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8. 27 그림자에 대한 용기(요1 1:9-10) | na kim | 2014-09-05 | |||
|
|||||
2014. 8. 27. 연약한 인생, 풍성한 은혜 6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그림자에 대한 용기(요1 1:9-10) “이것은 우리의 열등한 부분, 우리가 좀처럼 표현하지 않는 부분이다. 페르소나가 강하고 엄격할수록,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 더 동화할수록, 우리는 자기 성격의 다른 중요한 면들을 더 부정해야만 한다. 그런 측면들은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어느 정도 자주적으로 분리된 성격 즉 그림자의 형성에 기여한다. 그런데 그림자는 투사를 통하여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 인정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남들에게서 보는 것이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터무니없을 정도로 격한 증오를 느낀다고 말할 때 그에게 상대방의 가장 싫은 점들을 말해 보게 하면, 많은 경우 그 사람 자신의 억압된 면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훤히 보이는데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림자는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하며, 사회적 기준이나 페르소나와 양립할 수 없는 모든 비문명적 욕망과 정서로 구성된다. 그림자는 우리가 수치스러워하는 모든 것이다. - June Singer, Boundaries of the Soul – The Practice of Jung’s Psychology(New York:Doubleday, 1972) p.165 우리는 누구나 착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험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지라도 스스로를 “나는 도덕적으로 실패하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비록 범죄하고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그 내면에 선하고 진실하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늘 엉망입니다. 사람들 안에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하지만 함께 모여 사는 세상은 늘 부도덕과 부패가 만연하고 거짓과 타락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와 성도의 삶 또한 현대 사회의 도덕적 타락의 수준과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선한 삶을 갈망하며,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왜 날로 악해지고 날로 더러워지는 것일까요? 인정해야 할 사실 하나님은 전도서 7:21-22에서 솔로몬을 통해 참 재미있는 권면을 하십니다.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전 7:21-22) 일반적으로 우리는 소위 ‘뒷담화’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것을 하는 것을 나쁘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것이 나 자신에 대한 것일 때 분노하고 따지려고 합니다. “왜 내가 없는 곳에서 내 말을 합니까?” 혹은 “왜 내가 하지 않은 말과 행동을 했다고 말합니까?” 등등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그런데 전도서에서는 그런 모든 말들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일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해 분노하고 정죄했던 내가 알고 보니 그 잘못된 행위와 삶에 일정부분 동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등에 칼을 꽂지는 않지만 때로 그에 대한 험담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총과 칼을 들고 강도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세금에 대해 부정직했던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배우자를 폭행한 일은 없지만 고의로 감정을 다치도록 말하거나 행동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렇습니다. 내 안에 일정한 도덕적 영적 기준이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을 넘어서는 행위를 다른 사람들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하지는 않지만 내가 세운 기준을 조절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나는 남들보다 나쁘지는 않아...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니까.... 나는 착한 사람이니까... 나는 예수를 믿으니까... 등등의 논리로 자신의 부도덕을 합리화함으로써 양심의 불편함을 떨쳐버리려고 합니다. 우리의 도덕적, 양심적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여러 말로 자신을 합리화한다면 잠시 정서적인 안정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결국은 그 책임을 우리의 삶으로 지게 됩니다. 타협이 누적되면 그 하중이 너무 무거워 내 삶이 견디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페르소나와 그림자 Freud와 더불어 현대 정신분석학의 골격을 세운 Carl Jung은 사람의 내면에 함께 존재하고 있는 도덕성에 대한 지향과 비도덕적인 현실을 ‘페르소나와 그림자’이론을 통해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다 자신이 속한 환경과 교육을 통해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의미화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고민합니다. 융은 이것을 옛날 배우들이 사용하던 가면의 이름을 따서 ‘페르소나’라고 이름했습니다. 각자의 페르소나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규정하게 됩니다. 사회 생활에 꼭 필요한 도구입니다. 반면 융에 의하면. 우리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기 싫어하는 어두움이 있습니다. 페르소나가 강하고 엄격할수록,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 더 동화할수록, 우리는 자기 성경의 다른 중요하고 어두운 면들을 부정하게 됩니다. 그런 경향성들은 무의식 속에 억압으로 쌓이게 되고 ‘그림자’를 형성하게 됩니다. 저속하게 보이는 욕망들, 창피한 감정의 경험들, 수치스러운 욕망들이 무의식의 어두운 구석에서 때로 자기 자신조차도 발견하지 못하는 정서적 에너지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융에 의하면, 아무리 겉보기에 도덕적인 사람도 그림자가 있습니다. 