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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믿음의 기도 이응도 목사 201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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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2012. 2. 1.

믿음의 기도 (눅 18:1-8)


한국을 설명하는 단어들 가운데 가장 독특한 한 단어를 선택하라면 단연 ‘한(恨)’이라는 말입니다. 애절한 목소리로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라고 노래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는 것이 우리 한국 사람이요, 무엇인가 마음 한 켠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안고 ‘내가 언젠가는....'이라는 말을 되내는 사람이 한국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과 소원을 눈에 띄는 모든 사물에 대입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산에도, 바다에도, 들에도 각각 그것들을 주장하는 신령들이 있어서 자신의 감정에 동의해주고 소원을 들어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한국인의 이러한 정서가 가장 크게 반영된 것이 바로 한국 정통의 무속신앙이요, 기도생활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성황당 앞에 돌을 쌓건, 삼신할미에게 정화수를 드리던, 장승 앞에 절을 하던 그 모든 기도가 응답되리라는 확신을 가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응답되면 좋고, 응답이 없어도 그만입니다. 온 세상에 신이 충만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신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되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행위인데, 믿음이 없는 기도를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한 과부의 원한과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1. 비유의 대상


누가복음 15장에서부터 18장에 이르기까지 나타난 예수님의 비유를 보십시오. 여기에는 ‘잃어버린 드라크마’, ‘불의한 청지기’, ‘부자와 나사로’, 그리고 ‘불의한 재판관 비유’가 등장합니다. 비유를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그 비유가 누구에게 선포되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본문은 시작부터 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항상 기도하고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도록 하기 위해” 이 비유를 주신 것입니다. 누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은 비유의 주인공으로 한 과부를 끌어오고 있습니다. 이 과부는 낙심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기도는 하나님께 응답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평생을 슬픔과 눈물 속에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있습니다. 한글 성경은 이것을 ‘원한’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굉장히 번역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영어 성경을 가지신 분은 한번 살펴보십시오. NIV성경에서는 이것을 “grant me justice against my adversary”라고 하고 있고 RSV에서는 “vindicate me against my adversary”라고 하며, king james에서는 “avenge me of mine adversary”, 그리고 Living Bible에서는 “appeal for justice against a man who had harmed her.”라고 했습니다. 왜 각각 다르게 번역되었는지 아시겠습니까? 영어에는 한국어의 ‘원한’ 혹은 ‘한’에 해당하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문에 가깝게 번역한다는 King James에서는 내 원수를 갚아달라는 말로, 현대어에 가깝다는 NIV에서는 내 원수의 악에 대해서 내가 옳다는 것을 보여 증명해 달라고 번역하고 있고,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한 Living Bible에서는 여인이 자신을 해롭게 한 사람에 대해 공의로운 심판을 요구한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한글 번역은 아주 뛰어납니다. 과부는 지금 마음 속에 겹겹이 쌓여 있는 ‘원한’을 풀어달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일회적인 사건이나 상처가 아닙니다. 재판으로 끝날 문제도 아닙니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고 생각만해도 분노를 참을 수 없는 아픔입니다. 지금 과부는 그런 사건을 들고 재판관에게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말로 과부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유대인들, 제자들, 돈과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은총과 위로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권면하십니다.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과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2. 기도의 두 가지 원칙


1) 기도의 1원칙 – 항상 기도하라!


기도의 1원칙은 ‘항상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주 평범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두 가지 이유로 기도를 포기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이유는 하나님이 고난의 원인을 제거하고 평강을 주셨을 때입니다. 그들은 번영과 평화를 누리면서 교만해 집니다. 그들이 고난, 간구, 평화, 타락과 범죄, 다시 고난의 사이클이 돌아가는 역사를 보여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 이유는 그들은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해 주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때 기도를 포기했습니다. 다른 신을 찾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안으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헤롯당들의 군림에 핍박당하고 밖으로는 로마의 학정에 고통당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돕지 않습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다리다가 죽어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기도를 포기합니다. 기도해도 환경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도를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2) 기도의 2원칙 – 낙망하지 말라!


