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28. 기쁨의 공동체 - 18. 먼저 존귀하여 여기라 | 이응도 목사 | 2013-09-02 | |||
|
|||||
2013. 7. 28. 로마서 12장 / 기쁨의 공동체를 소망하며 18 ‘먼저 존귀하게 여기라’(롬 12:10b)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10b) 국제 관계법에서 ‘상호주의’(相互主義)라고 불리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상호호혜주의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상대국이 우호적이면 역시 우호적으로 대응하고, 비우호적이면 역시 비우호적으로 대응한다는 심플한 원칙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실행하는 데는 다소 복잡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상호주의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렸던 남북차관급회담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측은 ‘남북합의서의 이행’과 ‘이산가족 문제 해결’이라는 요구 사항과 북한에 대한 ‘비료지원’을 등가로 놓고 ‘엄격한 상호주의’의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부시 미 행 정부가 가지고 있던 대북전략으로, 하나를 줄 경우 다른 하나를 반드시 얻어내는 ‘대칭적(symmetric) 상호주의’와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미국과 우리 정부의 상호주의 원칙은 북한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의외로 단순합니다. 100개를 가진 A라는 사람과 10개를 가진 B라는 사람이 이웃에 함께 삽니다. 다소 다툼이 있어서 A와 B가 협상을 하기로 했습니다. A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하나씩 양보하고 나누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B는 입장이 좀 곤란합니다. A에 대해서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협상 카드를 하나씩 등가로 교환하거나 함께 버리고 나면 어느 순간 나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카드가 없게 되고 너무도 당연한 패배로 연결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B는 다른 정책을 폅니다. 등가적 상호주의는 서로가 가진 부와 힘의 불균형 때문에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B는 포괄적 상호주의 즉, 비등가적인 방식의 상호주의를 주창합니다. 서로 가진 힘과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상황과 형편에 맞게 상호 호혜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99년에 들어 와서는 우리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의 명의로 ‘상호주의를 비동시적, 비대칭적, 비등가적으로 탄력성 있게 적용해 나갈 것’이라고 발표합니다. 그리고 쌀과 비료 등의 인도적 차원에서의 대북 지원 분야에서 이 원칙은 실천에 옮겨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것조차도 남북간의 합의에 대한 이해의 차이와 이후 남한 정부의 상호주의에 대한 이해의 변화에 따라 성실하게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남북간의 상호주의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포괄적 상호주의가 북한 정권의 생존을 돕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논리와 남북간의 경제력의 규모가 아미 다른 이상 등가적인 상호주의는 이미 실현되기 어렵다는 논리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서로 먼저’의 긴박한 요청 사실 알고 보면 이 상호주의의 원칙은 우리의 삶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모든 관계에서 이것은 마치 상식처럼 통용됩니다. 문제는 등가적인 상호주의와 포괄적인 상호주의가 각자 자신의 입장과 상황에 맞게 주장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내가 먼저’와 ‘네가 먼저’의 딜레마에 빠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에 대해 ‘내가 먼저’를, 어떤 것에 대해 ‘네가 먼저’를 적용하고 계십니까? 다음의 몇 가지 단어들이 어디 범주에 해당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 / 인내 / 자비 / 충성 / 양보 / 희생 / 헌신 / 사과 / 화해 / 존경 / 인정 / 명예 / 이익 이것들 외에도 우리는 ‘내가 먼저’와 ‘네가 먼저’ 사이에 갈등하며 다투는 가치들은 참 많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우리들의 본성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롬 12:10하반절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권면하십니다. 서로 존경하되 ‘먼저’하라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상호주의가 일반적인 원칙일 수 있겠으니 믿음 안에서 상호주의는 이미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과 교회와의 관계가 상호적이지 않기 때문이요,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가 상호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철저하게 비상호적인 사랑과 은혜를 누려온 성도와 교회에 대해 하나님께서 권면하십니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먼저’라는 말이 가진 긴박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지 못합니다. ‘먼저 상대방을 존경하는 일’은 긴박합니다. 다른 감정이나 판단이 앞서지 않도록 가장 먼저 ‘존경과 사랑’으로 서로를 대하기로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먼저’가 아닌 ‘내가 먼저’의 카드를 서로에게 긴박하게 적용시키라는 것입니다. 이 긴박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믿음 안에서 만난 형제 사이에 ‘서로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와 판단의 가능성’이 발생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모든 관계에서 기본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지혜는 ‘서로 가장 먼저’ 사랑과 존경을 품을 때입니다. 2. ‘그러므로’의 삶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서로가 먼저’의 원칙을 계속 삶의 모든 관계에서 적용해 갈 수 있을까요? 로마서가 강조하고 있는 접속사 하나를 바르게 이해하면 우리가 어떻게 이 원칙을 적용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로마서 12장 1절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가지는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와 사랑을 알고 믿게 되었으므로...”