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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6 “영성, 하나님의 선물”(마 5:3) na kim 201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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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6. 연약한 인생, 풍성한 은혜 7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영성, 하나님의 선물”(5:3)

 

내 안에는 비상하고자 하는 독수리가 있다. 또한 내 안에는 진흙탕에서 뒹굴고 싶은 하마가 있다.” - 칼 샌드버그

 

몇 주 전 주일 예배 설교를 나눌 때 여러분께 드린 질문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어떤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영광입니까? 들꽃의 찬양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까? 솔로몬의 영광이 함께 하는 교회입니까? 들꽃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입니까?”라고도 물었습니다. 다행히도 성도 여러분들이 질문하는 저의 의도를 잘 파악하셔서 들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좀 더 솔직해진다면 대답이 조금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대답은 어떻습니까? 솔로몬의 궁궐을 거닐며 들꽃차를 마시는 삶....” 혹은 솔로몬의 영광으로 빛나는 들꽃 향기가 나는 교회....” 대답이 마음에 드십니까?

 

성도와 교회의 영성, 즉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삶의 지향과 관련이 있습니다. 칼 샌드버그의 말처럼,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향해 비상하고자 하는 힘찬 날개 짓을 하는 독수리가 있는가 하면 이 땅의 황금빛 번득이는 진흙탕에서 마음껏 뒹굴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요즘 흔히 유행하는 말 중에 나는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영적이기는 하다.”라는 말은 이 두 가지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이 주는 규범과 질서에 대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과의 영적인 관계성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신으로부터 출발한 계시와 규범은 거추장스러운 반면, 나의 갈급함으로부터 출발한 영적인 필요는 채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 삶에 종교적인 간섭이나 규제가 없는 상태에서 무엇인가 신과 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고 싶고, 신과의 일정한 관계 속에 있음을 느끼고 싶고, 영적인 성장과 성숙을 인정받고 싶습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종교성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시는 위안

 

성 아우구스투스는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아담은 온 지면에 흩어져 있다. 이전에 한 곳에 있었으나 그는 타락했고, 그렇게 산산조각 난 그의 파편이 온 우주를 뒤덮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비는 사방에서 그의 조각들을 한데 모아 사랑의 용광로에 녹여 깨어졌던 연합을 다시 맞추었다.”

 

성 아우구스투스는 인간의 영적인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영적인 한계는 이미 내재 조건화되어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과 교만은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닌 모든 인류의 것으로 보편화되어 버렸습니다. 아담이 결국 에덴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인류 또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함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복된 소식을 준비하십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조각들을 모아 십자가라는 용광로에 녹이셨습니다. 사랑으로 불타는 그 용광로는 하나님과의 교통함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스스로 길이 되고, 스스로 용광로가 되고, 스스로 가장 잔혹하게 부숴진 조각이 되셔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인생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5:3)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평소 주님이 주신 말씀과 연결시키려면 오히려 육체적으로는 가난해도 심령이 풍성한 자는...”으로 전달되는 것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하고 힘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 정도로 표현되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텐데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가난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움츠리다, 굽실거리다를 의미하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부자가 되고자하는 마음조차 품지 못하고 움츠린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신이 노력하면 삶이 개선될 것이고 세상은 변화될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직 심령이 부자인 사람들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이미 바닥까지 내려가 버린 사람들, 어떻게 더 해볼 수 있는 도리가 없는 사람들, 그래서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그 어떤 희망도 품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 가능성을 이미 포기했습니다. 자기의가 없습니다. 자신을 의인으로, 성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미 마음이 너무 잘게 부숴져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다시 그 조각들을 모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복 있다말씀하십니다. 천국이 바로 그들의 것입니다.

 

2. 은혜를 의지하다.