기도의 두 번째 원칙은 ‘낙망하지 말라!’입니다. 특별히 낙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은 한 과부의 예를 드셨습니다. 따라서 이 과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로마의 식민지로, 유대 귀족 사회에서 하층민으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인으로, 가정 중심의 유대 사회에서 보호 받을 수 없는 과부로, 겹겹이 고난과 고통과 멸시와 천대를 당해 온 한 여인의 삶에 주목합니다. 누가 이 여인보다 더한 고통과 슬픔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과 제자들은 이 과부의 비유를 들으면서 아무도 내 고통이 그 과부의 고통보다 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과부가 낙심하지 않는 것처럼,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너희도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3. 두 가지 기도의 원칙을 지키는 법


하지만 이 기도를 드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도의 의지를 약화시키거나 기도할 수 없
도록 만드는 내적, 외적인 요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1) 소원을 분명히 하라!


우리 말에 “아니면 말고…” “싫으면 말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 말을 들어주면 좋겠는데, 뭐… 안들어 줘도 좋고…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혹시 이렇게 기도하지는 않습니까? 기도를 하기는 하되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라는 확신 없이, 혹은 안들어주셔도 그만이라는 태도로 기도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간절하게 소원하는가를 보십니다. 그 간절함 속에서 믿음의 진실성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종의 병을 고치려던 백부장에게서, 38년을 혈루병으로 누워있던 여인에게서,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선 소경에게서, 지붕을 뚫고 침대에 누워 주님을 만나기를 원했던 중풍 병자에게서 예수님은 기도의 절박함을 보셨습니다.


어떻게 낙심하지 않고 우리의 기도를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소원의 진실성, 그 간절함을 지켜야 합니다. 비유 속에 과부는 그 재판관의 불의함에 관계없이 자신의 소원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 원한, 오랫동안 겹겹이 쌓인 슬픔과 아픔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고 해결될 때까지 빌고 또 비는 것입니다. 불의했던 재판관이 결국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는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소원의 간절함과 진실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하라!


둘째 원칙은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과부는 동네 사람들에게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습니다. 내 원한을 해결할 사람은 오직 저 재판관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기도의 대상에 대한 확신이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섭리와 때와 인도하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해결을 우리의 해결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내 마음이 시원해 질만큼 내가 심판자와 집행자가 되기를 원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바로 이 때에, 이 방법으로 하나님이 일해주시기를 원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합니까? 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 기도는 응답되어집니다. 언제, 어떻게 말입니까? 하나님의 섭리와 때를 따라서입니다.


4. 믿음을 보겠느냐?


예수님은 이 말씀을 주시고 그 얼굴에 답답함이 번져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다. 뭔가 시원하고 자극적인 말씀. 내가 당장 너희들의 모든 기도를 응답해 주겠다는 말씀을 듣고 싶었는데 예수님은 낙심하지 말고 계속 기도하라는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도대체 얼마나 오래 기도만 하고 있어야 합니까? 우리의 연약함을 모르십니까?” 무언의 압력에 예수님께 밀려듭니다. 예수님은 한숨을 쉬시듯이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내입니다. 기다림입니다. 신뢰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겸손한 엎드림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때, 우리의 모든 억울함과 분노와 아픔과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될 그 때까지, 우리 주님의 손에 세상의 모든 불의한 것들이 맡겨지기까지 너희가 믿음을 지킬 수 있겠느냐? 너희가 나를 믿고 기다릴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 우리 주님의 안타까움과 소원이 함께 묻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안타까움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과연 주님이 오시기까지 굳건히 그 믿음을 지키는 사람을 볼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 주님의 소원이 그곳에 있습니다. 주님은 그 믿음을 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말씀은 “그런 믿음을 보고 싶다!”는 말씀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얼마 전에 가일이의 키를 쟀습니다. 지난 한 해 거의 10cm 정도 자랐습니다. 가일이는 저보다 더 크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 소원, 그 기도는 언제 이뤄질까요? 만일 가일이가 그 소원이 왜 이뤄지지 않느냐고 아빠에게 다그치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성장세로 보면 아마 1-2년 안에 가일이는 저만해질 것이고, 그 시간이 지나면 키도 힘도 저를 넘어설 것 같습니다. 지금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은 이미 그 안에 자신의 소원이 이루질 수 있는 모든 요건들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곧 믿음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다림이요, 인내입니다. 그 인내, 그 기다림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위로의 때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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