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함을 만나다.(시편 39편) | na kim | 2014-07-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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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26. 연약한 인생, 풍성한 은혜 1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연약함을 만나다.(시편 39편) ‘사귐의 기도’라는 책으로 한국 교회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김영봉 목사는 ‘사귐을 위한 기도 선집’이라는 책에서 자신이 자주 심방할 때 사용하는 기도문 하나를 소개합니다. 프랑스의 가톨릭 사제이면서 고생물학자였던 샤르댕 신부의 기도문입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몸에 하나둘 나이 먹은 흔적이 생길 때 그리고 이 흔적들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을 때 나를 조금씩 움츠러들게 하고 쇠약하게 하는 질병이 몸 안팎에서 생겨날 때, 나도 병들고 늙어 간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으며 두려움 속에 빠져들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만들어왔던, 알지 못하는 위대한 힘들의 손길 안에서 자신을 잃어 가고 있으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마침내 느낄 때 이 모든 암울한 순간에, 오 하나님, 저로 하여금 알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제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와 저를 하나님께로 데려가기 위해 조금씩 분해시키는 과정임을!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도 저만큼이나 아파하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샤르댕 신부와 같은 절망과 소망이 교차하는 영적 경험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김영봉 목사는 40대 후반 어금니 하나를 완전히 뽑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 자신의 몸에서 떠날 왼쪽 어금니를 통해서 영적 교훈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나도 이제 샤르댕 신부의 기도를 드려야 할 때임을 알게 하시는구나....” 과거에 즐기던 것을 더 이상 즐길 수 없고, 과거에 내가 가졌던 것들을 더 이상 붙들 수 없는 때가 다가올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실까요? 이번 주부터 약 20회에 걸쳐서 도널드 맥컬로우 목사의 ‘The Consolations of Imperfection’(모자람의 위안/2004/IVP)이라는 책을 텍스트로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세밀한 도우심을 기대합니다. 우리의 인생, 한계가 있습니다. 저는 요즘 돋보기를 쓸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식당에서 계산을 할 때도 가끔씩 작은 청구서를 주면 팁 계산하기가 힘이 듭니다. 봄철 알러지가 심하면 시력이 더욱 나빠지고 피곤하면 더 그렇습니다. 지난 토요일 아침 성경 공부를 마치고 202번 도로를 따라 2시간 정도 자전거를 탔더니 걸음걸이가 이상해졌고, 엉덩이는 자전거 안장에 쏠려서 아직도 통증이 있습니다. 그렇게 좋아했던 축구를 하다가 2년 전에는 근육에 손상을 입어서 목발을 짚었고, 지난 달에는 쥐가 나서 결국 경기에 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점점 제 몸이 불편해지고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마음과 생각, 그리고 몸의 움직임의 현실이 달라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이렇게 한계가 있습니다. 얼마 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지혜’라는 글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모든 내용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반응을 보인 ‘지혜’는 바로 ‘기대 수준을 낮추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에 맞지 않는 기대가 분노와 실망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글을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서로의 한계를 인정하라”고 말입니다. 서로가 가진 사람으로서의 한계, 배우자로서의 한계, 한 남성과 여성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다른 배우자를 책임질 수 있는 자질을 배우지 못했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이러한 한계에 대한 우리들의 대응 중 하나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우리가 만난 한계를 이기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소위 ‘하면 된다’는 낙관 일변도의 사고와 문화는 우리가 만나는 한계를 부정하고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모든 장애와 어려움은 넘어서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가르칩니다. 미국의 교육 운동가이며 영성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파커 팔머(Parker Palm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한계라는 개념 자체에 저항하며, 모든 종류의 한계를 우리 삶에 대한 한시적이고 유감스러운 부담으로 여긴다. 서부를 개척하고, 음속을 뛰어넘고, 이동조차 힘들 만큼 기존 공간을 쓰레기 천지로 만들어 놓고는 새로운 ‘사이버 공간’을 발견하는 등, 한계에 대한 끝없는 도전은 우리의 국가적 신화이다. 우리에게 안된다는 대답을 있을 수 없다.”(Let your life speak, Jossey-Bass, 2000/p.39) 이것이 미국이 강조하는 개척정신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통해서 한계를 거부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삶의 역경을 헤쳐 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면 긍정적인 면을 보고, 가능하면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가능하면 좋은 면을 강조하면 정신 건강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한국의 인기 있는 예능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에서 처음에 외쳤던 구호는 그런 면에서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유재석씨가 어려운 과제 앞에서 무너져 있는 동료들을 격려하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안된다 하지 말고, 아니라 하지 말고... 어떻게?” 그러면 모든 동료들이 “긍정적으로!”라고 대답을 합니다. 다시 그들은 도전하고 망가지고....그리고 목표를 이뤄갑니다. 어쩌면 무한도전은 예능 프로그램이 가진 사회적 기능을 아주 잘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소 어려운 삶의 여정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힘을 냅시다. 모든 문제에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반드시 답이 있습니다.”라는 초긍정의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좋은 메시지 일 수는 있지만 진실은 아닙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은 매우 유용하지만 불완전합니다. 