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2011. 12. 14.
• 본 문 : 사도행전 19:8-20
• 제 목 : 교회론 – 5. 성장이 있는 교회
저는 요즘 운동을 하면서 정말 “예전 같지를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축구를 할 때도 있는 힘을 다해 공을 차보지만 그리 멀리 나가지도 않고, 야구공을 던져도 팔이 빠질듯 아픕니다. 우리 교회 식구들과 축구를 할 때 자세히 보시면 제가 헐떡이면서 무릎을 잡고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운동하기 힘이 듭니다.
미국 UCLA 대학의 한 연구팀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동작을 담당하는 뇌 기능은 40세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뉴런을 통해 전기신호를 전달하는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이미 근육도, 뼈도 한 40년을 사용했으니 이제 조금씩 그 힘을 잃어가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우리의 신체는 40이상을 넘으면 더 이상 ‘상장’의 개념으로는 설명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퇴화’에 대한 준비를 하는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근거해서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초대교회는 성장하는 중에 있을까요? 퇴화하는 중에 있을까요? 다른 말로 하면 초대교회는 언제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요?
1. 베드로의 고민(벧후 1:3-11)
베드로 후서 1장에는 베드로 사도의 고민이 나타납니다. 성도들 가운데 예수를 알고 말씀
을 배우면서도 삶의 변화가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1장 8절에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ineffective and unproductive in the knowledge of jesus christ)”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게으른 것은 무엇이고 열매가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를 알고 믿고 있는데, 예수가 내 삶에 들어왔는데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지도 자극하지도 않는 삶을 사는 교회와 성도들을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의 가치를 자신의 삶에서 무력화시키고 있는 사람, 십자가의 능력을 삶으로 부정하는 사람, 그리하여 예수를 구원 얻는 도구로는 사용하되 그 예수가 원하는 삶, 그 예수의 뜻에는 전혀 무관심한 교회와 성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알고 예수를 주로 받아들이고 그러나 삶의 변화가 없는 사람의 삶을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게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들은 마치 소경과 같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에게 허락하신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가치를 알지도 못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허락된 옛 죄에서의 해방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의 삶에서, 죄와 악의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가 1장에서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과거는 어리석은 죄와 악의 삶이지만 우리의 현재의 삶은 ‘신의 성품’에 동참하는 자의 삶입니다. 4절을 봅시다. 우리의 과거는 정욕과 세상의 썩어질 것을 좇는 삶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신의 성품에의 완전한 동참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다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는 것, 하나님의 은혜로 성장하고 자라나는 것,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을 다른 한마디 말로 줄이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양육’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양육되고 있습니다.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신의 성품으로 훈련 받고 있습니다. 날마다 변화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교회의 모습입니다.
2.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명령을 무엇인가? (마 28:19-20)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능력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고 확인시켜주는 전시장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말씀의 능력이 변화되는 삶을 통해서 나타나고 증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마지막 명령은 다섯 개의 명령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 28:19-20을 봅시다. “가라! 제자를 삼으라! 세례를 주라! 가르치라! 지키게 하라!” 이 다섯 개의 동사 가운데 ‘가라!’는 동사 외에 나머지 동사들은 모두 양육과 관계된 동사들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 가야하고 세상에 복음을 전함으로 세상을 제자 삼아야 하고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풂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쳐야 하고 지속적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옥한음 목사님은 교회의 본질을 교육이 아닌 훈련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교육과 훈련의 차이를 마 28:19-20으로 설명합니다. 교육은 ‘가르치는 것’이지만 훈련은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교육과 훈련의 차이는 ‘공동체성’에 있습니다. 훈련은 함께 받고 함께 책임집니다. 그래서 옥한음 목사님은 한국 교회에 ‘discipleship’을 도입하면서 ‘제자 교육’이라고 말하지 않고 ‘제자 훈련’이라고 이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단순히 배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함께 훈련 받습니다.
우리 교회는 훈련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비로소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어 갈 것입니다.
3. 훈련이 있는 교회의 특징
그렇다면 훈련이 있는 교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다음이 네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1) 영적인 성장이 계속됨(벧전 2:2)
훈련이 있는 교회는 영적인 성장이 계속되는 교회입니다. 준비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성장 없이 양적인 성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복음으로 훈련되어야하고 지속적인 영적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비로소 복음이 교회를 통해 증거될 것입니다.
