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은 부모인가?(창 49:1, 28) | na kim | 2014-07-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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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16. 연약한 인생, 풍성한 은혜 3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나는 좋은 부모인가?(창 49:1, 28)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도 인간일 뿐이다.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불안을 달래 주거나 가장 간절한 열망을 채워 줄 힘은 당신에게도 없고 그들에게도 없다. ‘ - 모자람의 위안, IVP p. 45/ 도널드 맥컬로우 저는 감히 한국 교회가 시작한 평신도 교회 운동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역으로 ‘아버지 학교’를 꼽습니다. 1995년 한국의 온누리 교에서 시작한 이 사역은 한 때 미국을 휩쓸고 지나갔던 ‘Promise Keepers’ 운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학교에서 던지는 문제 제기는 아주 심각하면서 단순합니다.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게 되고, 결혼을 해서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었는데, 과연 어떻게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인지를 배운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남느라 정신이 없었던 70-80년대를 지나서 복지국가의 모델로 들어가던 한국 사회가 공통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가정, 성경이 보여주는 아버지, 성경이 제시하는 남편이란 괴연 어떠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연구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신앙의 선조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읽으면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그들의 가정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 그러했고, 노아의 가정이 그랬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정이 그랬고, 요셉의 자녀도, 모세의 자녀도, 아론의 자녀도 모범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기드온이나 사무엘의 가정도 자녀 교육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좋은 가정, 좋은 남편과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지만 정작 성경에 나오는 많은 신앙의 선조들은 그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좋은 부모가 되고 싶습니다. 자녀들을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양육하고 싶습니다. 해야 한다면 내 살을 베고 내 피를 빼서라도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고 싶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진심으로 그러하고,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선조들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대로,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선조들은 하나남과의 관계, 즉 신앙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뛰어났지만 자녀들과의 관계에서는 쉽게 실패하고 넘어졌습니다. 우리 또한 좋은 부모에 대한 열망과 소원에도 불구하고 늘 아쉽고 아픈 관계 속에서 자녀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기신 ‘부모’라고 하는 이 아름다운 사명은 어떻게 감당하면 되는 것일까요? 성경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신앙이 선조들의 ‘부모됨’을 통해서 함께 생각해 봅시다. 친밀함의 뿌리, 가정 하나님은 사람을 사회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셨고, 가정을 허락하셨고, 사회를 구성하게 하셨습니다. 그중 하나님이 허락하신 관계의 최소단위, 즉 가정은 사람이 사람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친밀감의 최소 단위이기도 합니다. 존스 홉킨스 대학교기 1,300 여 명의 의료 기록을 조사한 결과 암과 정신질환 및 자살의 가장 강력한 예측 요인은 친밀한 가족 관계의 결핍이었다고 합니다. 가정이 친밀감의 기본 단위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모든 중요한 가치와 수단을 가정에서 먼저 학습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가정에서의 신앙 교육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사람에 대한 성경적 가치관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반대로 가정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권위를 인정하며 이익을 양보하고 욕구를 조절하는 이유와 방법을 습득하지 않으면 보다 넓은 사회로 나가서 재학습의 과정을 거치거나 혹은 사회에 부적응하기도 합니다. 선조들의 가정, 부모됨의 문제들 그러면 성경에서 만날 수 있는 신앙의 선조들의 가정을 살펴볼까요? 그들의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으로 잘 준비되고 훈련되어 있었을까요? 몇 가정의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 있어서 눈에 띄는 점을 생각해 봅시다. 1) 노아와 세 아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로 인정받았던 노아는 자녀들의 생명을 심판으로부터 구하는 놀라운 일을 합니다. 그의 믿음과 순종이 자녀들의 생명을 구합니다. 하지만 노아는 세 아들들에게 심각한 상처를 남깁니다. 자신도 모르게 수치를 드러내게 되고,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조롱함으로 저주를 받게 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자녀를 축복하고 언약을 계승하는 것입니다.(민 6:22-27) 노아는 한편 그 사명에 성공했지만 한편 그 사명에 실패합니다. 자녀의 부족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연약함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2)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그는 언약의 자손 이삭을 낳았지만 그에게는 이스마엘이 있었고, 노년에 그두라라는 이방 여인과의 결혼하여 40년 가까이 살면서 6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보여준 믿음의 여정에는 무한한 박수와 신뢰를 보낼 수 있지만 그의 이스마엘에 대한 태도나 그두라에게서 낳은 6명의 아들에 대한 태도는 다소 무책임해보입니다. 