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15. 기쁨의 공동체 - 11. 예언의 은사 | 미디어선교팀 | 2013-06-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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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15. 로마서 12장/기쁨의 공동체를 소망하며 11 예언의 은사(롬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롬 12:6) 누가복음 4장 16-30절을 보면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전환점에 된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건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신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으로 와서 늘 하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으로 가셨습니다. 16절에서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다’는 표현을 보면 예수님은 아마도 이전에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가르치던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읽고 가르친 말씀은 이사야 61장의 말씀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엘리야의 시대와 엘리사의 시대에 있었던 일을 들어서 다시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설명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눅 4:25-27)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분이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낭떠러지로 끌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사이를 걸어서 지나가셨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다가 갑자기 분노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을 성경에 말하는 만인 구원의 메시지가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된 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확인되었고,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자 사명임을 예수님이 밝혀주신 것입니다. 예언은 허락된 은사입니다. 때로 예언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예언자로 산다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눅 4:2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언자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에 허락하신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6-13에서 예언의 은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은사들의 항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서술이 독특한 것은 은사의 목적을 기록하되 동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eite’(whether)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은사들을 열거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독특하고 간결하게 은사에 대해 표현하는 것은 다소 의도적입니다. 그는 은사는 허락된 은혜이면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라 사용되어야 하는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은사에 대한 가장 적절하고 바른 반응은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의지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하신 것을 내가 사용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약 성도와 교회가 받은 은사가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NIV에서는 “If a man's gift is prophesying, let him use it in proportion to his faith.”(Roman 12:6)라고 번역하고 있고, KJV에서는 “let us prophesy according to the proportion of faith”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은 각 성도와 교회의 믿음의 분량에 맞는 예언의 은사를 허락하셨으므로 그 분량에 따라 은사를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2. 예언의 은사에 대한 오해 예언의 은사는 은사에 대한 이해를 시작하는 출발점과도 같습니다. 가장 많이 오해받고 있는 은사이기도 합니다. 예언의 은사를 이해할 때 먼저 우리가 동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이 은사가 사람들의 염려나 두려움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언제 그 일이 일어날 것이고 어떤 방식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허락된 은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있는 두려움과 염려, 궁금증과 안전에 대한 욕구에 역사합니다.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하고 헛된 것들을 믿게 합니다. 특히 요즘 말세에 관련한 각종 예언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때와 시기를 알 수 없다고 명료하게 말씀하셨고(행 1:7), 그 일에 집착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고하셨습니다.(눅 21:8) 물론 다양한 징조와 표징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과거에 비해 지금 현저하게 많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시대가 과거에 비해 있었던 일을 알고 기록해내는 능력이 더 많아졌을 뿐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징조와 표징을 계속될 것이고, 그것들은 주님이 반드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줄 것이며, 우리의 믿음을 촉구하게 될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는 우리의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대해 역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기 때문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때 발생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예고(foretelling)’의 수준이 아니라 ‘밝혀주는 말(forthtelling)’의 수준입니다. 후자는 전자를 의미적으로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비한 영적 환상이나 체험을 통한 예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와 교회가 현재의 상황을 면밀히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통찰하여 얻는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를 줍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 시대를 보면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를 신비한 영적 체험의 영역에만 국한시키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지혜와 통찰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방을 향한 선교와 세계 교회 건설을 예언하셨고, 고향에서 외면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사는 시대를 사랑으로 관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은 이 시대를 향한 지혜를 주십니다. 