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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 내면의 질서 - 1. 흔들리는 세상, 견고한 믿음 이응도 목사 201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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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성경 공부 2012년 1월 4일

 본 문 : 빌립보서 2:12-18

 제 목 : 내면의 질서 - 1. 흔들리는 세상, 견고한 믿음

영성 운동가로 유명한 찰스 카우만(Charles Cowman) 부인은 현대인의 영성의 천박함을 지적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19세기 무렵 한 탐험가가 아프리카의 오지를 탐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현지인들을 고용해서 탐험에 나섰는데 처음 3일이 너무 순조로웠습니다. 예상 밖의 속도로 원래 일정보다 훨씬 빨리 목표지점에 도달했습니다. 그 탐험가는 기쁨 마음으로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목표를 빨리 이루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나흘째 아침, 원주민들이 움직이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왜 움직이지 않느냐고 묻는 탐험가에게 원주민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사흘간 우리가 너무 빨리 왔기 때문에 우리 영혼이 아직 우리 몸을 따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영혼이 우리 몸을 따라 잡을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려야 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여러분의 시간과 삶을 잘 좇아가고 있습니까? 날마다 해야 하는 수많은 일들과 지불해야 하는 Bill들과 사랑해 달라고,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과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솟아나는 욕구들에 쫓겨 나도 잘 알지 못하는 길을 휘달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1.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세가지 질문을 던지려 합니다. 그 첫 번 째는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주석가요 설교자인 윌리엄 바클레이 목사는 ‘사무엘 코울리지 이야기’라는 글에서 ‘코울리지’라는 목적 없이 사는 어떤 사람의 비극적인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코울리지 이야기는 훈련 없는 인생이 빚어 낸 최악의 비극이다. 그토록 탁월한 지성이 그렇게 보잘 것 없이 산 경우는 달리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군에 입대하려고 켐브리지 대학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말을 손질하는 일을 하기 싫어서 군대도 그만 두었다. 옥스포드 대학에 다시 들어갔으나 학위도 받지 못한 채 그만 두었다. ‘The Watchman’이라는 신문을 발간했지만 10호를 넘기지 못하고 폐간해 버렸다….”


바클레이는 많은 재능과 다양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을 왜, 어떤 목적으로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방향 없이 흔들릴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디디는 데는 별 문제가 없는데 과연 이 발걸음의 끝이 어디인지는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난 사도 바울은 한 때 과거에 방향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유대의 율법에 강박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아마도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일과 조직에 참여하는 일, 학문의 사회적인 성취를 이루는 일과 인정받는 일에 자신을 바쳐왔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자신을 분노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이룬 유대주의와 헬라 철학에 도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분노를 따라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가두기도 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지런히 그 분노를 따라 달려가던 그는 하늘로부터 들려온 단 한마디 음성을 듣고 쓰러지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 말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는 것을 너의 인생의 목적으로 삼느냐? 왜 헛된 곳에 네 삶의 목표를 두고 있느냐? 하나님을 믿는다는 네가 하나님을 핍박하는 삶을 살 수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잘못된 목표에 이끌려 쫓겨 다니던 바울은 그 모든 목표를 일거에 무력화시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여, 내가 어찌해야 합니까?”라며 엎드린 사울을 인도하셨고 그의 삶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바른 길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내 삶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유혹하는 이 세상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에 심어두신 하나님의 소원을 알고 있습니까? 그 음성에 대하여 열린 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2.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Holmes Stress Chart’라는 것이 있습니다. 유명한 심리학자인 Thomas Holmes는 한 사람이 받는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이며 그것이 질병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이 어느 정도인지를 수치로 측정했습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 사망이 가장 큰 스트레스인데 100점, 해고 당했을 때 47점, 새 가족 구성원이 생길 때 39점, 명절을 준비할 때 12점, 휴가를 계획할 때 13점 등과 같이 점수를 계산해서 그가 현재 속한 상황 속에서 얼마나 긴장 속에 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테스트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 평균적으로 가장 높은 스트레스 점수를 받은 사람들이 누군지 알겠습니까? 두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사업가들이었습니다. 소위 CEO들은 늘 새로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목회자들이었습니다. 홈즈에 의하면 목회자들은 거의 정신병적 수준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 두 종류의 사람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앞서가는 것 같고 창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요구와 일의 필요 앞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책임질 것이 많고 해결할 것이 많습니다. 그저 쫓겨 다니는 삶을 살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많은 필요와 요구를 충족시키며 살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범죄한 이후 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에덴 동산 이곳저곳을 헤매며 숨을 곳을 찾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던지시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의 위치를 묻는 질문일까요? 아닙니다. 아담의 삶의 영적인 자리, 아담의 삶의 실존의 의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는 하나님 반대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새 사탄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새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구요, 그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이 아내가 주는 과일을 먹었을 뿐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담이 외쳐 봐도 자신의 선택과 발걸음은 이미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자신이 그것을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여러분에게 두 번 째 드리는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절규했던 것처럼 “하나님, 나는 그저 마음 가는대로 살았을 뿐, 발걸음 닫는 대로 살았을 뿐,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맞춰줬을 뿐, 하나님을 대적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어느새 우리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리에 서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나는 바람 따라, 물결 따라 흐르면서 하나님의 목적과는 상관 없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내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소원을 두셨는데, 나는 세상이 내 앞에 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이리저리 흐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3.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까?