그것은 숨어 있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숨어 있는 사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생은 한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결심이 단호해도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고, 아무리 단단하게 준비해도 질병이 찾아오고 사고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한계 앞에서 때로 좌절하며 고민하며 분노합니다. 3. 두려움, 한계를 외면하려는 이유 얼마 전에 저는 알콜과 도박에 빠져 든 한 중년 남성을 상담했습니다. 그는 노후를 위해 모아두었던 꽤 많은 돈을 결국 도박으로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왜 술과 도박에 그렇게 탐닉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화가 났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대답은 절반은 진실이며 절반은 거짓입니다. 인생이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함께 30년을 살아온 아내는 요즘 자신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는 아내가 자신과 이혼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자녀들과는 더욱 멀어졌습니다. 미국에서 자라는 자녀들을 한국적으로 교육했더니 자녀들이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어릴 때는 매를 들었는데, 얼마 전부터 아들들은 아버지보다 더 완력이 강해졌습니다. 가족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재정을 사용한 압박’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아내도, 자녀들도 직장에 나갑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제는 더이상 가족들이 자신의 통제권 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젊었을 때는 소리치고 부수고 때렸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점점 술에, 그리고 도박에 빠져들었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을 만다는 정서적인 동력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말 분노일까요?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분노보다는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우리의 연약함 혹은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외면해버리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두려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니스트 베이커는 그의 탁월한 저서인 ‘죽음의 부정’(The Denial of Death)에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에 대한 부정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이면서 그와 관련된 모든 우리의 한계를 상징합니다. 어느 날 부러진 영구치 하나, 문득 깨닫게 된 질병에 대한 가족력, 부쩍 성장해서 자신의 통제와 권위를 벗어난 듯 보이는 자녀들,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인생길을 달려왔지만 남은 것은 지친 몸과 마음뿐.... 우리는 우리 인생의 곳곳에서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다가 우리 인생의 연약함과 화학작용을 합니다. 우리를 깊은 절망에 빠지게 하고, 연약함에 대해 분노하게 하고, 부정하고 도망가도록 만듭니다. 4.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下)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연약함을 인정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인생이 만나는 연약함은 부정하거나 외면할 대상이 아니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삶의 과정입니다. 러시아의 천재적인 음악가이면서 말년에는 기독교 음악가로 활동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무제한의 자유’와 ‘창조적인 자유’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전자를 재앙이라고 했고 자신의 음악 세계를 후자를 통해서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예술가의 무제한의 자유는 오히려 결국 그를 파괴합니다. 아름다운 그림도 한 폭 종이 위에 그려지는 것이며, 음악도 시간과 공간 속에서 표현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낸다 한들 인간의 보편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인간이 가진 한계는 예술을 더 깊이있고 진실되게 만듭니다. 시편 39편은 일반적으로 다윗의 노년의 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지금 심각한 병 중에 있습니다. 성공하고 성장하고 확장하는 것이 그의 인생이었는데,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때가 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인생의 진실을 고백합니다.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7절)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다윗이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몇 가지 지혜를 봅시다. 먼저 그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수많은 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원통함을 토로했습니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수많은 사람들의 악함과 비겁함에 대해 분노하며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을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1,2,9절) 자신에게 연약함이 있듯이 그들에게도 연약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삶의 본질을 보고자 합니다. 그의 삶의 본질은 강함보다는 약함에, 풍성함보다는 부족함에 있었습니다.(4,5절)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더 커지고 더 많아지고 더 높아지고자 했지만 이제는 더 낮고 깊은 곳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한 사람으로 자신을 고백합니다.(6,7절) 그는 기도하며 하나님을 바라봅니다.(12,13절) 어쩌면 다윗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때에 비로소 자신과 하나님을 가장 진실되게 만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연약하고 두려움 많은 존재가 자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하나님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연약함 가운데 임재하셔서 당신의 사람을 은혜로 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때 그는 비로소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겸손히 엎드릴 때 하나님은 그 모든 결핍을 은혜로 채우십니다. 서로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겸손해야 하고, 타인에 대해 관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만납시다. 연약한 우리 인생의 참된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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