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성경 공부

  • 홈 >
  • 예배와 말씀 >
  • 수요 성경 공부
수요 성경 공부
9-25-2013 기쁨의 공동체-섬기고 나누라. na kim 2013-09-28
  • 추천 0
  • 댓글 0
  • 조회 808

http://chodaepa.onmam.com/bbs/bbsView/80/544809



2013. 9. 25. 로마서 12장 기쁨의 공동체 22

섬기고 나누라”(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2:13)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 교회가 고민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어떻게 모일 것인가?”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어떻게 일할 것인가?”입니다. 하나는 존재에 관한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역할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도 이 두 가지를 포함합니다. 로마서 1~11장에서 우리가 무엇을 믿고 고백하는지, 왜 함께 모여 예배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 존재에 대한 고민이라면, 12장부터 우리가 서로에게 어떻게 지체가 되어 서로를 섬기며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역할에 대한 고민입니다.

로마서 12:13은 교회 공동체의 역할에 대해 고민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로 서로 지체가 되었습니다. 서로를 섬기고 채워야 합니다. 또한 함께 힘을 모아 한 몸을 이루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증거해야 합니다.

두 종류의 돌봄

본문이 정리하고 있는 대로 교회는 이 두 종류의 돌봄 사역에 대해 소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두 사역은 함께 중요하며 서로 상호작용을 통해서 서로를 강화시켜 줍니다. 어떤 성도에게는 그 중 한 사역이 더 적성에 맞을 수 있고, 어떤 성도는 그 중 한 사역에 약점을 가질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는 전체적으로 균형을 맞추어서 이 두 사역에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에 대해 보다 풍성하게 돌보고 주변 세상을 향해 보다 효율적으로 봉사함으로서 우리는 공동체를 통해 더욱 깊은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 두 종류의 돌봄은 성도들의 필요에 대해 공동으로 책임지는 일낯선 이웃들을 환대하는 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2. 성도들의 필요를 공동으로 책임지다.

1) 물질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우리가 성경적 교제에 대해 사용하는 단어인 코이노니아는 기본적으로 스스로 자신이 공동체의 한 부분임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본문 전반부에서 사용하는 공급하다라는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은 나 자신이 타자(他者)가 되어 도움의 대상으로 성도들에게 물질을 나누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오른 손이 왼손을 돕는 것처럼, 눈과 귀가 코와 입을 돕는 것처럼 돕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가 가진 은사와 능력은 실은 한 개인에게 귀속된 것이 아닙니다. 손이 가진 능력은 손에만 귀속된 것이 아니라 몸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의 능력이며 그것을 몸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공동체임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서로의 필요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지고 가야 할 공동의 책임은 물질의 영역까지 포함합니다. 예배만 함께 드리고 내가 해야 할 의무로서의 물질에 대한 헌신을 했다고 해서 책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한 부분이며 다른 공동체의 물질에 대한 필요에 깊은 관심과 나눔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관계에 대하여

우리가 고민해야 해야 할 서로에 대한 채움의 또 하나의 영역은 관계에 대한 필요입니다. 교회는 세상이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공동체입니다. 세상에서 쉽게 경험하게 되는 소외와 오해들로부터 자유함을 얻어야 합니다. 마치 주님이 우리에 대해 그러하셨던 것처럼 서로에 대한 무한한 용납과 이해, 용서와 사랑이 교회적 관계의 기본입니다. 서로의 필요를 돌아보고 섬기는 것,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요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3) 서로의 정서적 필요에 대하여

The Truly Community의 저자이며 30여 가지의 장애를 몸에 안고 여러 지역을 다니며 강연을 해야 했던 미르바 던은 자신에게 진심으로 힘이 되었던 한 가정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당신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세요.”라고... 나는 당신의 그 말에 고향에 온 것 같은 푸근함을 느꼈습니다. 내 마음을 당신에게 보여줄 수 있었고, 슬픔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내가 느꼈던 두려움을 드러냈고, 내 혼란스러운 마음도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안아주고 들어주고 함께 기도해주고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때로 나는 당신을 통해 나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바라볼 수 있었고, 당신은 나를 책망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보살펴주었습니다. 내 고통에 함께 눈물 흘려준 당신,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전할까요? 당신의 사랑을 받으며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당신으로 인한 내 마음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나는 당신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이 허락하신 성육신된 사랑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각 지체로서의 성도는 서로 다른 감성과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종류의 정서적 필요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만일 서로가 자신의 필요에 민감하여 자신을 섬길 것을 요구하면 교회 공동체는 사회보다 극심한 갈등과 분쟁 속에 있게 될 것입니다. 각자 다른 지체가 느낄 수 없는 자신만의 정서적 필요를 채울 것을 서로 요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각자가 서로의 정서적 필요를 채우기로 결단하고 실천한다면 교회 공동체는 천국의 교제를 즐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 느낄 수 없었던 세밀한 돌봄을 공동체로부터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공동체가 되어 어떻게 교제하기를 원하십니까? 교회는 가장 큰 기쁨과 희열을 누릴 수 있고, 가장 깊은 고통과 갈등을 선물할 수도 있습니다.