 

요셉이 감옥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두 사람의 관원이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함께 꿈을 꿉니다. 요셉은 그들의 꿈을 해석했습니다. 떡 맡은 관원은 곧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은 곧 복직될 것입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이 그저 세월만 보내던 요셉에게 반짝 희망의 불꽃이 하나 튀게 됩니다. 술 맡은 관원이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부탁합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40:14-15)

 

5:3의 관점에서 보면 요셉은 아직 심령의 가난함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 의로움이 바로의 자비를 만나면 무엇인가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술 맡은 관원을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욥을 가장 괴롭힌 것은 상실도 아니요 질병도 아니요 친구들의 비난도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바로 자신이 끝까지 포기하지 못했던 자기의(/self righteousness)’였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희망을 짓밟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40:23) 요셉은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마음이 무너지고 부숴지는 경험을 합니다. 다 무너지고 다 부숴졌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바로가 꿈을 꾸고 바로가 요셉을 찾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아무리 손 내밀어도 그 근처조차 갈 수 없었던 바로인데, 하나님은 그에게 꿈을 주시고 요셉을 찾게 하십니다. 비로소 요셉의 삶에 희망의 빛이 비췹니다. 하나님이 그의 희망이 되시고 빛이 되셨습니다. 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욥의 자기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는 엎드려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5:3은 요셉과 욥의 삶에서 잘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서 어떤 희망도, 의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로소 하나님을 정확하게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하나님만을 앙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은혜와 자비, 하나님의 본심

 

흔히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을 통해서 드러내시는 것일까요? 그 마음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는 바로 은혜와 자비일 것입니다. 은혜란 우리가 하나님께 가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때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가슴이 품으셨다는 뜻입니다. 자비란 우리가 뉘우침과 회개를 고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랑을 프랜시스 톰슨은 묘사하기를 은혜란 하나님이 천국의 술래가 되어 밤낮 없이 쉬지 않고 우리를 추적하신다는 뜻이다라고 했습니다.

 

가장 진실되고 가난한 영성은 자신의 영적 노력을 의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용하며 거짓된 것인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하면 세상은 파도가 되고 장벽이 되어 우리를 가로막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한계는 더 깊은 감사와 감격의 이유가 됩니다. 파도인 줄 알았는데 우리를 돕는 물결이 되고, 장벽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 열리는 문이 됩니다. 우리가 고개를 돌리면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이 무엇인가 우리를 위해 가장 아름다운 것을 준비하고 앞서 가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장 그 어떤 것보다 뛰어나고 아름다운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즐거이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면 우리의 인생이 가장 아름다울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4. 영성의 본질

패디 차예프스키라는 미국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연극과 드라마에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 기드온(Gideon)’이라는 성경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있습니다. 기독교 저술가인 브레넌 매닝은 패티 차예프스키의 기드온을 보고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기드온은 무인지경의 광야 같은 천막 안에서 하나님께 버림받고 거부당한 기분이다. 하나님이 그의 천막에 불쑥 들어서시던 그 밤, 들불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기드온을 황홀하게 매혹하고 압도하여 살라 버린다. 그는 밤새 깨어 천막 안을 서성인다. 이윽고 먼동이 트자 기드온이 브루클린 유대인 억양으로 소리친다. “하나님, 오 하나님, 밤새도록 당신 생각만, 당신 생각만 했습니다. 나는 사랑의 환희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 내 천막 안에 당신을 모셔서 꼭 싸 놓고 나 혼자 독차지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오 하나님,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하나님이 대답하신다. “기드온, 너를 사랑한다.”

, 다시 말해주세요, 하나님

기드온, 너를 사랑한다.”

기드온이 머리를 긁적인디. “이해가 안갑니다. , 왜 저를 사랑하십니까?”

그러자 하나님도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신다. 나도 정말 모른다. 나의 기드온아, 때로 사랑이란 앞뒤가 없는 법이다.” - Brennan Manning, 사자와 어린양(복있는 사람, 1986), pp.67-97

 

영성이란, 나 자신과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이해한 다음 결단하고 실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성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믿음과 의지함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송사리가 호수의 구조를 이해해야 헤엄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연어가 태평양을 다 알아야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러기가 겨울철 남쪽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충동의 이유를 밝히 알고 날개짓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심령이 가난한 성도를 찾으십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간절히 소망하며서 자신의 의를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직 합당하지 않습니다. 더 기다려야 하고 더 버려져야 합니다. 부숴지고 무너진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성도를 하나님은 받으시고 교통하시며 은혜와 자비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함, 영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이 아름다운 선물로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설명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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