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7.30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전 7:16-18) | na kim | 2014-08-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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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30. 연약한 인생, 풍성한 은혜 4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전 7:16-18) “子曰 由아 誨女知之乎인저 知之爲知之오 不知爲不知이 是知也니라” 자왈 유 회여지지호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유야! 내 너에게 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곧 아는 것이다." (논어 위정편 2-17)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학문의 출발을 ‘의 ’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대한 자신의 근본적인 무지함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자기 지식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교만이 아닌 겸손으로, 판단과 정죄가 아닌 인정과 포용으로 세상을 대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내용의 말을 공자가 했다는 것입니다.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참된 지식은 내가 무엇을 아는가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칩니다. 참된 지식은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에 대한 분명하고 진솔한 접근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일보다 모르는 일이 많고, 드러난 일보다 숨겨진 일이 많습니다. 내가 어떤 사물 혹은 사건에 대해 나의 판단을 확정하는 순간 그 판단이 잘못된 것일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1. 의 벽을 만나다.
세상의 모든 학문에 통달했던 솔로몬은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고백합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6-18) 만일 그가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좀 더 일찍 인정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는 자신의 인생을 지식에 대한 만족에 낭비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젊은 날을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젊은 날은 지식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허비한 날들입니다. 그는 전도서를 통해서 “깨닫다” “알다”라는 동사를 많이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2:14에서 그는 “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리 속에 있고 우매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만 그들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으리라는 것을 나도 깨달아 알았도다”(전 2:14)라고 고백합니다. 3:12-14에서는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 3:12-14)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그는 또 하나의 지식을 깨닫고 알게 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가 평생을 자신의 지식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려 노력하다가 인생의 마지막에 깨닫고 알게 된 것은 그 모든 것이 헛되며 결국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엎드릴 수 밖에 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만난 ‘자신의 무지의 벽’, 그것이 솔로몬의 평생에 얻은 가장 깊고 참된 지혜입니다. 2. 인간 한계의 수용 vs. 인간 진보에 대한 유혹 “불가피한 무지가 주는 가장 소중한 축복은 인간다워질 수 있는 자유다. 그 필요성이 당장은 실감 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어차피 우리가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지 않은가?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는 인간 이외의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욕심이 우리를 밀고 당기고 주무르는 그 깊은 곳에, 인간 이상이 되려는 은밀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딱 잘라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한다. 적어도 모든 것을 알고 자기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모자람의 위안, p. 67) 위에 인용한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두 가지 주제는 첫째, 인간의 한계를 수용해야 한다는 자각과 둘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유혹 혹은 의지에 대한 것입니다. 이 정반대되는 두 가지 주제는 실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맞물려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거대 건축물이었던 바벨탑은 이 두 가지가 하나의 동전으로 만난 양면입니다. 인류는 창조와 타락 이후 성장과 발달을 거듭합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이후에도 인류는 지속적인 성장을 경험합니다. 과연 인류의 성장과 진보의 끝은 어디까지일까요? 안타깝게도 고대 인류는 곧 한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인류가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만난, 부정할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들은 결국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한계 끝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스스로 탑을 쌓고 흩어지지 않고 힘을 모으기로 결정합니다.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다스리는 세상을 건설하고자 한 것입니다. 결국 인류는 흩어지고 탑은 무너집니다. 고대 인류가 만났던 한계는 결국 극복할 수 없는 큰 장벽이자 계속적인 도전의 과제로 남게 됩니다. 그들이 한계를 넘어서서 얻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높고 큰 건물이 아니라 스스로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자기 신’(Self-God)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인류는 한계를 만날 때마다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한계를 수용하고 창조주를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눈앞에 있는 한계를 극복하고 ‘자기 진보’의 새로운 지경을 넓힐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지혜는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안에는 ‘생육과 충만, 그리고 정복과 다스림’이 핵심적인 내용으로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이것을 선택하고 저것 또한 버리지 말아야 하는 지혜와 관련이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정복하고 다스리는 인류의 사명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섭리 안에서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이 결국 무너지고 인류가 흩어지게 된 것은 인류가 자기 진보의 유혹에 이끌려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자기 통치로 나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하는 자기 주권 의식 또한 하나님 안에서는 용기 있는 삶에 대한 도전일 수 있지만, 스스로 자기 인생에 대한 신이 되려는 시도는 곧 어둠과 한계를 만나게 될 뿐입니다. 3.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면... 그래서 솔로몬은 자기 인생의 마지막 시간, 자신의 한계를 처절하게 삶으로 느끼며 고백합니다.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자신이 여전히 무지의 짙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주 자신이 마치 우매자와 같고(2:14,16), 짐승과도 일반(3:19)이라고 자조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어떻게 남은 삶을 살아야 할까요? 전도서와 잠언을 읽을 때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이 두 성경에서 지혜는 선으로 어리석음 혹은 무지함은 악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결국 죄악된 삶으로 연결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것은 참되고 가치있는 지식이면서 거룩한 삶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뒤덮고 있는 무지의 어두움을 인정하면서 비로소 참된 빛을 발견합니다. 어두운 밤이 아니면 반짝이는 별들을 발견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 한계의 어두움을 인정하면서 그 속에서 별빛처럼 반짝이는 하나님으로 인한 참된 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전도서의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생의 지혜’는 결국 인간 개발과 진보의 한계를 인정하는데서 시작합니다. 내가 모른다는 것은 알고 인정한다면 이제 피조물을 연구하고 개발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욕심에서 벗어나서 세상을 만드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알고 그 뜻에 집중하는 것이 옳습니다. 눈에 보이고 감각할 수 있는 세상을 통해서 오히려 겸손하게 하나님을 배우려는 태도, 이것이 영적 지혜의 출발입니다. 4. 수용하고 경외하라. 그러므로 전도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인생의 참된 지혜를 요약하면 ‘수용하고 경외하라’입니다. 무엇을 수용하고 무엇을 경외해야 하는 것일까요? 수용은 인간의 한계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사람입니다.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지음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고, 택하셨고, 불러주셨습니다. 목적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옳습니다. 그 목적은 물론 피조물로서의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에베소 교회를 권면하기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교회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피조물의 가장 큰 지혜는 그 목적에 맞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의 한계를 깨달아 알고 그 한계를 수용하는 것은 피조물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지혜입니다. 또한 소요리문답에서는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빌립보 교회를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허락하시는 지혜와 지식의 목적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능력과 지식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리는 것, 그것이 피조물로서의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전도서에서는 이 말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뜻을 깨달 수 있는 지혜를 날마다 더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과 자세로 날마다 그 뜻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 –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큰 은혜입니다. 날마다 그 은혜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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