결국 이스마엘과 그 후손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과 원수가 되었고, 그두라와 아들들은 아브라함이 죽기 전에 동방으로 길을 떠나고 맙니다. 3)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어쩌면 성경에서 보여주는 가정들 중에서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가정만큼 불행한 가정도 없을 것입니다. 이삭은 편애하는 아버지였고, 그의 아들 야곱 또한 편애하는 남편과 아버지였습니다. 그들의 편애는 결국 자녀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분쟁하고 분열하게 했습니다. 이삭의 편애의 희생자였던 야곱은 자신의 자녀들을 편애의 희생자로 만들었고, 자녀들의 분노는 가장 약한 형제에게로 향했습니다. 아버지의 분별과 지혜 없는 사랑이 자녀들의 삶에 회복될 수 없는 깊은 아픔을 남긴 것입니다. 4) 모세와 아론 모세에게는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던 이드로의 딸, 십보라에게서 낳은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게르솜과 엘리에셀입니다. 모세는 아내와 늦은 나이에 낳은 아들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출애굽의 사역에 가족들이 걸림이 된 것 같습니다. 그는 가족들을 다시 미디안으로 돌려보냅니다. 모세의 가족은 출애굽을 마친 이후 광야에서 합류하게 됩니다. 모세의 사명과 가족들의 삶은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게르솜과 엘리에셀이 성경의 역사에서 잘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아론보다 먼저 죽습니다. 어쩌면 아론은 자신의 삶에서 시작된 사명이 아닌 동생 모세의 사명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때로 아론은 하나님 앞에서 정확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불을 사용하여 제사를 드리다가 징계를 받아 죽임 당하는 모습에서 아론의 그림자가 보입니다. 5) 다윗과 솔로몬 다윗은 좋은 신앙인이자 위대한 왕이었지만 좋은 아버지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많은 인생의 위기를 경험하면서 다양한 정략결혼을 했고, 많은 자녀를 생산했습니다. 그들에게 남겨진 날카로운 상처와 아픔은 때로 아버지 다윗에게 향했고, 그들 서로에게 향하기도 했습니다. 솔로몬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다가 인생의 마지막에 아들을 위한 당부의 말씀, 전도서를 남깁니다. 삶으로 가르치지 못한 교훈을 말씀으로 남겼지만 아들 르호보암은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미 삶으로 본 것이 너무 많았는지도 모릅니다. 3. 자녀에게 줄 수 없는 것, 주어야 하는 것 이상의 신앙의 선조들은 모두 좋은 아버지가 되는데 실패한 것일까요? 아니 그들은 좋은 아버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들 역시 오늘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의 자녀를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자녀를 위해 헌신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줄 수 없는 것,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부모가 최선을 다해서 자녀를 양육하려고 해도 자녀는 결국 부모와 다른 사람이요, 다른 인격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가르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조차도 때로는 말씀에 어긋나는 삶을 살았고, 그들이 자녀들에게 가르쳤던 원칙에 합당하지 않은 선택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연약하고 부족한 인생으로서의 부모의 한계입니다. 자녀를 사랑과 말씀으로 양육했다 해도 그 자녀가 완전해진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 자녀 역시 연약하고 부족한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제의 서두에 도널드 맥컬로우가 했던 말처럼 서로가 인간으로서 가진 연약함의 한계를 인정하고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 옳습니다. 할 수 없는 것은 말씀과 삶이 일치하는 완전한 부모가 되는 것이요, 해야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4. 자녀를 축복하는 부모 성경이 말하는 부모의 역할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부모는 없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있을 뿐입니다. 부모로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며 말씀으로 그 자녀의 삶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엡 6:4) 나의 성품으로 인해 상처와 아픔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과 긍휼하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자신의 열 두 아들을 차례로 축복합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 역시 그를 축복했고,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이삭을 축복했습니다. 족장이자 제사장으로서의 아버지는 아들과 그 후손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으로 축복할 사명과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완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자녀들을 축복할 수 있을까요? 민수가 6장 24-26절에서 하나님은 제사장 아론과 그 자녀들에게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해야 하는지를 교훈하십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 이 축복은 고린도후서 13:13의 신약의 축도와 더불어 구약의 축도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축복의 기도를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고 잠들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자녀들을 하나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며, 그 말씀으로 축복할 때 우리의 자녀들은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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