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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7. 교회론 - 4. 교회의 사명 이응도 목사 2011-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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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2011. 12. 7.

• 본 문 : 마태복음 6장 9-10절 말씀

• 제 목 : 교회론 - 4. 교회의 사명


오늘 본문은 주기도문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가운데서 거룩하게 여김을 받는다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신다는 것, 하늘에 충만한 하나님의 뜻이 죄와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이뤄진다는 것은 지금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되는 세상, 증거된 복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인생이 있는 세상, 그 변화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도전하고 증거되는 세상입니다. 주기도문이 성취되는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1. 이 기도는 이루어 질 것인가? - 의존과 위탁에 대하여


그렇다면 주님의 기도는 과연 성취될 수 있을까요?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나의 가정에서, 이 교회에서, 그리고 이 땅 가운데 우리 주님의 기도는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 대답을 하기 위해서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왜 주님이 이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면 주님이 하실 일이지 왜 이것을 제자들에게, 여러분과 제게, 자라나는 모든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하셨을까요? 주님은 이 일을 이루는 데 있어서 제자들을 의존하고 교회를 의존하고 계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마 13:33에서 가루 서말과 누룩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짧은 비유에는 3종류의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그 중에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요? 이 비유는 천국에 대한 것이고, 천국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주인공 또한 여인입니다. 그 여인은 무엇인가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는 누룩입니다. 다른 것을 변화시키는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곡물 가루입니다. 그저 있으면 가루이고 다른 것들과 섞여 있어도 가루인데 이상하게도 누룩을 만나면 누룩에게 영향을 받아서 부풀어오르게 됩니다. 여인은 곡물 가루에 누룩을 넣고 이제 그것이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룩의 본성은 곡물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이고 만일 그 기능을 하지 못하는 누룩이라면 여인은 더 이상 그 누룩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여인은 누룩을 의존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인은 누룩이 가진 본성을 사용함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만일 그 누룩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감당하지 못할 때, 자신의 본질을 상실했을 때 여인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할 뿐입니다. 마치 맛을 잃은 소금이 버려지고 밟히는 것처럼 변화시키지 못하는 누룩은 더 이상 누룩이 아닌 것입니다.

여인은 누룩을 의지하여 가루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변화시키는 본성을 가진 누룩에게 가루 서말을 변화시키는 일을 ‘위탁’한 것입니다. 정말 그것이 누룩이라면 위탁받은 자기의 사명을 잘 감당할 것입니다. 기능을 상실한 누룩이거나 부패한 누룩이라면 결국 버림받을 것입니다.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주고 위탁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교회에 위임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반복해서 주신 것,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은 주님이 제자들과 교회에 대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임하신 것을 증명합니다. 위임받았다는 것은 원래 그 일이 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임받았다는 것은 내가 그 일을 해야 할 사명을 부여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혹은 모든 예배의 마지막에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함께 암송하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가 위임받은 사명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기도의 성취를 위해


그렇다면 교회가 우리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이루는 삶, 소명을 이루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일에 대해 교회에게 부과된 3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1) 복음을 전하는 일(롬 1:13-15) – 빚을 갚는 일


롬 1:13-15에서 바울은 지산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교회는 왜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바울은 ‘복음에 대한 빚’ 때문에 자신의 삶을 드려서 복음 전하는 일에 평생을 헌신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이 받은 큰 은혜와 사랑의 빚을 갚는 일, 의무를 다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부채의식, 사랑에 대한 강력한 의무감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2) 사랑의 본을 보이는 일(눅 10:30-37) –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교회가 가진 또 하나의 사명은 눅 10:25-37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바리새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은 교회에 대한 분명하고도 시급한 명령입니다. 왜 이 명령이 분명하면서도 시급한 명령입니까?


예수님은 36절에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보이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길 중 하나는 ‘이웃됨’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되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상황을 독특하게 설정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가던 나그네가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인생 가운데 당할 수 있는 갑작스런 슬픔,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지 않는 비극적인 삶의 결과, 이유 없는 상처와 고통의 가능성을 예수님은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요 이것이 죄와 악이 지배하는 인간 사회의 모습입니다. 때로는 무조건 억울하고 분노스럽고 슬픈 것이 이 세상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이런 상황을 무엇이라 표현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은 ‘원수’의 세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었던 세상의 기본적인 관계는 ‘원수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서술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그 상황 속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지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 한 사마리아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간과 돈과 노력으로 헌신하여 자신이 하지 않은 악행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세상의 악에 대한 책임을 무죄한 내가 지는 일,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해 보시겠습니까? 이것이 곧 ‘십자가’요, 이것이 곧 ‘십자가에 대한 빚을 갚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질문한 바리새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생을 얻는 일을 관념적인 믿음의 일로만 생각하던 바리새인에게 구체적인 삶 속에서의 책임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3) 빛을 비추어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 - 산 위에 있는 도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 가운데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권면을 합니다. 그리고 성도와 교회가 우리의 구원 받음에 대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밝히기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고 전하고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가 함부로 이 세상을 살아서는 안되는 이유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미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에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마 5: 14에서 예수님은 교회를 ‘산 위에 있는 도시’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설명하십니다. 산 위에 있는 도시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예루살렘 성을 뜻하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이 바라볼 수 있는 도시, 모든 사람에게 노출되어 있는 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도시는 숨길 수 없고 숨을 수 없습니다. 산 위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연상하게 합니까? 무엇인가 우러러 보고 존경할만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빛과 소금이라는 말로 교회를 설명하고 빛과 소금의 고유의 역할 속에서 교회의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처럼 ‘산 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본이 되고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본이 되어야 합니다. 선하고 착해야 합니다. 때로 그 착함과 선함이 어리석게 보일 수 있고 불편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아름답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렇게 어리석고 착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표현한대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가 흠이 없고 순전한 신앙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이 세상 가운데 빛으로 드러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우리 초대 교회, 산 위에 있는 거룩한 성이 되어야 겠습니다. 그 성으로부터 비춰지는 거룩한 빛이 세상의 상처 받고 어두운 심령들을 비추고 하나님의 뜻과 나라와 영광을 맛볼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런 교회, 그런 성도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채찍질할 수 있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3. 향기 나는 교회를 꿈꾸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2:14-1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우리는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게 하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은혜와 사랑과 생명의 향기요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향기가 될 것입니다.


이런 꿈을 생각해 봤습니다. 초대 교회를 스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성도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는 꿈, 초대 교회와 성도를 보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가 생각나는 꿈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상에 살면서 참된 안식과 평안과 위로와 말씀을 소망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때,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초대교회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꿈을 그려봤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는 충분하고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향기는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 – 그것은 주님의 기도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우리 초대교회가 그러한 현장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 이 기도와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고, 성령님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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