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adical Disciple – 1. 그리스도인, 그리고 제자 | na kim | 2014-02-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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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 12. 초대교회 수요 예배 The Radical Disciple – 1. 그리스도인, 그리고 제자(눅 6:46) 영국의 신학자 John R. W. Stott 박사는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요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21년에 런던에서 태어나 성공회 사제로 All Souls Church에서 30년간 목회하면서 강력하고 혁신적인 목회 사역으로 세계 교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국을 비롯한 범세계적인 복음주의권 지도자로 인정받았고, 현대 기독교 복음주의운동 가운데 가장 의미있는 연합운동인 로잔 언약의 입안자로 참여했습니다. 런던 현대기독교 연구소장을 지내면서 주로 소외된 제3세계에서 광범위한 설교 사역을 했고, 활발한 강연과 저술활동을 계속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그를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성직자”라고 했고, 존 폴락은 “사실상 전세계 복음주의적 신학의 리더”라고 했습니다. 2005년 타임지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에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도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를 신앙의 멘토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2011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부터 약 10주간 존 스토트의 ‘The Radical Disciple(제자도/IVP)를 주교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의 마지막 저술이라고 알려진 이 책은 그가 요양하면서 자신의 사역과 교회를 돌아보는 중에 썼습니다. 제목을 ’Radical....‘이라고 붙일 만큼 교회와 이 땅을 섬기는 중에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과 간절한 충성된 마음으로 써내려갔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를 소망하는 초대교회에 좋은 도전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스도인(Christian)으로 불리다. 언제 세상은 성도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까요? 잘 알려진 대로 그것은 사도행전 11:26에서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세상 사람들이 만든 별칭이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 예수를 믿고 예수처럼 헌신하는 사람들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안디옥은 국제적인 무역도시였습니다. 당연히 그곳에 있는 교회도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섞여 있었습니다. 안디옥이라는 도시가 가진 다양성은 그 속에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각각의 정체성을 기본으로 하는 것입니다. 각 나라와 문화가 인정되고 피부 색깔과 습관이 각각의 전통을 따라 인정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회에 모든 나라와 민족과 문화를 아우르는 독특한 하나의 집단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출신지역이나 민족, 문화나 피부의 색이 아닌 그들이 믿는 바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입니다. 점점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고 그들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삶과 생각과 원칙을 살펴보던 안디옥 사회가 드디어 중요한 공통점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동일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 속에 있는 동일한 내면의 동기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리스도로 인한 동일한 내면의 동기는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총성과 신실함은 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는 의미있는 삶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신약을 통틀어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것은 단 3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중 한번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에서입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앞에서 복음으로 당당히 맞섰을 때 아그립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는 도다”(행 26:28) 아마도 당시 로마 사회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이미 ‘그리스도인’으로 부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가 사회에 대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사회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성도들과 교회가 얼마나 진지하고 용기 있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또 한번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예는 사도 베드로의 편지에서입니다. 여기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사도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2-16) 이 편지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만나는 두 가지 고난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잘못된 삶의 결과가 고통으로 다가오는 때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고통을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로는 고통받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성도라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는 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로 인해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인에서 제자로... 그렇다면 ‘제자’(disciple)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리스도인과 제자는 모두 예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섬기는 삶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면 제자는 그렇게 살기 위해 훈련하고 연습하는 삶의 과정을 말합니다.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강력합니다. ‘제자’라는 단어에는 선생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함께 동행하며 본받는 삶의 과정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 또한 사도이기 전에 제자였고, 사역하기 전에 먼저 스승의 삶을 배우고 훈련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문제 제기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 6:46)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에 관심을 가졌고, 능력과 권세에 대해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모두 복음과 자신들의 삶의 거리를 먼저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가르침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순종하여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삶을 변화시키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제기하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내게 순종하지는 않는구나!“ ”너희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제자의 삶을 살려고 하지는 않는구나!“ ”너희들이 나의 가르침이 옳다고 하면서 나처럼 살려고 하지는 않는구나!“ 3. Radical! ‘Radical’(급진적)이라는 말은 ‘뿌리’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라딕스’(rddix)에서 왔습니다. 이 단어는 19세기 정치가 윌리엄 코벳(William Cobbett)과 극단적 진보세력을 지칭하는 정치적 용어였습니다. 이때로부터 이 용어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대의에 철저하게 헌신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원래 ‘radical’ 한 것입니다. 복음적인 삶 또한 ‘radical’입니다. 가르친 대로 믿는 것, 믿는 대로 고백하는 것, 고백한 대로 사는 것 – 이 모든 것이 radical 한 성도의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삶은 Radical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사역을 설명하는 중에 사람에 대해 참고 인내하셨고, 그들의 부족함과 연약함에 대해 품고 사랑하셨지만 가슴 속에 품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단 한순간의 양보도, 포기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신 분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모든 죄의 짐을 지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역설적이고 놀라운 사랑의 실천 – 예수님은 정말 radical하게 그 모든 과정을 책임지셨고, 자신의 삶으로 복음을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한 복음은 그래서 radical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반성하게 되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영적 지혜와 결단들이 있습니다.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결심들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에 주님이 허락하신 복음과 신앙적 결단에 대해 radical 하다면 우리는 아마도 하나님이 때를 따라 주시는 말씀과 결심을 따라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실패합니다. 늘 복음보다는 현실을 선택하고 변화보다는 안정을 선택합니다. 복음은 radical 한 것이고, 복음에 대한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합니다. 4. The Radical Disciple! 그렇다면 왜 Disciple의 삶은 radical해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뿌려진 씨들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같은 씨에서 각각의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은 씨의 문제가 아니라 밭의 문제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밭에 뿌려진 씨를 설명하시면서 “뿌리가 없으므로...”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오늘의 말씀으로 재해석하자면 “복음에 대해 radical 하게 순종하지 않았음으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마음에 복음이 뿌려지고 열매 맺기를 원하는 성도는 복음을 만나기 전의 내 마음이 말하는 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내 어지러운 마음이 복음을 만났다면, 복음이 씨로 심겼다면 그 복음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도록 나의 마음을 radical 하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길가 밭의 경우 복음에 대한 선택적 입장을 취하려는 우리들의 경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말씀, 내가 순종하고 싶은 말씀에 대해서만 반응하려는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이 딱딱한 길의 모습으로 말씀을 거부하는 ‘길가밭’의 모습인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이상 복종의 영역에 속한 것이지 선택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가시밭의 경우에는 radical의 대상이 다른 성도들이 있음을 말합니다. 먼저 심긴 욕심과 욕망, 두려움과 염려에 대해서는 먼저 반응하지만 복음에 대해서는 주저하는 성도들이 현실적으로 참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먼저 심겨진 상처와 아픔들, 두려움과 염려들, 욕심과 필요들에 대해 복음은 radical하게 도전합니다. 제사의 마음을 옥토와 같은 마음입니다. 심긴 대로 거둘 수 있는 마음, 거두되 뿌린 씨앗의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는 마음입니다. radical한 순조의 삶을 사는 제자들에게 허락된 복음의 아름다운 열매가 있는 삶입니다. 다음 주 수요일부터는 The Radical Disciple이 가진 8가지 영적인 자질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불순응’, ‘그리스도를 닮음’, ‘영적 성숙’,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책임’, ‘복음에 대해 단순한 삶’, ‘영적 균형’,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의존’, ‘거룩한 죽음’입니다. 시간마다 허락하신 은혜를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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