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이 무너질 때(고후 1:7-11) | na kim | 2014-09-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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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3. 연약한 인생, 풍성한 은혜 8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자신감이 무너질 때(고후 1:7-11)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7-11) 지난 주에 같은 지역에서 목회를 하시는 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이민 목회를 하면서 마음도 많이 상하고 몸도 많이 상하신 것 같았습니다. 비슷한 나이에 목회를 시작했고, 자녀들의 구성도 비슷했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이야기를 나눈 다음, 그 목사님이 제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다시 한번 교회를 개척하라고 하면 하실 건가요?” 저는 첫마디에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별 생각 없이 반응한 것이지만 저의 마음이 잘 드러나버린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아주 많이 고생했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보다 젊고 가능성이 많을 때는 용기를 내고 덤빌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다른 뜻을 보여주시면 순종할 것 밖에 없음을 압니다. 돌이켜보면 30대 중반, 그리고 40대 중반에 두 번 교회를 개척하셨던 저의 부친은 정말 용기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30대 후반과 40대 초반, 가족들과 함께 10년의 세월을 한 교회에 바치고 다시 바닥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단순하고 무모한 자신감과 용기였을까요? 목회자의 가정에 자라나서.... 저의 자녀들을 목회자의 가정에서 키우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우리 인생길 가운데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당당히 걷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한계를 만나다. 최홍만이라는 격투기 선수가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현역 선수입니다. 그런데 그는 최근 4-5년간 경기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경기에서 몇 번 거듭 패하다보니 자신감을 잃은 것입니다. 그는 중학교에 들어가기까지 키가 작고 왜소했다고 합니다. 친구들에게 맞고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중학교 2-3학년이 되면서 그는 한 달에 1cm씩 컸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자신이 키 크는 것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씨름으로 천하장사가 되었을 때 그는 218cm의 초대형 인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씨름에서 더 이상 성취할 것이 없었던 그는 입식 타격 격투기로 진출합니다. 승승장구합니다. 일본 스모 챔피언을 연달아 격파했고, 세계 최강이던 세미 슐트를 이겼고, 짐승이라 불렸던 밥 샾을 꺾었습니다.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듯 했고, 이기지 못할 적수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크고 느린 그의 약점은 쉽게 노출되었고 격투기의 강자들은 그의 약점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5연패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어느 T.V. 쇼에 나와서 고백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실은 두려움이 많은 사람입니다. 어릴 적부터 다른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맞는 것이 너무 싫고 아프다고 했습니다. 적당하게 해도 이길 수 있는 상대를 만날 때는 맞기 싫어서 주먹을 내밀었고 쉽게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대 전력이 높아지면서 본인이 맞아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마다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격투가의 마음에 두려움이 자리 잡는 순간, 승리를 그에게서 멀어집니다. 결국 그는 자신과 비교도 되지 않는 미들급의 미노와맨이라는 일본 그래플러에게 관절기술로 패배한 이후 지난 5년 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다양한 실패를 만납니다. 인생을 잘 알지 못할 때는 모든 시간이 내 것인 것 같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갖지만 살면 살수록 세상은 나보다 더 크고 힘이 강하며 나는 세상의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작은 실패가 거듭되면서 우리는 자신감을 잃게 되고 더 나은 삶을 향한 용기를 내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던 치기어린 자신감이 한계를 만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양자택일을 강요받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수 있고’,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더 이상 패배하지 않기 위해 싸우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전진하지 않습니다. 모험이 주는 위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새로운 일도 시도하지 않습니다. 자신감의 상실은 두려움과 체념의 삶을 살게 합니다. 맞기 싫어서 싸우지 않는 격투가 최홍만은 인형을 수집하면서 살고 있고, 실패가 두려워 전진하지 못하는 우리는 과거 속에 살게 됩니다. 2. 용감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 하지만 우리는 가끔 용기를 내기도 합니다. ