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08 기쁨의 공동체-29"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다!" | na kim | 2014-01-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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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8. 로마서 12장 기쁨의 공동체 29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다!”(롬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20)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사람 창조에 대한 이야기 속에는 숨어 있는 또 하나에 대한 창조가 있습니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우주 만물은 단번에 지으셨습니다. 말씀과 뜻으로 세상을 조성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보기에 좋았고, 하나님을 만족시켰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지극히 좋아하셨지만,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어떤 결핍을 발견하십니다. 사람이 ‘독처’(獨處)하는 것, 즉 혼자 살아가는 것은 ‘좋지 않다’고 느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돕는 베필’(suitble helper)의 필요를 함께 느끼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지으신 피조물로서의 사람을 위해 또 다른 피조물을 만드십니다. 아담에게 하와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 창조 이야기에 숨은 또 하나의 창조는 보이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관계’의 창조입니다. 남자에게 여자를 허락하시는 것이면서 한편으로는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람을 허락하신 것이고, 따라서 ‘사회적 관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관계의 성격은 ‘독처’와 ‘돕는 베필’이라는 성경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범죄에 의해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위해 허락하신 관계 또한 파괴됩니다. 사람은 피조세계으로부터 적대당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 상호간에 서로에 대해 파괴적이며 적대적인 관계 속에 있게 됩니다. 두 가지 관계 따라서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창조적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돕는 베필’(Suitable helper)이라는 말로 설명됩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상 가운데 유일하게 좋지 못했던 현상에 대한 가장 적절한 사랑을 표현하셨고, 그것은 사람에게 창조적인 관계를 허락하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하나의 관계는 ‘원수’입니다. 이 관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사탄에게 꾀임을 받아서 들어가게 된 관계입니다. 서로를 해치는 관계입니다. 서로 원망합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미룹니다. 시로 질투하고 시기합니다. 서로 모함합니다. 사람은 이 원수적 관계를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서로를 적대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분노를 드러냅니다.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미루려는 어리석은 악함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미 사람들 서로와 하나님에게까지 원수적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2. 새로운 관계 절망 중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회복된 관계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회복된 관계는 모든 원수되었던 관계를 넘어섭니다. 에베소서 2:14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정리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교회와 성도들의 과거의 관계는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은혜가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 되시고 우리를 화평의 관계 속에 있게 하십니다. 화평의 새로운 관계 속에 있는 증거는 교회를 통해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된 성도들은 성도 상호관의 관계에서도 다양한 변화의 증거들을 생산합니다. 먼저 낮아집니다. 참된 겸손과 낮아짐으로 서로 희생하고 섬깁니다. 말씀과 사명 앞에 순종합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위해 생명을 내놓기도 합니다. 물질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독점하려 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유익을 구하는 일에 참된 기쁨이 생깁니다. 나의 희생과 헌신으로 인한 다른 지체의 유익과 기쁨을 참된 보람과 가치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관계가 모든 교회에 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회개 운동이 일어나고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있을 때 발전했던 새로운 관계는 성도와 교회의 일상의 생활 속에서 점점 무디어지고 희석됩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의 경계에 있던 초대교회는 허락하신 새로운 관계와 원수된 옛관계의 경계에 있습니다.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옛관계를 연습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경험하는 영적인 딜레마였습니다. 다툼과 분쟁, 시기와 질투가 교회에 있었고, 교만과 자랑이 발생했습니다. 서로 분열하고 비난했습니다. 회복된 관계 속에 원수적 관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3. 그러므로, 이렇게 하라. 성경이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 땅에 세워진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의 경계로서의 교회는 이 두 가지 관계에 있어서도 경계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교회와 성도가 여전히 두 가지 삶과 관계의 경계에 있고, 여전히 옛삶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오늘 말씀을 비롯하여 성경은 다양한 관점에서 성도와 교회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화평케하심이 역사하는 새로운 관계를 연습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고자 합니다. 