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adical Disciple – 4. 영적 성숙(골 1:28-29) | na kim | 2014-03-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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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19. 초대교회 수요 예배 The Radical Disciple – 4. 영적 성숙(골 1:28-29)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면 잘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는 교회에 날마다 사람들이 더해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숫자만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수적 증가가 교회의 신앙을 교회의 신앙을 견고하게 세워 사는 일과 함께 가기를 바랍니다. - Cao Shengjie 여사(2006년 4월, China Christian Council 회장)
오늘날 중국 교회의 상장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중국이 세계 시장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시기와 중국 교회의 성장의 시기는 묘하게 맞물립니다. 중국 교회는 적어도 20세기 중반 이후에 100배 이상 성장했고, 2014년 현재 서유럽의 모든 교회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이 매주일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 교회에 현대 기독교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직 중국은 피선교 지역이며 그들의 양적 성장에 맞는 영적 성숙함을 인정하기에는 여러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교회가 이미 경험한 바 있고,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미 언급하고 있습니다.
‘넓이’보다 ‘깊이’ 대표적인 강해 설교자이면서 미국 교계와 언론이 꼽는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 중 한 사람으로 존 맥아더 목사가 있습니다. 그가 얼마 전에 미국 교계 흐름과 한국 교회의 흐름을 비교해서 진단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미국은 기독교의 가치를 잃었다. 그걸 잃는 데 200년이 걸린 셈이다. 과거 미국은 기독교가 사회와 문화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기독교 중심'이란 말이 점점 '기독교적인 문화'로 바뀌다가, 이제는 '신이교주의(neo paganism)'의 개념으로까지 변질됐다. 그런데 한국은 그 과정을 밟기도 전에 갑자기 끝난 듯하다.“
그의 발언의 구체적인 의미를 묻자 그는 “한국은 짧은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갑자기 교회가 커지면서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 결과 기독교 가치가 내부적 또는 사회적으로 제대로 정착되기도 전에 교회는 힘과 권위만 갖게 됐다. 그런 불안한 상태에서 한국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급격한 물결에 휩쓸리며 본질을 잃어갔다”고 대답했습니다. 본질에 대한 고민보다 현상에 대한 자랑이 앞섰던 한국교회는 새로운 시대정신에 적응하지 못했고,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는 비판인 셈입니다. 물론 그는 이런 비판을 미국 교회에 먼저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속한 교회는 이런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는 목회자와 교회가 ‘넓이’보다 ‘깊이’에 집중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본질이 우선하는 목회, 복음이 살아 있는 교회, 큰 교회가 아니라 생명력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숙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와 목회자의 문제를 함께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이제 하찮은 곳으로 전락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목소리를 잃었다. 본질을 잃은 채 세상에만 받아들여지기 위한 몸짓이 오히려 교회를 세상과 구분되지 않는 무의미한 곳으로 만들었다.... 목회자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넓이보다 깊이다. 대형교회처럼 교회가 넓어지는 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더라도 목사의 언변, 영리함, 전략 같은 것을 통해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깊이는 그런 식으론 불가능하다.... 숫자를 떠나 맡겨진 양떼를 돌보는 일에 집중하고 복음 안에서 갖는 깊이는 오직 하나님을 위한 영광이다.” 2. 깊이 없는 성장, 뿌리 없는 영성의 나무 이러한 고민은 1세기 초대교회에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성도들 중에서 ‘깊이 없는 성장’으로 만족하는 성도들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고전 3:1-3에서 목회자로서의 사도 바울의 고민을 읽을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1-3) 그는 고린도 교회를 “형제들아!”라고 부르면서 “너희들 신령하지 않은, 아직 육신에 속한 성도들로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사람을 따라 행하고 있고, 서로 시기하고 분쟁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아이와 같아서 젖을 먹고 밥을 먹을 수 없는 미성숙한 성도들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고린도교회의 현상과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고난 가운데 성장하는 교회였고, 1세기 대표적인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영적 미성숙은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고민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영적 성장을 멈춘 성도와 교회로 살아간다면 우리 역시 고린도 교회처럼 성령과 동역하는 교회가 아닌 성령의 사역의 대상만 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3. 바울의 고민과 사역 하지만 바울은 그들에 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영적으로 성숙한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고민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골 1:28-29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이 본문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성숙의 개념과 방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성숙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삶을 통해 경험하는 성숙은 다양합니다. 