사울은 왕이 되었지만 가장 연약했던 벤냐민 지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였던 사무엘은 자신을 멀리하는 것 같습니다. 빨리 다른 나라보다 큰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다. 어느새 정적으로 자란 다윗이 부담스럽습니다. 할 일이 많고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는 허덕이며 쫓기며 살았고 결국 술을 의지해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삶에 평강이 있을까요? 그의 삶에 기쁨이 있을까요? 그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너무도 중요한 일, 기름 부음 받은 왕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데 정작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어떤 기쁨도, 평강도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자신이 갇힌 것을 즐거워하는 성도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갇혀 있을 때 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다른 성도들을 섬기기도 합니다. 1:17을 보십시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15절을 보시면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말씀과 2:3에서 “다툼과 허영으로 한다”는 말씀은 같은 맥락입니다. 그 마음에 투기와 분쟁을 품고 평안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들이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동력이 바로 ‘다툼과 허영’ ‘시기와 질투’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의 삶은 분주하고 바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 기쁨이 있을까요? 그들의 삶에 평강이 있을까요? 제가 드리는 마지막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매일 열심히 살아가시는 여러분! 교회의 각종 봉사와 모임에 참여하시는 여러분!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참된 영적 동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봉사와 섬김을 하기는 하는데 피곤하다면, 예배와 찬양을 드리기는 하는데 뭔가 자꾸 힘이 든다면, 성도와 사귐을 가지기는 하는데 자꾸 갈등이 생긴다면 그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그 무엇으로 말미암는 내적 동기가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때 지극히 바쁜 삶을 살았습니다. 전세계를 누비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기쁨과 은혜가 넘쳤습니다. 그는 자신을 만나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았고 그 부르심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감옥에 누워 있습니다. 아직도 그는 바쁩니까? 아직도 그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까? 그의 사역에 효율성이 있습니까? 그의 삶은 화려하게 피어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로마의 어둠과 깊은 감옥에 갇힌 죄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그의 삶은 가치 있습니까?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여전히 주님의 사도로 일하고 있고 기쁨과 평강과 은혜로 충만합니다. 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의 삶이 자신과 환경의 필요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초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 2:13에서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심령 깊은 곳에 하나님의 소원을 두셨다고 했습니다. 그 소원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소원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원망과 시비’가 있을 수 없습니다. 17-18절에서와 같이 오직 기쁨과 감사와 평강만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4. 우리를 흔드는 세상, 흔들리지 않는 믿음


막 4:35-41을 봅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로 나갔습니다. 고요하던 바다가 갑자기 폭풍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다 해보았지만 도저히 이 바다를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원망하며 깨웠습니다. “우리가 지금 죽게 되었는데 잠을 자시다니요…. 왜 우리의 위기를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은 바다를 잠잠케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꾸짖으시기를 “왜 무서워하느냐? 왜 믿음이 없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어부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곧 풍랑이 올 것을 모르고 배를 띄울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작은 파도가 온다고 해서 그리 두려워할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을 이미 어두워진 바다로 나갔고 풍랑을 만났고 모든 제자가 죽음의 두려움을 느낄 만큼 풍랑이 거샜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두려움을 이해하지 않으십니다. 바다를 꾸짖고 그들을 꾸짖습니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이 ‘풍랑’과 ‘잔잔함’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던지시는 ‘메시지’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를 잔잔하라고 명령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무엇에 대해 꾸짖고 계십니까? 그들의 믿음 없음에 대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바다를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마음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그들은 지금 흥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야… 우리가 정말 대단한 선생을 만난 것 같다… 어쩌면 이 선생을 통해서 내 꿈이 이뤄질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위기를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이 자꾸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을 자극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에 유대주의의 권위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흥분하고 기뻐하고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의 풍랑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에 몰아치는 풍랑이 문제인 것입니다.


잠 4:23에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키고 싶은 수많은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잃으면 우리는 늘 쫓기고 두려워하고 우왕좌왕하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보시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키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찾아오셔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주님께 우리의 마음의 주인의 자리를 드리고 그 인도하심을 살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연약한 삶, 이 연약한 교회를 나의 욕심이나 생각을 따라 거친 풍랑 위에 내놓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잘 정돈된 부르심에 우리를 내어 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전했던 그 기쁨 위에 큰 기쁨, 평강 위에 큰 평강이 이 우리 모두와 교회 위에 흘러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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