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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5. 요셉 소명 - 1. 꿈, 하나님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문 이응도 목사 201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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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2012. 2. 15.

요셉 소명 - 1. 꿈, 하나님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문


‘하나님의 타이밍’이라는 책을 쓴 오스 힐먼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만남을 소개합니다. 그 만남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깊은 충격과 시련 가운데 허락된 만남이었습니다. 일구었던 사업이 일순간에 무너지고, 사랑했던 가정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시련의 원인이 무엇인지, 언제까지일지,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고민하던 그는 무작정 평소 방송이나 테이프으로 즐겨 듣던 강연을 떠올립니다. 그 강연을 했던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작정 전화를 하고 자신이 살던 아틀란타에서 워싱턴 DC로 날아왔습니다. 그가 만난 사람은 국제 기독교 상공회의소(ICCC) 대표를 맡고 있던 군나르 올슨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오스 힐먼은 자신의 삶의 여정을 소개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한참을 설명하고 있을 때
그는 군나르 올슨의 입가에 번진 미소를 발견합니다. 슬며시 마음이 불편해진 오스 힐먼의 표정과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바로 그 때 군나르 올슨은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스, 부디 화내지 마세요. 우리가 웃은 것은 당신의 고통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 방법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과 비슷한 사연을 지닌 사람들을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보내신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운 뿐입니다.... 사실 당신의 이야기는 아주 일반적인 패턴 속에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요셉 소명’이라고 부른답니다. 오스, 당신은 실패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요셉 소명을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이 어떤 지도자를 통해서 엄청난 일을 이루게 하시려고 먼저 심각한 역경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역경을 통해서 지도자의 인격을 세우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함이지요. 하나님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역경을 선하게 사용하십니다. 요셉 소명의 원칙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스 힐먼은 그 만남을 마친 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요셉 소명의 렌즈를 통해 나의 역경을 본 순간, 나의 관점은 완전히 바뀌었다. 더 이상 자신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실패자로 보지 않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대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나를 대해 오셨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1. 산 속에서 산을 보다.


그런데 이렇게 단 한 번의 만남으로도 그 마음과 삶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지혜를 발견할 수 있었던 오스 힐먼이 왜 오랫동안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을까요? 왜 그는 그 만남 이전에 스스로 그 지혜를 발견할 수 없었을까요?


동전이 큰 지, 태양이 큰 지를 묻는 것은 참 어리석은 질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동전으로 우리의 눈을 가리면 우리는 태양을 볼 수 없습니다. ‘손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우리 옛 표현이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왜 오스 힐먼은 짧은 만남을 통해서 얻었던 놀라운 영적 통찰력을 혼자서는 깨달을 수 없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자신이 당한 고난의 산에서 그 고난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당한 고난에 마음을 담아두었고, 그 고난으로 안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많은 시인들이 고민했던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있는 고난을 바라봅니다. 왜 이런 고난이 다가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믿음으로 살려고 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의롭게 살려고 노력했는데, 삶의 결과는 최악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낙심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 때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 지혜는 그들의 마음을 고난의 산에서 옮겨와 하나님의 산에 심을 때 비로소 발견됩니다. 시편 73편에서 고민하고 낙심했던 시인이 마음의 평안을 회복하게 되는 시점은 그가 하나님 앞에 설 때였습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5-16) 비로소 그는 마음의 힘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의 마지막 고백은 참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 73:28)


고난의 산 속에서 산을 보면 우리의 삶에는 모든 고통뿐입니다. 억울하고 분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직 낙심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과 눈을 옮기는 순간, 하나님의 산에 우리의 마음을 심고 하나님이 주신 관점으로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합니다. 이유 없이 당하는 고난인 줄 알았는데,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이 나를 원수로 여긴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든든히 지키고 계십니다. 갈 수 있는 모든 길이 막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소명의 길로 부르고 계십니다. 시편의 시인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시 121:1)고 고백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고난의 산이 아닌 하나님의 산을 바라보며 그 산을 오르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허우적거리는 두 가지 이유