그 중에 가장 난해한 한 말씀이 있다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문맥의 흐름상 20절의 말씀은 화해와 평화에 관한 내용이어야 합니다. 로마서의 내용이 11장에서 12장으로 넘어가면서 교리에서 삶으로 초점을 바꾸고 있고, 20절의 상반부에서 이미 바울은 로마 교회에게 성경적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증거했습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6-18)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20절의 말씀은 전후의 이러한 말씀과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자, 그렇다면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나 외경 등에서 등장하는 ‘숯불’의 의미는 심판과 정결을 상징합니다. 제단에는 늘 숯불이 있었고, 우리의 죄를 태워서 정결하게 하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창 19:24, 레 10:2, 시 11:6, 겔 21:31) 그렇다면 롬 12:20의 말씀도 이렇게 볼 수있을까요? 우리가 이웃에 대해 선을 행함으로 그들을 징계하고 심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숯불의 일반적인 의미와 본문에서의 의미는 다르게 보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숯불이 얼굴을 뜨겁게 한다는데 주목했습니다. 원수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와 악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치심을 느끼도록 의도하는 선한 행동은 이미 선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부정적인 감정을 목적하는 나의 의도된 행위가 과연 하나님 앞에서 선할 수 있을까요? 4. 숯불의 의미 분명한 것은 오늘의 본문이 세상의 악에 대한 성도와 교회의 적극적인 대응을 권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권면 가운데 숯불과 머리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레이 스테드만’이라는 신학자는 이 문제에 대한 가능성 있는 답을 제시합니다. 그는 두 가지 샘족의 문화적 현상에 집중했습니다. 먼저 샘족 문화권에서는 숯불을 사용하여 불을 붙였습니다. 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보존해야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릇을 사용하여 물건을 운반했는데 많은 경우 그릇을 머리에 지고 날랐습니다. 그는 잠언 25장을 해석하기를, 원수의 집에 불씨가 꺼진 상황을 먼저 상상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원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원수된 관계에서 상대방의 불행을 즐거워하거나 조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절 본문은 원래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이 접속사는 ‘아주 반대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수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의 일반적인 대응과는 아주 반대로 행동하라”는 권면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했습니다. 그런 행동이 의미는 무엇인가하면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어떤 불행이나 어려움이 생기든지 언제든지 돕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불씨 하나를 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언제든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숯불을 머리 위에 쌓아두는 것과 같습니다. 피터 코터렐과 맥스 터너라는 신학자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그들은 잠언 25:21-22를 23절과 함께 묶어서 보려고 했습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잠 25:21-23) 23절에서 ‘북풍이 비를 일으킴같이...’라는 구절에서 그들은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북풍’이 비를 가져오는 바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북풍과 함께 비를 가져오는 지역은 애굽 지역이었습니다. 잠언이 고대 근동의 많은 나라들에서 영향을 받고, 유대교적 전통으로 해석된 바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혹 애굽의 전통 중에 숯불과 관련된 지혜가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윌리엄 클라센이라는 신학자는 이집트의 문서 ‘멤피스의 대제사장 이야기’라는 책에서 숯불에 관한 전통을 발견했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은 머리에 숯불이 담긴 토기를 이고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 찾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의 참된 자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재를 뒤집어쓰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나에게 악을 행한 원수를 오히려 먹이고 입할 때 그가 자신의 잘못을 더 잘 깨닫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원수에게 선을 행함으로 그를 회개로 인도하라는 말씀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을 ‘회복된 관계’에 집중해서 본다면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말씀이 의도하는 바 그 메시지를 얻을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원수적 관계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회복된 관계의 삶을 사는 성도와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때로 그것은 다른 사람이, 혹은 심지어 다른 성도가 내게 원수적 행위를 할지라도 그와는 ‘아주 반대로’ 우리는 그들을 섬기고 사랑하며 먹이고 입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일어난 변화를 그에게도 일어나게 하며, 내게 적용된 회복된 관계 속에 그를 인도하는 길이 됩니다. 이민 사회를 살다보니 우리 마음에 응어리진 것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때로 합당하지 않은 분노가 교회적 관계를 해치기도 하고, 때로 신앙적이지 않은 행동과 말이 교회 안에서 오고 가기도 합니다. 고민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를 지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서로 원수되었습니까? 우리는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었습니까? 우리의 대답과 행동이 일치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화평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관계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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