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8. 로마서 12장 / 기쁨의 공동체를 소망하며 21
“절박하게 기도하라”(롬 12:12c)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c)
‘기쁨의 공동체’라는 주제로 로마서 12장을 세분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중요하고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각 구절은 다른 구절과 긴밀한 관계 속에 있습니다. 롬 12:12c의 간결한 말씀 또한 전후 문맥 속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비로소 이 구절이 가진 은혜와 능력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12절 a,b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매우 심각하지만 희망이 보이는 고난과 늘 우리 곁에 있어서 견디고 있지만 해결되지 않는 어려움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다양한 고통 속에 살아가면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매순간 다가오는 고난의 현실에서 언제까지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저 희망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그저 인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12절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에게 허락된 또 하나의 은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고난의 현실 가운데 기쁨의 소망을 발견하고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얻는 물줄기가 됩니다. 기도는 교회가 믿음의 공동체로서 기쁨과 감사를 발견하고 나누기 위한 필수적인 방편이 됩니다. 기도는 섬김과 헌신, 사랑과 은혜, 은사와 나눔의 기초입니다.
1. 바울의 기도
성경이 보여주는 사도 바울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은, 기도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그러한 것처럼 기도 또한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 동력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관계 속에 있지 않으면 우리의 그 어떤 간절함도 진실함도, 어떤 행위나 언어도 기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관계 속에서만이 우리의 마음과 삶과 말이 기도가 됩니다.
로마서 8장은 12:12c에서 말하고 있는 바울의 기도에 대한 두 가지 배경을 설명합니다. 먼저 롬 8:15-16을 봅시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게 된 것,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기도할 수 있는 관계에 들어가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속에 있게 된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아들로서 우리의 필요와 관심사를 아뢸 수 있고, 우리의 아픔과 눈물을 호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세상에는 없는 독특한 방식의 하나님과의 동행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 있게 되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롬 8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기도의 또 하나의 배경은 여기에 있습니다. 롬 8:26-27을 봅시다. 때로 우리가 기도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해져도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죄와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하나님과 멀어졌다 여길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허락하신 관계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도 죄와 악도 우리와 함께 기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항상 기도에 힘쓰라”는 권면은 성도와 교회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욱 집중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소원을 개발하고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라는 말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닫고 순종하기를 결단하고 더욱 아버지의 품에 깊이 들어가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2. 성도의 기도, 무엇을 할 것인가?
하지만 이것은 다소 당혹스럽습니다. 만일 기도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그래서 때로 우리가 기도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대신할 정도라면 성도로서 내가 기도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바울은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권면을 했을까요?
엡 2:8-9에서 바울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응답조차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쉽게 오해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관계 속에 있는 성도에게만 허락된 은혜입니다. 같은 행위를 한다고 해서, 같은 간절한 마음을 품었다고 해서,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기도는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가 아버지께 드리는 마음과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베뢰아 지역에 전도하면서 그들에게 ‘종교성’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신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켜 왔고, 신과의 교감을 사모해왔습니다. 과연 그들이 드렸던 모든 말들과 행위들은 기도일 수 있을까요? 그들 입장에서는 기도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 그 모든 것들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간절하고 절박한 소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과의 일정한 관계 속에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들의 모든 소원은 기도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도는 오직 성도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드려야 하는 기도가 이해되십니까? 교회와 성도는 열심히, 항상, 꾸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고난의 때에 더욱 기도해야 하고, 성공하고 있을 때 더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은 더욱 열심히 사랑해야 하고, 부모를 섬기는 자녀가 더욱 부모를 기쁘게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12:12에서 사도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 분사를 보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좀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항상’ 이라는 말은 “어려움이 따를 수 있지만 어떤 일을 집중적 노력을 쏟아 지속적으로 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행 2:42에서와(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 행 2:46(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꾸준히 모였다)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에 대한 성도의 책임을 발견합니다. 더 많이 기도에 헌신하라는 초대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욱 집중하라는 권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기도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일으키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역에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방관자로 살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12절을 다시 봅시다. 다양한 어려움과 고난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당당하게 그 어떤 고난도 이겨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기도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이 없이 하나님만 일하신다면, 즉 하나님은 일하시고 우리는 구경하고 있다면 우리는 늘 기쁨도, 감사도 없이 그저 고난에 지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마음과 생각을 나누어주십니다.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과 교제하는 길이 되고, 환난은 그 은혜를 깨닫는 통로가 됩니다. 기쁨 중에 인내하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3. “절박하게 기도하라”.
마틴 루터는 오늘의 본문 “기도에 항상 힘쓰며...”를 “절박하게 기도하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주해했습니다.
“’절박하게’(instant)sms 우리 모두가 듣고 두려워해야 할 명령이자 경계로의 부르심이다. 기도는 부단한 노력이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다른 어떤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인데, 왜냐하면 기도에는 눌리고 상한 마음과 드높고 기상 있는 정신이 동시에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빈번히 그리고 근면하게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절박하게 하다’는 말은 단순히 ‘무엇인가 부단히 관여하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열심을 내다’ ‘서둘러 하다’ ‘열정적으로 요구하다’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보다 더 빈번히 해야 할 다른 일은 없으며, 기도보다 더 큰 노력과 수고가 필요한 일도 없다. 기도보다 더 큰 효과를 낳고 열매를 맺는 일도 없다.... 내 판단으로는, 기도야말로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영혼의 부단하고 격렬한 활동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어떤 위기나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면서 비로소 기도에 나서는 일들이 많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기도의 근본적인 동기는 내 삶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내가 기도할 수 있는 이유도, 나의 모든 소원이 기도가 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돌보심과 위로하심도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은혜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사모하는 기도를 늘 드릴 수 있어야 하고, 우리의 삶에서 보다 조직적이고 준비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삶 속에서 조직적인 기도를 드리지 않는 성도들이 가장 쉽게 자신을 변명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늘 하나님과 함께 있고, 내가 하는 모든 생각과 말들이 기도라고 생각해요.” 물론 딱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기도에 대한 의지적인 결단과 삶을 요구하십니다.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며 함께 모여서 기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아버지와 늘 함께 하셨던 예수님 또한 자주 외딴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열 두 제자를 선택하시기 전에 밤을 세워 기도하셨습니다.(눅 6:12-16)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죽을만큼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막 14:32-42) 예수님은 ‘기도의 절박함’을 가장 잘 보여주셨습니다.
조직적인 기도 생활, 즉 시간을 따로 정하고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는 것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함께 이웃과 시대를 위해 기도하면서 서로의 삶과 세상에 대해 더욱 깊은 헌신을 결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4. 기도는 변화다.
다시 한번 생각할 것은, 하나님은 성도와 교회의 모든 필요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뛰어넘어서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각 사람과 공동체에 최선을 것을 주시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필요와 관심사에 대해 기도하되 그것에 대한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기도는 변화다’라는 선언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와 관심사에 대해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바꾸어내는 과정이 기도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란 실은 하나님께 약속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만난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더니 이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사오니 주님 원하시는 대로 나를 사용하여 주소서”
기도는 변화입니다. 내 뜻으로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 나의 삶과 생각과 정서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나를 조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헌신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선교사를 위한 기도를 드린다면 우리의 삶에서 선교에 헌신해야 합니다. 지역 사회에 복음이 전해지기를 기도한다면 지역 사회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한다면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 아닌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역사하시는 일임을 믿는다면 그것이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이 옳습니다. 기도는 변화에 대한 강한 결단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창조주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주신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특권이자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늘 감사하며 이 사랑에 응답하는 삶을 사는 초대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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