신앙생활을 좀 오래했다는 성도라면 ‘하나님 앞에 내려 놓는다’ 혹은 ‘하나님께 맡긴다’는 표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주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요? 만일 우리가 내려놓고 맡기고자 하는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난의 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우리는 그 ‘내려놓음’을 방해하거나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내려놓고 맡기는 일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control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내 삶에 있는 많은 문제들을 내가 해결하고 조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것은 먼저 그것을 내려 놓았을 때 내가 원하는 방식과 길로 그것이 가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우리는 control 되지 않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나의 염려와 걱정이 나의 불안정한 미래를 바꾸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사용함으로 그것을 control 하고 있는 것 같은 위로를 얻으려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의지하는 것이 신앙적으로는 바르다는 것을 인식하지만 여전히 그 끈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거듭된 시련을 통해서 ‘완전히 놓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내려놓음과 맡김’을 잘 하지 못하는 이유는 ‘교만함’ 때문입니다. 교만함은 문제를 만날 때 두 가지 방향으로 드러납니다. 첫 번째는 내가 당하는 고통과 시련은 나의 문제이며,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고,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드러내거나 맡기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겠다고 끝까지 붙들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내가 만난 시련과 고난이 내가 사회적으로 이룬 성과와 성취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나의 삶에 내부적으로 이렇게 많은 문제로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혼자서 문제를 안고 씨름하는 과정에서 점점 깊은 문제의 산으로 들어가게 되고 문제는 더 커지게 됩니다. 내가 control 하지 못하는 두려움, 내가 할 수 있다는 교만.... 문제는 더 큰 산이 되고, 우리는 점점 작아집니다.


3. 하나님의 산에 오르다.


시편에는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들이 많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요, 제사를 드리면서 제사장들이 함께 부르던 노래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올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과 눈을 새롭게 하고 문제의 산이 아닌 하나님의 품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미가서에서는 이 말씀이 온 이방인들이 함께 부를 노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미가 4:2)


이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이 하나님의 산에 오르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으로 마음과 눈과 삶을 새롭게 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산에 오르는 것은 하나님이 준비한 우리의 모든 고난이 다 끝나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산에 오른다고 해서 모든 시련과 고난이 끝나고 장밋빛 미래가 시작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하나님의 산에 오르는 순간나의 인격과 삶에 대해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삶을 주관하는 것이 원수의 악한 의도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신 의지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비로소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맡길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꿈, 하나님의 시간으로 들어가다.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다릅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그가 당하는 이해할 수 없던
고난의 시간은 참으로 길고 어두웠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에게 문을 열어두고 계셨습니다. 요셉의 인생에서 그가 하나님의 시간과 뜻을 만날 수 있었던 통로는 ‘세번의 꿈’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 꿈을 꿉니다. 형님 곡식의 단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과 해와 달과 별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우리에게 디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멈추는 것도 아닙니다. 어린 요셉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 꿈으로 말미암아 더 큰 고통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허락하신 이 꿈을 신실하게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요셉이 경험한 두 번째 꿈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여전히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가 감옥 속에 있을 때, 끝나지 않는듯한 시련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기다릴 때였습니다. 반짝이는 꿈 하나가 그에게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그에게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하나님의 지혜로 해결했지만 그 결과에 대해 사람에게 의지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술 맡은 관원이 자신을 기억해주고 바로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아직도 완전히 자신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그가 경험한 마지막 꿈은 그의 모든 소망이 사라지고 난 다음 찾아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시간과 그의 믿음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바로가 꿈을 꾸고 바로가 그를 찾습니다. 그는 꿈을 해석하고 바로의 총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여는 문이 그에게는 꿈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언제나 그 앞에 열린 문으로 계셨습니다. 다만 그는 그 문을 바라보지 않았고, 긴 고난의 터널 끝이 결국 그 문으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만일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고난이 있다면 우리는 요셉과 같은 소명을 가진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산에 오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할 것입니다. 요셉이 그 산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소명을 이룬 것처럼 우리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을 요셉의 소명으로 부르십니다. 꿈을 허락하시고 그 꿈의 시간으로 들어오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두려움과 교만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시간에 순종하며 맡길 때 비로소 우리는 꿈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사는 영원한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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