물론 때로 우리의 이성과 지성을 넘어서는 계시의 말씀을 허락하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선지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말씀을 통해 지혜를 얻고 시대를 밝히는 예언의 등불을 켰습니다. 3. 예언자의 역할 예를 들어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평신도 신학자인 자크 엘룰은 이 시대의 탁월한 예언자적인 사명을 감당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는 "사고는 세계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라는 유명한 우리 시대 지식인의 강령을 남겼습니다. 그는 4개의 박사 학위를 가질 만큼 석학이었고, 기독교의 역사의식과 유럽 사회주의를 통찰하는 저서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특히 그는 현대 교회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였습니다. 그의 저서 가운데 ‘기술 체계’ ‘기독교와 맑스주의’ ‘이스람과 기독교’ ‘뒤틀린 기독교’ ‘하나님이냐? 돈이냐?’ 등은 교회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이미 40년 전 현대의 기술환경과 문화가 우리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지를 예견했습니다. 그가 ‘기술 사회’라는 책을 썼을 때 학계에서는 지나친 비약과 비관주의라고 비난했지만 이후 전개되는 상황은 그의 예견이 맞았음을 증명합니다. 당대의 현실에 대한 그의 통찰력은 깊이 있는 성경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면서 그가 습득한 학문의 결과였습니다. 요즘 한국 교회 개혁 실천 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백종국 교수 또한 그러합니다. 그가 약 20년 전 UCLA에서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때 큰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준비한 논문마다 교수들로부터 거절당했습니다. 기도하던 그에게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삼상 8:11-22절의 말씀 속에서 이 세상의 정치제도가 만드는 권력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이 정치권력의 핵심은 무엇이며 오늘날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지에 대한 논문을 썼고 학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학문적 지혜를 얻은 그는 요즘 한국 교회 개혁을 길을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여러 목회자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은사는 교회 공동체를 더 굳건히 세우기 위해 교회에 허락되었습니다. 예언의 역할 또한 그러합니다. 예언의 은사를 가진 예언자들은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러한 길로 나아가면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고 있고, 이 길로 가면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합니다.”라는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 세상이 끝나고, 누가 어떤 대학을 가고, 언제 결혼을 하고, 언제 죽는가를 알아맞히는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사로서의 예언의 기능이 아니라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고 바른 길 가도록 돕는 것이 예언의 은사의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언의 은사는 늘 말씀의 은혜와 함께 합니다. 말씀에 대한 깊은 지식과 통찰이 건강한 예언을 가능하게 합니다. 잘못된 예언을 분별하게 합니다. 성령은 상황에 따라 우리가 배운 바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요 14:26) 말할 것을 알게 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혼란한 상황의 어둠 속에서 헤맬 때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 당당히 역사 속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예언의 은사인 것입니다. 4. 믿음의 분량에 따라 예언의 은사를 이해할 때 마지막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바울이 강조하는 “믿음의 분량대로....”(NIV)라는 말입니다. KJV에서는 “믿음의 분량에 일치하는”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 믿음의 일부분을 사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허락하신 믿음을 따라 말씀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그 지혜는 성도 자신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어떻게 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합니다. 이때 믿음의 분량대로 자신의 삶에 대한 예언의 은사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말씀 가운데 예견되어지는 삶을 향해 믿음을 사용해서 용기있게 전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의 역량을 넘어서는 은사를 허락하시 않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분량에 일치하는 예언의 은사’를 강조한 바울의 의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고린도 교회에 난무했던 각종 은사 받았노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아마도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양한 말로 성도와 교회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때로는 두려움에 빠지게 하여, 염려하게 하고, 탐욕스럽게도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점검할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어떤 성도가 예언의 은사가 있다고 할 때도 그것이 그의 믿음의 분량에 일치하는지를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소유인 은사를 성도와 교회에 허락하셔서 서로를 유익하게 하고 돕게 하십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혜의 도구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의 분량을 넘어서는 은사를 주실 수 없습니다. 역량에 넘치는 은사가 그를 망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예언은 순간적인 행동이며 특별한 상황 속에서 즉각적으로 선포되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예언자적 메시지는 우리 자신을 준비시키는 성실함 속에서 나타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라고 했습니다. 말씀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실하게 헌신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예언의 은사를 선물로 주시고 시대의 어둠을 밝혀 갈 길을 제시하게 하십니다. 오늘날의 세상과 교회는 참된 예언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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