3. 낯선 이들에 대한 환대

12:13에서 제기하는 또 다른 주제는 우리 시대의 교회에 많이 결여된 사역인 낯선 이들을 위한 환대입니다. 현대사회가 복지모델을 지향하면서 교회가 가진 이웃 사랑과 헌신의 사역이 사회 복지적 기능으로 많은 부분 이전되었습니다. 사회가 이 일을 보편적으로 담당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지역 사회 속에 존재하는 교회가 어려움 속에 있는 이웃들의 삶에 전혀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은 오늘날의 교회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정부 기관과 사회가 이미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는 일을 충분히 하고 있으므로 교회는 예배하고 서로 교제하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가 분화되고 윤택할수록 사람은 서로에 대해 소외되고 정서적, 영적인 고통의 정도는 깊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신앙적 영역에서의 기능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소극적으로 규정할 때 교회에 속한 지체들까지도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교회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관에 맡기게 됩니다. 현대 교회는 낯선 이들에 대한 환대라는 사회적 기능에 대해 좀 더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이 구절을 직역하면 낯선 이들에게 친절을 추구하며입니다. ‘낯선 이들에 대한 친절이라는 말은 12:10에서 논의한 적이 있는 우정 어린 사랑필라델피아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낯선 이들에 대한 사랑은 실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지체된 우리가 서로에 대해 표현해야 할 사랑과 같은 사랑입니다.

본문에 숨겨진 또 하나의 의미는 이 구절이 바울이 살던 시대, 선교를 위해 여러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전도인들에 대한 배려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에 많은 교회가 지역을 중심으로 개척되고 소수의 전도인들이 교회를 순회하며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때로 교회 내에 분쟁이 발생하고 교회 간에 신학적인 입장의 차이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통해서 여러 사람을 여러 교회에 소개하고 있는 이유도 그런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했지만 여전히 다른 교회에 대해 낯선 사람들로 살고 있는 사역자들을 선대하라는 권면이 숨어 있습니다.

4. ‘그러므로의 힘

많은 교회가 이웃을 섬기는 사역을 시작했다가 쉽게 포기합니다. 그리고 그 사역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소모적인지 역설합니다. 더 이상 그 사역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자신들의 부정적인 경험에서 찾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일에 쉽게 지치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세상의 무수한 사랑의 필요에 대해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지치거나 탈진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필요는 언제나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의 크기보다 크고, 끈질긴 세상의 이기심은 우리의 인내보다 강력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부름받은 그 사역에 대해 계속적인 헌신과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요? 로마서 12:1그러므로는 이 모든 고민과 갈등에 대해 대답합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가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강조한 대로 로마서는 1장에서 11장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에 대해 논증합니다.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게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결정된 것입니다. 12장부터는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롭게 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서로의 필요를 공동으로 책임지며 낯선 이들을 계속적으로 환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미 큰 사랑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이미 구원의 은혜 가운데 있으므로, 우리가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었으므로 우리는 아무런 대가나 불평 없이 서로를 섬기며 이웃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국제 월드 비전의 포스트 중에서 이런 질문이 인쇄된 것이 있습니다. “굶주리고 있는 20억 인구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포스트 하단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 번에 한 사람씩....” 나 한 사람이 모든 성도에게 사랑과 친절을 나눌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한 교회가 지역 사회의 모든 필요를 섬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역, 내가 섬기고 있는 바로 이 일입니다. 자신만이 가진 고유한 은사와 방식에 하나님이 주신 하늘보다 큰 은혜와 사랑을 공급해야합니다. 세상의 모든 불의와 필요에 대해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곳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지체들을 통해 그 일들을 감당하실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서로를 섬기며 속한 지역 사회를 통해 사랑과 은혜를 나누면 됩니다. 우리들 모든 지체가 개인적, 공동체적으로 그런 필요에 대해 어떻게 헌신할 수 있는지를 계속 고민하면서 내가 맡은 바로 이 일에 소홀하지 않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나 아닌 다른 지체들과 이웃을 위해 우리의 마음과 삶을 더욱 넓게 열라는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역 가운데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눈으로 보고 삶으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만나는 곳에 교회와 성도의 참된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2013.10.2 기쁨의 공동체-23.핍박하는 자들을 향한 축복 na kim 2013.10.04 0 556
다음글 13.9.18. 기쁨의 공동체 -21. "절박하게 기도하라" na kim 2013.09.20 0 4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