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18. 벧엘회, 시나피회 헌신 예배 | 이응도 목사 | 2012-07-19 | |||
|
|||||
2012. 7. 18. 벧엘회, 시나피회 헌신 예배 l 본 문 : 룻기 1장 1-5절 말씀 l 제 목 : 그들의 선택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양한 선택을 하면서 삽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선택의 연속된 과정입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선택과 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을 무엇으로 삼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선택들은 늘 성공적입니까?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모든 선택들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늘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닙니다. 1. 원칙이 있습니까?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재미있는 책을 썼던 스펜스 존스는 그의 다음 책 ‘선택’에서 지혜로운 선택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다음의 세가지 질문을 마음에 두라고 권합니다 "나는 나를 속이고 있지 않은가?" 다른 말로 하면 첫 번째 질문은 내가 나의 욕심이나 잘못된 관념에 사로잡혀서 결정을 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 자신에게 속습니다. 특히 선한 일을 한다고 자신하는 사람들, 혹은 신앙으로 일한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들에게 이런 경향은 많습니다. 스스로 의롭고 옳은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모든 판단과 결정 또한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욕심이나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이 자신을 속인 결과가 자신에게 올무가 되면 그제서야 자신을 돌아봅니다. 하지만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내 불안정한 감정이 선택을 결정하지 않았는지를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함 혹은 두려움으로 선택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질투와 분노로 선택합니다. 자극적이고 나를 추켜세우는 말로 선택한 모든 것은 내게 큰 짐이 되고, 족쇄가 됩니다. 중요한 선택일수록 가장 안정된 상태에서 결정해야 합니다. 성도가 모든 결정을 우리의 평화이신 주님 안에서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 번째 질문은 우리의 자존감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도로서의 자존감, 교회로서의 영적 자신감이 우리의 선택을 결정해야 합니다. 나는 비록 지금 힘들고 어려울 수 있지만 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자녀라는 확신,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대상이라는 확신…. 이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선택의 원칙이어야 합니다. 내가 쉽게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보다 나은 원칙과 기준으로 우리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스펜스 존스는 결국 이 책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선택의 원칙’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원칙이 없는 다양한 선택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믿음과 삶의 목표가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이나 환경이 나를 결정하는 때가 많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나의 선택의 중심이 아니라 내가 그 때 만난 사람, 그들과의 관계, 나의 삶의 정황이 더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2. 그들의 선택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한 이민자 가정을 만나게 됩니다. 그 가정은 베들레헴에 사는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의 가정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생각하실 것은 이 사건은 지금부터 약 2300년 전후에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로 보면 삼국시대 이전입니다. 가뭄이나 기근을 만나면 그저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성경이 시대를 표현하면서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라고 말하는 것은 사사 시대의 시대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라고 하는 보편적인 원칙이 통하던 시대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엘리멜렉이라는 한 가장을 중심으로 한 이 가정의 선택은 “각시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그 시대 상황으로 보면 보편적인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옳다고 생각하고 어떤 선택을 한 것일까요? 성경은 1장 1절에서 이스라엘 땅에 큰 흉년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살던 한 가정이 기근을 피해서 이민을 결정합니다.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당시 암몬과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였던 롯의 후손으로 이미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며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침해하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은 바로 그곳으로 갑니다. 그들과 함께 삽니다. 자, 그들의 이민의 결정에 가장 중요한 원칙은 무엇일까요? 예,, 바로 그들의 상황입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생각에 옳은 대로 결정한 것입니다. 저는 성경이 한 가정의 이민 역사에 주목하는 것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날 이민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미국에 오게 된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교회 말씀을 전하러 갈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고들 말합니다. 미국에 온 이유와 결혼 관계에 대해서는 그 사람을 잘 알고 친근해질 때까지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 드린 대로 우리는 너무 다양한 자기만의 이유로 이민을 결정하고 이곳에서 삽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미국에서의 삶을 왜 어떻게 선택하셨습니까? 선택한 것은 잘한 일입니까? 그 선택은 성공적입니까? 3. 선택의 결과 엘리멜렉 가정의 모압으로의 이민은 초기에는 나름 성공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두 아들은 모압의 여인을 취해서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압 여인이 유대 여인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모압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 한국 이민 초기에 미국 사회에서 공부를 마치고 성공적으로 정착했던 분들이 미국여성과 결혼했던 것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먼저 아버지 엘리멜렉이 죽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모압으로 이주한지 10년만에 죽었습니다. 