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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31. 기쁨의 공동체 - 15. 사랑, 가식이 없는 이응도 201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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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31. 로마서 12/기쁨의 공동체를 소망하며 15

 

사랑, 가식 없는’(12:9a)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12:9)

지난 724일 데니 콕스(Danny Cox)라는 사람이 “The tale of Pastor Jeremiah Steepek posing as homeless: True, but not really”라는 글과 사진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글의 제목대로 대형교회 목사인 제레미야 스티펙(Jeremiah Steepek)가 잠시 노숙자가 된 경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http://www.snopes.com/glurge/homelesspastor.asp)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레미야 스티펙(Jeremiah Steepek)은 어느 주일 오전에 자신이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는 한 교회 근처에서 노숙자로 변신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교인 중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온 사람은 불과 세 명에 불과했다. 스티펙 목사는 교회로 향하는 교인들에게 음식을 사려고 하니 잔돈 좀 달라고 했지만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예배 시간이 되어 교회에 들어간 스티펙 목사는 맨 앞자리에 앉았지만 예배 위원들의 저지를 받고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맨 뒷자리에 겨우 착석하게 된다.

 

이윽고 새로운 목사가 부임했다는 광고시간. 맨 뒷자리의 스티펙 목사는 노숙인 차림 그대로 강단에 올라갔고 교인들은 경악스러워했다. 그는 곧장 마태복음 2531절부터 40절까지를 읽어 내려갔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Truly I tell you, whatever you did for one of the least of these brothers and sisters of mine, you did for me).”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과 염소비유로 누가 양과 염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스티펙 목사가 말씀을 마치자 회중은 무언가에 심하게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교인들 중엔 흐느껴 울면서 회개하는 사람이 속출했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구는 교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스티펙 목사는 이날 오전 자신이 겪었던 것을 말하면서

“Today I see a gathering of people, not a church of Jesus Christ. The world has enough people, but not enough disciples. When will YOU decide to become disciples?”

(오늘 아침 교인들이 모이는 것을 봤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었다. 세상에는 교인들이 많다. 하지만 제자는 부족하다. 여러분들은 언제 예수의 제자가 될 것입니까?)”라는 말을 남겼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Being a Christian is more than something you claim. It's something you live by and share with others.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당신이 믿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이웃과 함께 그리고 옆에서 사는 것이다)”

 

사랑, 어떤 가식도 없는

 

바울은 교회가 가진 은사를 언급하면서 사랑이라는 명사와 가식 없는이라는 형용사만 사용했습니다. NIV(“Love must be sincere.”)와 한글 개정 개역(“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에서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사랑, 가식 없는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너무 단호하고 분명한 은사라는 것을 마치 준엄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랑에는 어떤 거짓이나 가직도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은사에 대한 바울의 강조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고전 12장에서 바울은 교회가 가진 다양한 은사에 대해 가르칩니다. 고린도 교회는 다양한 은사와 그것을 가진 다양한 성도들로 갈등하고 있었고, 바울은 그 모든 은사의 핵심에 대해서 가르치려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고전 13장의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가르침은 실은 고린도 교회의 은사에 대한 오해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은 그 모든 은사보다 중요하며 그 모든 은사의 동기와 목적이 되는 은사인 것입니다.

 

만일 이 은사에 거짓이 포함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닐 뿐 아니라 이 은사에 기초해서 세워진 모든 은사와 직분에도 심각한 문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가식 없고 거짓 없는 사랑에 기초하여 은사와 직분을 세우고, 교회 공동체의 목표와 비전을 설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에 그 어떤 거짓도, 가식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들의 서로와 이웃을 향한 사랑도 진실해야 합니다. 그 진실된 사랑 위에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함께 성장해 갈 것입니다.

 

2. 그러나, 위선적인 사랑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바울은 왜 사랑, 가식이 없는이라는 말로 초대교회가 갖춰야 할 은사로 설명하고 있을까요? 초대교회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배운 사랑과 그들이 익숙한 사랑사이에 혼란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 자체가 목적이 아닌,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되는 위선적인 사랑에 이미 익숙했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해야 하는 사랑, 그 사랑을 통해서 나의 의를 증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미 위선적입니다. 참된 사랑은 자신의 만족이나 성취를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의 대상만을 위한 헌신이 참된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위선적 사랑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헬라어 아가페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위선적인 사랑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사랑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아가페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사용되기 전에는 고전 헬라어에서 그리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본래 무미건조하고 사심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단어를 하나님의 고유한 사랑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이 단어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떤 보답의 요구도 없이 값없이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가페 사랑이란 우리에게 진정으로 최선인 사랑,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구원의 목적에 부합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이성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깨달은 성도와 교회의 영적인 의지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 사랑은 나의 만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필요를 향해 흘러들어 갑니다. 자아의 성취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 자선적 사랑과 다른 것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사람에게 이 사랑의 가능성은 없기 때문입니다.

 

3. 영적 지성과 거짓 없는 사랑

 

앞서 설명한대로 본성적 사랑은 자기 만족에 근거한 사랑입니다. 부모의 자녀 사랑도, 국민으로서의 나라에 대한 사랑도, 우리가 속한 교회에 대한 사랑도 결국은 자아를 사랑하고 실현하려는 노력의 일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영적 지성과 결합한 사랑일 때 자신의 만족과 성취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이루기 위한 사랑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엡 3:14-19에서 영적 지성이 함께 하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4-19)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가식과 거짓이 없는 참된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바울은 위의 본문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지식에 넘치는 사랑으로 설명합니다. 영적 지성에 근거한 사랑, 본성적인 사랑이 아닌 깨닫고 결단하고 수고하고 헌신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지만 믿음으로 결단하고 나를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변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사랑입니다.

 

4.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에 있습니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 교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의로운 행위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합니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의로운 삶을 살겠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모든 시도를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에서 강조하는 참된 믿음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지성에 근거해서 사랑한다는 것은 개혁주의의 입장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영적 지성은 우리의 깨달음과 신앙에 근거해서 우리 자신이 결단해야 하는 사랑이 아닐까요? 요한일서 4:7-8은 이에 대한 대답을 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1 4:7-8)

 

요한은 본문에서 우리들의 영적 지성에 근거한 사랑이 오직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밝힙니다. 우리가 가진 사랑에 대한 이해와 능력으로는 참된 사랑에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경건한 지성을 발휘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내리지 않으면 그 사랑을 곧 메마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랑하려고 할 때 우리의 사랑은 너무 쉽게 위선적으로 변하고 맙니다. 의무와 자기의로 가득한 사랑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되 참사랑이 아닌, 섬기고 헌신하되 나를 위한 사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 3:18에서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선언합니다. 성도와 교회는 오직 주님을 겸손하게 반영할 때 그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참된 사랑, 위선과 가식이 없는 사랑의 가능성은 우리가 나의 의지와 성취에 대한 욕구를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을 반영하려는 결단과 기도 가운데 가능합니다. 참된 사랑을 향한 영적인 지성은 우리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결단과 오직 주님만을 반영하겠다는 거룩한 의지로 가능합니다. 가식과 거짓이 없는 참된 사랑으로 우리를 초청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사랑과 은혜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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