신체적으로도 성숙해야 하고, 지적으로나 성품도 성숙해야 합니다. 도덕적으로나 성품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적 성숙을 고민합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 성숙의 열쇠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몸 된 교회, 그리고 지체로서의 성도 각개인의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문장의 의미는 박스 안에 물건이 들어 있는 개념이 아니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서 열매를 맺듯,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살아감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생명으로, 유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관계입니다. ‘영적 성숙’은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신뢰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삶의 이유가 되는 관계의 깊이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2) 어떻게 성숙할 수 있을까요? 골 1:28에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 구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전하고 있는가 하는 것과 ‘완전한 자’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John Stott 목사는 ‘제자도’에서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에는 너무 많은 예수가 팔리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거짓 예수, 왜곡된 예수, 자본주의적 예수, 사회주의적 예수, 혁명가 예수, CEO 예수가 있습니다. 광대 예수가 있는가 하면 노숙자 예수도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라는 복음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어떤 예수를 증거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골 1:15-20에 걸쳐서 자신이 고백하고 믿고 증거하는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 봅시다. 우리가 범하는 가장 흔한 실수는 우리를 통해 예수를 보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우리의 삶과 욕심과 상처를 통해 예수를 보니 예수는 여러 가지 얼굴과 모습으로 우리를 만족시키려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를 통해 예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바라볼 것을 권면합니다. 그것이 복음이요, 그것이 영적 성숙에 이르는 길입니다. 3) 영적 성숙은 각 사람에 대한 부르심입니다. 위에서 던졌던 질문, ‘완전한 자’에 대한 대답은 초대교회 당시의 상황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28절 한 절에서 ‘각 사람’이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이 말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성경학자들은 ‘초기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라는데 동의합니다. 1세기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영지주의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쪽은 피스티스(pistis, 믿음)로 연결된 ‘호이 폴로이’(hoi polloi,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믿음만 있을 뿐 성숙에 이를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한쪽은 ‘그노시스’(gnosis, 특별한 지식)를 전수 받은 ‘호이 텔레이오이’(hoi teleioi, 완전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특별한 영적 지식으로 무장한 자신들만이 ‘완전한 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그들의 영적인 엘리트 의식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그들이 주장했던 ‘텔레이오스’(teleios, 완전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훈련받는 모든 성도들에게 열려 있는 길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각 사람’을 강조한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각 사람’이라는 말은 결국 ‘모든 사람’에게 영적 성숙의 길이 열려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을 가르쳐서 성숙한 성도로 세우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밝힙니다. 4. 성도의 이중적인 책임 성경을 읽을 때 여러분은 저자의 입장에 서십니까? 독자의 입장에 서십니까? 이것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매우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쉬운 예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바울의 마음으로 함께 읽으면 다른 성도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편 독자의 입장, 즉 우리가 편지를 받는다면 우리는 영적 성숙에 대한 부담감 혹은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어떻게 읽는 것이 바른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골 1:29에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작용하는 그분의 활력을 따라 수고하고 애쓰고 있습니다.”(골 1:29/새번역)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리더로 부름받는 그는 교회의 영적 성숙에 대한 이중적인 책임이 있음을 밝힙니다. 먼저 그는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그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요, 그 자신도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대상이 됩니다. 영적 성숙을 위해서 자신도 노력해야 하고,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는 다른 성도와 교회의 영적 성숙을 돕고 협력해야 할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성도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목표이기도 하고, 다른 성도들을 위한 우리의 사역과 사명의 목표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이 일에 함께 헌신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영적 성숙을 위해 준비된 일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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