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adical Disciple – 9. 죽음(고후 4:10-11) | na kim | 2014-07-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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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4. 초대교회 수요 예배 The Radical Disciple – 9. 죽음(고후 4:10-11) “죽음은 자연스럽지 못하고 불쾌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에게 끔찍한 최후를 제시한다. 죽음은 끝이다. 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죽음은 생명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자 한다면 죽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이 안내하는 생명의 영광을 볼 때에만 우리는 기꺼이 죽을 것이다. 이는 급진적이고 역설적인 기독교적 관점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정확히 말하자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들’이다.” - 제자도 p.159/ John Stott 사람의 죽음의 과정을 생생하게 느꼈던 것은 20대 중반, 할머니를 통해서였습니다. 당시 78세셨던 할머니는 위암으로 고생을 하셨습니다. 임종이 예고되던 날, 이상한 느낌에 이끌려서 할머니 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새벽 2-3시 쯤 되었습니다. 고모님이 다급하게 부르셨습니다. 방에 들어가 보니 할머니의 호흡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손을 잡았습니다. 잠시 기도를 드린 후 고모님과 함께 양쪽으로 앉아서 무엇인가 말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고통스러우셨던지... 할머니는 다소 불편한 얼굴로 한 모금 정도의 피를 쏟으셨습니다. 한 순간, 그대로 따뜻했던 손이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온도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삶에서 죽음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그때를 기억하면 아직도 제 손에는 무엇인가 습기가 찬 듯 느낌이 살아옵니다. 인류의 모든 종교와 문화는 죽음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해 왔습니다. 그 대답의 옳고 그름과 깊이의 정도와 관계없이 죽음은 인류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를 원하는 우리는 죽음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와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어떤 태도로 살고 있습니까? 오늘은 죽음이라는 주제가 적용되는 우리의 신앙의 영역들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영원한 생명, 구원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에는 ‘영원불멸’(永遠不滅)에 대한 기대가 존재합니다. 인류가 시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이해하면 종교들이 ‘생명의 시간적 영원성’에 대한 일정한 해석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 또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고 했습니다. 성경은 영생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편적인 종교가 말하는 영생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8:18) 성경은 이에 대해 분명한 답을 줍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5) 믿는 자에게는 이미 영생이 허락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조금 다르게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 예수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가졌습니다. 영생을 가진 사람은 죽음도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의 독특성은 그것이 가진 시간적인 무한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간에 제한되지 않는 새로운 생명, 그것은 ‘생명의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는 새생명’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이미 영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새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세상의 죽음이 우리를 결정짓지 않습니다. 롬 6:11에서는 그런 성도의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영생을 소유한 하나님이 자녀는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과 함께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2. 그러므로, 제자들의 삶이란?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제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4-35) 이 구절을 John Stott는 그의 책 ‘제자도’에서 이렇게 풀어서 이해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에게 매달려 자신을 위해 살려 한다면 자신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죽고자 하며, 자신을 포기하고자 하며, 자신을 내어주고자 한다면, 자신을 완전히 버리는 순간 그는 자신을 찾을 것이며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권면하시기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라고 했습니다. 제자의 삶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신 새생명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죽음이 지배하지 못합니다. 육신의 욕심과 생각이 주장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우리 안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명으로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3. 죽음, 그리고 선교 죽음을 통한 생명의 원리가 적용되는 선교입니다. 고난은 선교의 열매를 위한 거름과도 같습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은 선교의 과정에서 생략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 12장에서 썩어지는 밀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3-25) 예수님은 죽음은 생명으로 가는 길이요 복음은 교회와 성도의 죽음을 통해 세상에 확장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이 죽음과 생명의 원리는 모든 교회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 4:12) 바울은 선교의 과정을 단순화했습니다. 선교란, 복음을 전하는 자의 죽음과 복음을 받는 자의 생명이 교차되는 현장입니다. 복음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생명을 자신의 죽음으로 얻고자 하는 사람이 선교에 헌신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4. 박해의 일상성, 그리고 면류관 사도 바울은 고후 4:10-11에서 반복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11) ‘항상’, ‘죽음’, ‘생명’, 그리고 우리의 ‘몸’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연결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성도와 교회의 ‘몸’ 즉, 삶에는 ‘죽음과 생명이 항상’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와 교회로 산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삶에 세상으로부터 오는 고난과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오는 생명의 기쁨과 영광이 ‘항상’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박해의 일상성은 영광의 일상성으로 변화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마지막 당부의 말씀으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이 말씀에서 함께 사용되는 단어들에 주목하십시오. 먼저 ‘고난’과 ‘시험’과 ‘환란’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성도가 취할 영적인 태도는 ‘충성’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생명이 면류관’입니다. 이것이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 오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성경은 편협하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이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처럼 고난의 현실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생명의 면류관’ 또한 이미 함께 있습니다. 5. 순교, 누구의 무기인가? 루마니아의 기독교 지도자로 차우세스쿠의 박해를 받았던 요시프 톤(Josif Ton) 목사는 그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최대의 무기는 우리는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최대의 무기는 당신의 손에 죽는 것입니다.” 그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의 의미를 자신의 삶으로 깨닫고 실천한 사람입니다. 나찌의 폭압에 목숨을 잃었던 디트리히 본회퍼 또한 교수대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내게는 생명의 시작이다.” 세상은 복음으로 사는 성도를 억압하고 죽임으로 복음의 확산을 가로막고자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순교가 복음의 가장 큰 무기임을 증명했습니다. 순교하는 교회 앞에 세상은 늘 무력합니다. 순교는 패배가 아니라 영광의 시작입니다. 6. 유한한 세상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다. 우리는 다섯 가지 죽음과 관련한 성경적 주제를 묵상했습니다. 우리가 깨닫고 얻는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은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해 죽고, 죄에 대해 죽고, 우리들의 욕심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죽음의 과정은 곧 생명의 과정이며, 유한한 세상에서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무한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그는 이 땅에서의 삶과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묵상했고, 죽음이 주는 영광과 유익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유한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의 영적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John Stott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를 원하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생각해볼 것을 제안합니다. /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드리는 예배가 깊은 만족을 가져다준다면, 하늘에서 모두 함께 드리는 예배는 훨씬 황홀할 것이다. /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진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진리는 더욱 감동적일 것이다. / 지금 일몰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동시킨다면, 새하늘과 새땅의 아름다움은 어쩔 것인가? / 지금 타문화권에 있는 이들과의 교제가 우리를 감동시킨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모였을 때 모든 족속과 언어가 함께 모이는 기쁨은 더 클 것이다. / 우리가 이 땅에서 복음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한다면, 슬픔도 없고 눈물도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기쁨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중요하고 성도의 교제가 감사한 이유는 John Stott가 제안하는 상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성도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문은 단 한번,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세상에 대해, 죄와 욕심에 대해 열리며,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 열립니다. 제자로 살기를 원하는 우리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죽음을 조롱했던 바울의 영적 담대함이 오늘 우리들의 것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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