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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4. 기쁨의 공동체 - 17. 새가족으로 하는 사랑 이응도 목사 201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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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14. 로마서 12/기쁨의 공동체를 소망하며 17

 

‘새가족으로 하는 사랑’(12:10a)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12:10a)

‘Crash’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대도시 LA에서 서로 인종이 다른 15명의 사람들이 8번의 충돌을 통해서 36시간 동안 보여주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2004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2006년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의 내용은 충격적이면서도 흥미롭습니다. 일단 모든 등장 인물들은 서로 충돌하고 갈등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일정한 연관성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한 사건은 다른 사건으로, 한 관계는 다른 관계로 연결되고 계속 충돌을 반복하게 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흑인 형사였던 그레이엄이 동생의 시체를 마주하면서 들려주는 독백에 이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모두가 매끄러운 금속의 표면과 같은 관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기도 좋고 만지기도 좋은데 딱딱하고 차갑습니다. 따뜻하게 품어주고 이해하는 관계가 아니라 반사하고 튕겨내는 관계입니다. 서로가 충돌하면 상처가 남고 자국이 남습니다. 부숴지고 깨질지언정 서로를 품고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서로 충돌하는 법은 알지만 서로 품는 법은 모르는 현대인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이 만드는 관계는 어떻습니까? 매끄러운 세단의 표면처럼 차갑고 딱딱한 금속을 빛나는 색깔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군가 부딪히기만 하면 서로에게 상처가 남고, 이해와 포용이 아닌 충돌과 파괴라는 원칙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1. “사랑합니다.”의 함정

 

자크 엘룰은 현대 문화가 가진 친밀성의 부족현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팁을 제공합니다. 그는 기술과 친밀성을 양극 관계로 설정했습니다. 기술이 삶에서 더 중요하게 여김을 받고 역할을 할수록 기술적 도구들이 더욱더 우리의 개인 활동을 장악하게 됩니다. 라디오가 보급되었을 때는 라디오가, T.V.가 문화의 핵심일 때는 영상 매체가, 오늘날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각종 활동들이 우리 삶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달과 개발이 현대인들로 하여금 더 기계-의존적이게 하고 관계-수동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기술의 발달은 또 하나의 속임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술을 통한 또 다른 친밀성의 창조라는 개념을 주장합니다. 기술적 도구를 매개로 한 관계의 성장과 성숙을 주장하게 되면서 관계를 친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에 더욱 의존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게 됩니다. 오늘날 전통적 놀이 문화의 감소와 기술 의존적인 놀이 문화의 발전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의소를 소통하던 시대에서 멀리 있는 지인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고, 손으로 편지를 쓰던 시대에서 전자 우편을 사용하게 되고, 각 사람에게 타이핑을 해서 전자 우편을 보내던 시대에서 전체 메일을 보내고, 자신의 생각과 글을 다수에게 공개하는 블로그나 Social Network Service가 발전하는 것은 모구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관계의 성숙과 친밀감을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영화 Crash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자동차의 표면처럼 매끄럽고 빛나며 차갑고 딱딱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인간의 관계가 기술 의존성이 높아질수록 사랑에 대한 표현과 방법이 다양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은 너무 쉽고 값쌉니다. “고객님, 사랑합니다.” “형제님, 사랑합니다.” 심지어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라는 표현들은 우리들에게 너무 익숙한 표현이 아닐까요?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에 늘 갈급하기 때문에, 서로 나누는 사랑이 얼마나 얄팍하며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알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더욱 이 표현에 갈증을 느끼며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의 욕구를 채우려 하는 것입니다.

 

2. 새가족의 사랑

 

류시화라는 시인은 그대가 내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시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시는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아무리 함께 있어 서로를 사랑한다고 해도 서로의 참된 마음을 얻지 못하는 현대인의 사랑을 표현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인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정서 중 하나는 소외입니다.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감정, 즉 소외감은 현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외로움을 호소하면서 교회 공동체로부터 멀어지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분명 교회에 속해 있지만 교회적인 관계 속에서 안정감과 평안함을 누리지 못하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사자에게도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들 모두가 인정해야 할 현대 교회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로마서 12:10에서 사도 바울의 표현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우정 어린 사랑 가운데-서로를 향한 온화한 애정을 기울이며입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가 몇 개 있습니다. 우리가 잘아는대로 에로스(eros, 성적 사랑), 스톨게(storge, 혈연적 사랑), 필리아(philia, 형제적 우정으로서의 사랑) 그리고 아가페(agape,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입니다. 12:10에서는 먼저 ’philia’의 사랑으로 말씀을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사랑의 개념은 서로 공동의 관심을 가진 친구들 사이의 사랑으로 교회의 사랑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그 사랑을 부연해서 설명할 때에는 ‘philia’‘storge’를 결합형을 사용합니다. 신약에서 단 한번 사용된 이 단어는 신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왜 바울은 같은 구절에서 두 번 사랑을 언급하면서 형제적 우정으로서의 사랑에서 그것과 혈연적 사랑이 결합된 개념을 함께 소개하고 있을까요?

 

Leon Morris는 그의 책 The Epistle to Romans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제외한 다른 그룹들에서는 형제적 사랑이라는 이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을 특별한 의미에서 가족으로 보았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였으며 그들은 모두 형제 자매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오직 혈연적 가정 안에서만 가능한 사랑으로 서로에게 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p.444)

 

답을 아시겠습니까? 고대 유대교 전통에도 다양한 의미의 형제애는 나타나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속하였던 에세나파나 심지어 혁명주의자였던 젤롯당까지도 형제적 동지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개발하지 못한 사랑의 개념이 있었는데, 그것은 동지애와 가족간의 혈연의 사랑을 결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던 초대교회 공동체만이 이 개념을 사랑을 성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3. 실패하는 사랑

 

결국 오늘의 본문을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가정이 되어 서로 우애하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형제간의 친밀한 사랑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 어떤 은혜도 이것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함께 형제가 되어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일에 아무런 공로없이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큰 은혜이자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명령을 실천하는 일에 성공하고 있을까요? 이렇게 큰 은혜가 댓가없이 우리들에게 주어졌는데 우리는 이 명령을 잘 실천하고 있을까요? ‘서로에게 온화한 애정을 기울이라는 말씀은 서로에 대해 부드럽고 진심어린 사랑으로 만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서로은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해 부드러운 마음으로 품고 있습니까? 서로의 잘못에 대해 이해하고 포용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참된 사랑을 품고 왜곡된 사랑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합니다. 어떤 사랑을 보다 큰 사랑을 위해 작은 사랑을 포기하도록 합니다. 교회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합니다. 좋은 예배를 위해 예배에 소외된 사람을 만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작은 성도들의 눈물을 당연시합니다. 사랑 아닌 것이 사랑으로 가면을 쓰고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을 계속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4. 성육신으로 하는 사랑

 

외로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예수님의 사랑이 사람을 통해서 표현되는 사랑에 더 민감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육신된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 또한 우리들을 통해서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를 향한 우정어린 사랑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상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 되시느니라”(1:8)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노력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 사랑과 이러한 삶을 함께 나눌 때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를 통해서 교회 공동체가 은사로 받은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만이 누를 수 있는 사랑, 서로 형제되고 가족되어 섬기고 나누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험한 세상 가운데 사랑으로 풍족한 삶을 살게 합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어 우리 안에 있는 참된 사랑, 그 사랑으로 더욱 섬기는 초대교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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