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1.14. 십자가 위에 서다. - 5. 목마름 | 이응도 목사 | 2012-11-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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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14.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십자가 위에 서다. - 5. 목마름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일곱 마디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계속 빠져드는 유혹이 있다면, 예수님의 고통과 연약함에 대해 해석하고 설명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때문이지....”하면서 내가 이해하고 알게 된 예수님의 고통에 대해 보다 경건하고 좋은 말로 이해시켜주고 싶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영광에는 어울리지만 수치에는 어울리지 않고, 신비라는 말은 적절하지만 고통 속에 내뱉는 말들을 통해서 만나는 예수님은 너무 인간적으로 다가옵니다. 만일 나와 예수님이 고통당하는 방식과 그것은 통과하는 방식이 다르지 않다면 왜 예수님이며 왜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굳이 말하지 않지만 마음에 남는 의문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Rowan Williams는 말하기를 우리가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은 ‘하나님을 설명하려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위 신학과 교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가진 생각과 상식에 맞지 않는 일들을 만나면 쉽게 당황하고 두려움에 빠집니다. “이게 뭐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 주변에 있는 일들을 일반화시키고 체계화해서 소위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들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비정상적인 일들이 발생할 때 그것을 사회적 관계나 법을 사용하여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유대 사회가 처음에는 크게 호응했지만 결국 십자가를 들이대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그들은 열광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이적과 선포하시는 메시지는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야의 증거였습니다. 하지만 곧 그들은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일반화시켜 놓았던 메시야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는 메시야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신학적으로 메시야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만들어 놓았고, 예수님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메시야가 아닌,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결국 불안함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은 분노로 바뀌고 그들은 메시야를 십자가에 매달고 맙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Williams의 말대로 우리는 계속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우리의 논리적인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합니다. 설명되지 않는 하나님, 논리적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 불안해합니다. William는 말하기를 “교리의 핵심은 우리를 침묵하게 만들고, 우리 내부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깊은 샘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교리와 신학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더 많이 설명하기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서기 위한 과정이 바로 신학의 과정인 것입니다. 1. 비유일까? “목 마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래서 우리들을 고민에 빠지게 합니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하나님.... 충분히 십자가를 피하실 수 있었지만 기도와 결단으로 스스로 십자가에 오르신 예수님이 육신의 갈증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요? 먼저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사람의 고통으로 이해합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사람으로 당하실 모든 고통을 당하셨고, 목마름도 그 한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목이 말랐기 때문에 ‘목이 마르다’고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리 잘못되지 않은 생각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는 과정에서 모든 고통을 일일이 다 말씀하지는 않았습니다. ‘목마름’이 예수님이 도저히 말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던 유일한 고통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채찍질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시고 십자가에 묶이고 못 박히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붉은 태양 아래 매달려 한 나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모든 십자가 고통의 과정에서 단 한마디도 자신의 고통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예수님께서 그저 사람으로서의 고통을 “목 마르다...”는 한 마디로 표현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 아닐까요?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우리를 위한 배려라고도 생각합니다. 완전한 사람이었지만 또한 완전한 신이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의 모든 고통을 너무 쉽게 지나가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리들의 연약한 마음을 아시고, 직접 고통을 당하시고 그 고통을 이렇게 표현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연약한 사람들과의 공감을 위해서 그런 표현을 허락하셨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설명은 다소 위험합니다. 예수님을 사람의 연약함을 통해 이해하려는 어리석음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때로 어머니가 자녀들을 설득하기 위해 위장된 고통을 표현하고, 연인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고통과 눈물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잘못된 신학은 하나님을 목적을 위해 거짓을 행하는 분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2. 왜 목마름일까? 여기에 중요한 질문이 하나 발생합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하신 수많은 고통 가운데 하필이면 ‘목마름’의 고통을 표현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정확한 이유을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경 속에서 가까운 답을 찾을 수는 있겠습니다. 이 말씀이 요한복음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예수님이 언젠가 ‘목마름’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성의 한 우물터에서 참으로 갈증나는 삶을 살고 있었던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대화를 하지도 않고 물을 달라는 말은 더더욱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과 상식을 넘어서는 대화를 하시고, 결국 비현실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그리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같은 복음을 전하십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7-38)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목마름’에 대한 중의적(衆意的)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중의적인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의 육신의 목마름이 인류의 영적인 목마름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의적인 표현의 절정은 바로 예루살렘에서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선언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른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목이 마르고 그 ‘생수의 강이 흐르는 사람들’ 대한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하십니다.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고통이 있고, 영적이고 사람들에 대한 갈증이 있는 것입니다. 그 갈증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고,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3. 잔을 들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의 갈증과 관련된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잔’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택한 십자가의 길은 ‘잔’으로 비유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고통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조차도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잔을 들었습니다. 그 잔은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른 잔입니다. 사랑할수록 더 고통스러운 사랑이며, 품을수록 더 아픈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잔을 마셨고, 그 결과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갈증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갈증을 성경이 기록한 것은 단순한 육신의 목마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이미 곳곳에서 목마름과 생수에 대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고, 마실수록 목이 마른 잔에 대한 말씀을 남기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 모든 기억에 근거하여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고통을 “목이 마르다‘라는 한 마디의 말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팔레스타인의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벌거벗은 육신으로 매달린 한 사내의 타들어가는 목마름이면서, 또한 믿기만 하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를 것인데 아직도 믿음으로 메시야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 인류에 대한 갈증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메시야는 믿음으로 변화된 성도와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을 마음껏 마시고 싶은 것입니다. 4. 목마름, 우리의 소원 시편 42편은 인생의 고달픈 고비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한 시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목 마른 사람이 시냇물을 찾듯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목말라 죽어가는 사슴 한 마리가 간절히 샘물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하나님 만나기를 소원한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소원이 생기면 우리는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을 호소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은 정반대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 없는 한 마리 어린 양이 십자가라는 죽음의 골짜기에서 그 마지막 숨 한자락과 함께 내뱉는 신음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내가 목이 마르다.”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만나기를 그렇게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마른 목을 축이는 것은 믿음으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교회와 성도들입니다.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주님을 향한 거룩하고 맑은 소원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우리는 다른 소원에 우리의 마음과 삶을 걸어두고 삽니다. 주님은 우리들에 대해 목말라하지만 우리는 주님에 대해 목말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목말라하며 무엇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지, 무엇에 우리의 삶과 마음의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는지 생각해야하겠습니다. 가장 깊은 갈증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다시 우리들의 목마름을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부르심과 우리의 소원이 만나는 현장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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