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2012. 4. 25.
요셉 소명 - 9. 그럴만한 이유(욥 42:3-6)
그레이스는 조지아의 한 시골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알콜 중독자였던 아버지는 그녀가 한 살이 되기도 전에 가정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한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소아마비라는 진단을 받았고, 걸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아파트에서 살면서 푸드 스탬프에 의존하던 그녀의 어머니는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교회의 성도들이 그레이스를 돌봐주었습니다.
하루는 그레이스를 돌봐주던 성도가 계단을 내려가다가 계단에서 굴렀습니다. 그 성도는 엉덩이뼈를 크게 다쳤고, 함께 굴러떨어진 그레이스도 치료가 필요했습니다. 병원을 찾은 그레이스는 다리에 교정기를 착용하기 위해 여러 가지검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다리의 신경이 살아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로부터 걷는 연습을 시작했고, 불편함이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레이스가 네 살이 되자 아버지가 가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알콜 중독이었습니다. 그레이스를 폭행할 뿐 아니라 성적으로 추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레이스는 늘 불안과 공포, 수치심 속에서 유년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항상 그레이스를 지켜준 사람들은 성도들이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주었고, 그들의 마음 속에 그레이스가 쉴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들의 사랑 속에 성장하면서, 그레이스는 자신이 어른이 되면 가난하고 배 고픈 어린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낼 때에도 교회와 성도들은 늘 그레이스 곁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학창 시절에 오래된 커튼으로 만든 옷을 입고 다녔던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친구들이 놀리고 소외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괜찮았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사랑으로 그 마음이 다치지 않고 잘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랑하는 한 남성과 만나 결혼을 했고, 어릴 적 하나님께 서원한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주어진 상황의 희생자가 되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걸음을 내달을 수도 있다. 종종 우리는 자신에게 골몰하느라 모든 것을 챙겨 주시는 그분을 잊고 지낸다. 우리는 그분의 무릎에 앉아서 ‘아버지,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나는 주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하고 간구하기를 잊어버린다. 떡을 구하는 우리에게 돌을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나는 직접 경험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엄청난 사랑을 베푸시며, 안전한 곳으로 이끄신다. 그 분과 같으신 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오스 힐먼의 ‘하나님의 타이밍’ p.142~146에서)
1. “왜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습니까?”
우리가 그녀의 신앙의 고백과 간증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의 마음 속에 남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왜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습니까?”라는 오래된 질문입니다. 내면이 파괴된 한 남성에 의해 온 가정이 상처와 고통을 당하고,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에 대한 책임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 불합리함이 왜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까?
욥기는 이런 질문을 욥에게 닥친 고난과 욥의 친구들의 대화를 통해 제기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여러 가지 말로 대답하여 하지만 그 어떤 대답도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들은 오랜 논쟁과 토론 끝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욥기에서 제기되는 신학적인 문제, 즉 ‘선한 사람에게 왜 고통이 임합니까?’라는 문제를 철학적으로 다루는 것을 ‘신정론’(Theodicy)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도대체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울 수 있을까? 악인은 잘 사는데 의인은 왜 고통과 압제 속에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만물을 섭리하는 신이라면 세상이 이렇게 불평등하고 불합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한 시원한 답을 주시지 않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시거나 정의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결론으로 가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던 가정에서 성장한 한 사람을 택하십니다. 그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땅을 떠라나 명령하십니다. 그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믿고 삶을 던지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도 그에게 앞으로 될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시고 보증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시요 창조주시요 왕이시며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또한 바보스럽게도 설명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의 아들을 바치라고 할 때에도 그는 왜, 어떻게,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어떤 설명도 요청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믿습니다. 그저 순종합니다. 마음 속에 수많은 갈등과 질문과 고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의 삶은 ‘믿음과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하늘을 이르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신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약속은 설명이 아닙니다. 약속은 믿음의 대상이요, 설명은 이해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명하심으로 이해를 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주심으로 믿음을 요청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요, 하나님이 설명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 또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 악한 사람이 잘되고, 왜 선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해주신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여러 가지 말로 그 답을 구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그 답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패턴의 삶을 허락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긴 과정을 고통 가운데 지나가야 했고, 요셉은 꿈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고통의 시간을 지나야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전 미디안 광야에서의 어둠의 시간을 보냅니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은 빛으로 들어가기 위해 먼저 어둠의 터널을 통과합니다. 우리의 제한된 관점에서 보면 더움은 두려움의 대상이요 악하고 위협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어둠 속에서 성도가 하나님과 만나며 성장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들의 성숙하지 않은 성품과 인격을 다듬는 과정으로 고난을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베드로가 당한 수많은 시험과 부끄러움은 그를 다듬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과정이었습니다. 바울이 당한 교회로부터의 배척 또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쓰시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도록 허락하십니다. 바울은 이르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다”(빌 3:10)고 했습니다. 베드로 또한 고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3.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조급해집니다. 그들은 욥의 불행에 대한 해석을 어떤 방식으로든 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신학적인 전제는 이렇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결코 잘못이 없습니다. 정의와 사랑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신정론을 방어하기 위해 먼저 든든한 신학적인 방어막을 치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므로 잘못은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 있을 것입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습니다. 삶에 고통이 발생한 것을 보니 정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든지 어리석은 선택과 판단의 결과일 것입니다. 셋째, 따라서 고난 가운데 성도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길은 회개하고 자복하는 것입니다.
빌닷과 소발과 엘리바스라는 세 친구는 이 논리로 욥을 압박합니다. 그들은 모두 ‘그럴만한 이유’를 말하고 있고, 지극히 신학적이고 성경적이며 욥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진심을 말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욥을 위해서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그럴만한 이유’에 대해 욥도, 하나님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꾸짖으시기를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한다”(욥 38:2)고 했습니다. 그들이 토론했던 그 모든 ‘그럴만한 이유’들이 합당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4. 그래, 그럴 만 할 거야!
우리가 이 질문을 할 때 간과하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왜 고통을....?”이라는 질문 속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나와 가깝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악하거나 벌을 받아도 마땅한 사람’이라는 판단과 정죄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가리켜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욥 1:1)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의 결국은 죽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의로움이 그가 당해야 할 인류의 보편적인 죄의 결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고통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결과요 모든 인류가 함께 삶으로 책임지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의 보다 의롭고 경건한 삶이 그를 인류의 보편적인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욥은 이 관점을 자신에 대해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그런 고통을 당할만큼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입니다. 그 누구도 그런 고통을 당할만한 죄를 직접 지은 적은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죄와 그 결과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감당해야 할 짐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사모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며 그 누구도 죄의 고통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의롭지 않습니다. 시편의 기자가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다”(시 53:3)고 말한 것처럼 고통을 자신의 의로움으로 피할 수 있는 ‘착한 사람’은 이 땅에 없습니다.
그럴만 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를 우리의 잘못에서 찾으려 할 때 우리는 고통 당하는 사람을 공격하게 되고, 상처를 주게 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자리에서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하나님의 마음에서 찾는다면,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므로 설명과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반응한다면 우리는 고통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선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악한 세상 가운데 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이유가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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