이 그림자는 삶의 다양한 환경 속에서 반드시 표출됩니다. 우리 성품의 그림자를 이해하고 치료하려는 시도를 ‘그림자 작업’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습니다. 3. 불완전함이 주는 위안 그렇다면 성경의 사람에 대한 이해는 이 ‘그림자’에 대해 무엇이라 말할까요? 요한 1서에서는 이것을 발견하는 것을 ‘죄를 자백함’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성경은 이 그림자를 사람 안에 쌓인 상처 혹은 수치심 정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아름다운 창조의 원리에 역행하는 죄 혹은 죄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이러한 연약함, 즉 죄와 죄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엎드리면 더 큰 온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오랫동안 하나님 없는 ‘그림자에 대한 해석’을 시도해 왔고, 그 결과 심리학이 이해하고 해석하는 대로 사람을 과거와 환경이 피해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사람이 자신의 그림자, 즉 죄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때 온전한 성품과 삶으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긍휼이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빛이면서 또한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선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내가 원하지 않았던 악함에 의지할 때도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로서 해야 할 일을 하기 보다는 오히려 공동체성을 무너지게 하는 일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도덕성의 한계에 부딪히는 경험은 우리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론은 결국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후처를 들였고, 이삭은 편애했으며, 야곱은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부도덕했고, 솔로몬은 수많은 처첩을 거느렸습니다. 베드로는 배반했고, 바울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둠과 늘 싸워야 했습니다. 어두움 없이 빛 가운데만 걷는 성도와 교회는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요한 1서 1장 9절에서 권면하는 바와 같이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에 의지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자복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지시고 치료하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인정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긍휼과 인자를 베풀 수 있습니다. 앞서 전도서 7장에서 권면한 것처럼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도덕이 아들의 배반을 불렀다는 것을 인정했던 다윗은 시므이를 용납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부사인 ‘피차’라는 말을 기억하시면 좋습니다. 우리는 피차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이요, 그 빚으로 서로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중요한 성경적 원리 중 하나는, 다윗의 부도덕으로 말미암아 솔로몬이 탄생했고, 솔로몬의 우상숭배와 부도덕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손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연약함 때문에 섭리와 계획하심에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연약한 성도를 세우시고 일으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4. 나를 탄식하다. 불완전함이 주는 적절한 위안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합리화하거나 즐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자기 안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깊은 탄식을 했습니다. 그 탄식의 끝에 하나님의 은혜만을 더욱 사모했습니다. 바울이 완벽주의자이면서 율법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또한 동역자들과 교회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긍휼을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의 죄성에 대한 깊은 탄식에 있었습니다. 비로소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마음 깊이 경험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함께 느끼게 됩니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황소가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보다 대여섯가지를 더 안다.”고 했습니다. 소를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소가 주는 유익만을 생각하지만 소를 키워본 사람은 소가 만들어내는 분비물과 청결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웬만한 분비물에 놀라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유와 고기와 농사를 위해 소를 키우지만 좋은 일에는 더럽고 수고로운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쇼 진행자인 래리 킹은 그의 90회 생일에 연로함이 주는 유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는 ‘관대함’이라는 짧은 말로 대답했습니다. 나를 탄식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관대할 수 있고, 나에 대해 절망할 수 있는 사람은 삶이 주는 고통 중에도 오히려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과학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림자를 과거의 탓으로 돌리면서 모든 사람을 그림자의 희생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림자를 통한 유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림자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연필로 사용합니다. 그림자에 대해 담대한 용기와 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