성도에 대해 가지는 가장 큰 의무는 서로에 대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복되고 거룩한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외면할 수 없고 거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야 하고, 그래서 교회가 필요합니다.


2) 그리스도인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그리스도인을 만나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몸된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합니까? 부족함과 연약함 그 자체입니다. 알면 알수록 실망스러운 것이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모습, 아픔을 주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까? 엡 2:14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화평’이라고 했습니다. 원수되었던 우리, 성도와 성도의 관계 속에 연약함과 부족함만을 가지고 있었던 우리들에게 우리 주님은 ‘화평’이 되십니다. 우리의 모든 부족과 연약함을 채우시고 우리를 하나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교제는 결국 무엇입니까? 무엇이어야 합니까? 성도의 교제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의 모든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는 것이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은 ‘형제됨’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을 만나야 합니다.


살전 4:9-12에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변의 가난한 교회를 돕는데 적극적인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표현이 독특합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밝히기를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자신들에게 있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10절에서 마게도냐 교회에 행했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이 돕고 더 많이 사랑할 것을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성도가 서로 사귀기를 원하시고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사귀며 형제요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로를 섬겨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한 형제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직 감사와 기쁨으로 서로를 사귀며 사랑을 나누며 도우며 서로를 세워야 합니다.


4. 사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마지막으로 시편 42편 4절을 봅시다. 1절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라고 고백하던 시인은 4절에서 그 갈급함 가운데 절절히 기억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던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몰랐었습니다. 성일을 지키는 무리들과 교제하며 함께 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하며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 땅에 흩어진 지금, 그때의 성도의 교제가 사무치게 그립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편의 시인이 노래하던 그 사무치는 그리움을 교회를 통해서 허락하셨습니다. 이 사랑에 대해 늘 감사하면서 주님이 허락하신 형제 자매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나누는 참된 교제, 참된 사랑을 나누는 교회를 이루어야 할 사명이 우리들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가 되셨고 우리에게 있는 모든 부정적인 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와 성도의 만남 자체가 감사하고 얼굴을 대하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전쟁터와 같은 이민 사회 속에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만이, 감격만이 있기를 소원해 봅니다. 주님의 은혜가 날로 우리에게 더할 것입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11.12.7. 교회론 - 4. 교회의 사명 이응도 목사 2011.12.08 0 507
다음글 11.11.23. 교회론 - 2. 예배하는 사람들 이응도 목사 2011.11.26 0 3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