어머니 나오미와 두 자부 오르바와 룻만 남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유대여인이지만 두 자부는 모압 여인인 상황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오미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선택의 결과가 짐이 되거나 아픔이 된 적은 없습니까? 늘 성경적인 원칙을 가지고 지혜롭게 잘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사실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스스로를 속이면서 하기도 하고, 순간적인 감정으로 하기도 하고, 자신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과 확신이 없이 선택하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정처럼 상황 속에서 우리의 생각에 옳은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내 삶에 치명적인 아픔으로 남아 있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길 위에 나를 세워두기도 합니다. 나오미의 가정의 선택들은 늘 그 순간에는 필요하고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한 가지의 눈 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수많은 그 다음의 문제를 껴안게 되는 선택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4. 복음, 생명의 길을 기억하다. 그 때 나오미에게 한가지 소식이 들려옵니다. 유대땅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 주셨다는 소식입니다. 기근을 피해서 모압땅으로 와서 살아남기 위해 허급지급 살아왔는데, 남편과 아들들을 잃고 말았습니다. 모압 여인인 두 며느리를 의지하고 살기에는 너무 약합니다. 나오미는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될까요? 이미 떠나온 고향, 가족들은 죽고 없는데 그곳으로 간들 무슨 소망이 있을까요?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에 사고나 천재지변, 혹은 전쟁으로 가장이 죽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여성들과 남은 가족들을 돌볼 수 있는 법적인 장치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만일 가장이 죽으면 보호자가 필요한 사람은 그 가장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가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다음 가까운 사람이 남은 사람들을 책임지고 돌봐야 합니다. 이것이 ‘기업 무를 자’(Kinsman Redeemer)’라는 법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친족을 보호하는 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바로 이 법입니다. 이제 자신은 청춘도 잃고 가족도 잃고 재산도 잃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오미가 유일하게 가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녀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고난 가운데 피할 길을 내신다는 사실입니다. 나오미는 이제 그 법 하나에 의지해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나오미의 수많은 선택들, 그 모든 선택 가운데 가장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원칙에 맞고 가장 바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룻은 나오미의 이 선택에 자신의 남은 인생을 겁니다. 룻기 1장은 잘못된 선택과 그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1장 20절에 보면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마라’는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인생은 기쁨이었지만, 그녀가 선택한 인생은 고통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룻기 1장이 보여주는 그녀의 인생의 단면입니다. 그런데 룻기 2장은 그녀가 유일하게 하나님께 의지한 선택이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2장을 보실까요? 1절에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보아스라는 사람이고, 그는 유력한 사람이면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입니다. 비로소 나오미의 삶에 빛이 스며들기 시작하고 룻기가 밝아지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그는 나중에 기업을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하게 되고, 이방 여인인 룻과 결혼을 하게 되며, 다윗왕의 조상이 되며, 결국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 놀랍게도 나오미의 인생에 역전이 일어나고, 나오미의 하나님을 선택한 룻의 인생에도 놀라운 역전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5. 다시 나오미가 되다.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선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벨엘회와 시나피회는 40에서 50대, 우리 교회의 허리이면서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기관들입니다. 하지만 연령적으로 보면 이미 삶에서 또 다른 선택을 하기에는 힘든 나이가 되고 있습니다. 선택의 결과가 또다른 선택을 만들어내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의 선택의 결과에 대해 우리가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랑스러운 선택의 결과 속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그 결과에 대해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합니다. 마치 청춘도, 재산도, 가족도 다 잃고 이방 땅에 혼자 남은 나오미처럼 우리는 고통스럽게 우리 자신을 바라볼 대가 있습니다. 바로 이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나오미의 선택, 룻의 선택입니다. 그녀의 삶이 나오미에서 마라로, 기쁨에서 고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선택 하나, 그녀의 고통스러운 삶에 마지막 남아있었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믿음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드는 유일한 선택 하나로 말미암아 그녀는 다시 마라가 아닌 나오미의 삶을 회복합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여전히 하나님이라는 소망이 남아 있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다고 생각한 그녀에게 여전히 하나님이 ㄱ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만을 위해 선택을 반복해왔지만, 그녀를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은 그녀의 모든 잘못된 선택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녀가 복음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나이 50 – 더 이상 새로운 선택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여전히 우리가 해야 할, 계속해야 하고 반복해야 할 선택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생각과 뜻으로 살아가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내가 중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때 나의 모든 잘못된 선택과 판단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준비와 계획 속에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나오미의 기쁨의 삶이 회복되고 오히려 그녀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고 세상을 향한,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향한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