를 줄인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가 이렇게 큽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알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로마서 12장은 성도가 받은 각종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삶인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 중 하나가 10절 하반절에서 서로 먼저 존경하고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를 들어 반대하거나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너무도 당연하게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는 ‘서로 먼저’ 복음의 요청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상식에 반대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과연 우리가 계속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의 삶이 우리들 내면의 깊은 동의가 없이 가능할까요? 예수를 믿고 교회에 등록된 여러분은 ‘그러므로 서로가 먼저’의 삶을 무리없이 실천하고 계십니까? 예수 믿는 우리들이 끊임없이 고민하며 싸우는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우리의 본성의 변화입니다. 무엇에 기쁨을 느끼고 무엇에 보람을 느끼며 무엇에 감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의 세 가지 잃어버린 것을 찾는 비유에서 유대 사회에 독특한 질문을 던집니다. 유대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흔 아홉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한 마리를 찾아 광야를 헤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할 때 ‘여성’을 개입시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비유에서는 드라크마 목걸이를 잃어버린 여인이 등장합니다. 근엄한 유대 전통에서 아버지를 배신한 아들은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아버지가 ‘뛰어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잃은 것을 찾은 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유대인들의 상식과 전통을 뛰어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3.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들 이 비유들 속에서 예수님은 살짝 하나님 아버지의 미소를 보여주십니다. 세 주인공들 안에는 ‘회복에 대한 넘치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의 답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양보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일, 선한 양심과 의무로 한번, 두 번...세번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이것을 기쁨으로 삼는 사람은 그 기쁨이 내면의 동기가 됩니다. 계속 섬기고 사랑하고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무가 동기가 되고 자기 의가 동기가 되는 사람은 쉽게 지칩니다. 하지만 그 일에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 기쁨이 내면의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일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 또한 서로를 먼저 섬기는 일을 기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러므로’의 범주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존감의 문제로 싸우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귀하기 여김을 받는지, 얼마나 사랑받는지는 너무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들의 흔들림 없는 자존감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과 은혜와 역사하심을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존중받고 있는지, 나아가서 나의 가치와 존재가 확인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 모두에게 은사를 허락하신 것은 우리들 모두가 가진 가치가 각자에게 있는 은사를 통해 확인되고 개발되며 발전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은혜를 주시며 역사하실 때 기뻐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교회를 통해서 서로를 세우며 존경할 때 우리에게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반짝이는 웃음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4. 예수님을 바라보며 섬기고 헌신하는 데서 참된 기쁨을 발견하는 일, 이러한 삶의 방식은 현대 문화의 패턴과는 너무 다릅니다. 오늘날 사회는 지나친 남성주의(machoism)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많이 가져야 하고 높이 올라가야 하고 지배하고 누려야 합니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의 성장과 성취를 확인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상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빌 2:5-11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것을 권면하십니다. 본성의 변화는 삶의 목적의 변화를 만듭니다. 목적의 변화는 동기를 변화시킵니다. 먼저 섬기고 먼저 헌신하는 삶을 기쁨으로 살게 됩니다. 이 때 우리는 중요한 원칙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삶의 가치는 ‘서로 먼저 존경’하는데서 옵니다. 내가 그를 존경할 때 그가 나를 통해 가치를 확인받는 것입니다. 나 또한 그의 존경과 사랑에 가치가 확인됩니다. 교회와 성도는 서로가 존중하고 존경할 때 서로를 통해서 가치가 성장하고 발전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먼저 존경하는 것’은 참으로 지혜롭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 비밀을 알면 더 큰 기쁨과 감사로 서로를 먼저 존경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존경과 사랑을 서로 먼저 나눌수록 하나님 안에서의 가치와 의미가 더 상승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권면을 실천하는 일에는 우리의 헌신과 희생이 요구됩니다. 다른 사람을 먼저 존중하는 기쁨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부지런히 섬길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굶주리고 있고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가 먼저 사랑하고 먼저 섬긴다는 것은 이런 세상에서 어떤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함께 예배하는 형제 자매들 뿐 아니라 공동체 주변에 있는 모든 이웃들, 그리고 나아가 같은 시대를 사는 고통 받는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한 ‘먼저 하는 사랑과 존경’이 가지는 참된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존귀하게 하신 우리 주님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먼저 주님에 대한 어떤 영광도 드리기 전에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존귀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서로에 대해 사랑과 존경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서로의 마음과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더욱 사랑받는 자녀로 예배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