2) 말씀으로 든든히 서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을 얻음(행 20:32)
행 20:32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초대 교회 장로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장로들은 눈물로 바울을 말립니다. 그러나 바울의 결심은 변치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사명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32절에서 두 가지를 당부합니다. 첫째는 교회의 영적 성장의 근거입니다.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그 말씀으로 세우심을 입은 성도들에게 있는 은혜입니다. 말씀으로 성장하고 말씀으로 변화된 성도와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 그것은 ‘기업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업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분량이 있다는 것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든든히 서가고 그 말씀이 허락하는 사명을 받습니다. 여러분! 그 사명은 무엇일까요? 다시 초대 교회가 사도 바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저수지에 채워진 물이 넘쳐서 메마른 논과 밭을 적시듯이 말씀으로 인한 변화의 능력의 삶이 메마른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3) 성도들이 ‘규모 있는’ 삶을 살아감(살전 5:14, 살후 3:11)
세 번째 훈련이 있는 교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살전 5:14를 먼저 보겠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규모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권하고 가르치라고 말합니다. 살후 3:11을 봅시다. 여기서도 바울은 규모 없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규모있는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릇된 종말론으로 고통을 받던 교회였습니다. 위기의식을 느끼다 보니 훈련 받지 않은 초보 성도들에게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삶에 규모가 없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규모란 무엇입니까? 성도로서 받은 훈련이 없고 훈련대로 사는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이되 자신의 삶의 구체적인 결정을 내릴 때는 불신자와 같은 결정을 내리고, 성도이되 불신자와 같은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고, 성도이되 살아가는 방식과 가치관과 생각과 성품이 불신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규모 없는 성도의 삶의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무엇입니까? 훈련 받는 것, 양육을 받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훈련을 통해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점점 변화되어 갑니다.
4) 말씀으로 말미암는 변화가 지속됨(행 19:8-10, 18-20)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19:8-10을 먼저 보겠습니다. 바울은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강론했
습니다. 두 해 동안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18-20을 봅시다. 그들의 삶에 회개가 있습니다. 변화가 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20절을 봅시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이 얼마나 즐거운 변화입니까? 말씀으로 가르치고 말씀을 따라 삶의 변화가 있고 그 말씀이 각 사람의 삶과 교회에서 점점 능력이 있는 말씀이 되어 두란노 지역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4. 서로를 섬기는 교회, 서로에게 받는 훈련을 꿈꾸며(엡 2:19-22)
훈련과 삶의 변화가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엡 2:19-22에서 우리는 교회가 나아가야 할 훈련의 모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모델은 심플합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 되셨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의 터전 위에 교회는 세워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성도들의 몫입니다. 바울은 두 개의 부사를 사용해서 성도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합니다. 그 하나는 ‘서로’라는 말이요, 다른 하나는 ‘함께’라는 말입니다. 서로가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라는 것이 목회자 한 사람이 전 성도를 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도 훈련의 전부는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성도들을 돕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허락한 모든 성도가 모든 성도에게 성장의 버팀목이 되고 서로를 섬기며 서로를 격려하며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서로에게 경건한 영향을 미치며 모든 성도가 모든 성도에게 훈련 받으며 훈련하는 교회로 만드는 일을 도와야 합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모두 함께 하나님 안에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꼭 교회에 나와야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라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적어도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먹이시고 양육하시는 터전이요 밭입니다. 마치 모든 자녀가 결국 모든 부모의 품 안에서 자라나는 것처럼 성도는 교회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하지만 이 당위성을 주장하기 전에 먼저 교회로서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변화가 있는 교회, 영적 성장이 있는 교회, 양육이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가 먼저 어떤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초대 교회는 중요한 turning point 위에 있습니다. 변화의 시기가 왔습니다. 서로가 함께 세워가는 교회, 서로가 함께 훈련 받고 성장하며, 서로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자라야 하는 시기입니다. 함께 성장하는 교회를 향한 아름다운 비전을 가지고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며 말씀으로 살아가며 격려하며 주님이 예비하신 길을 걷는 복된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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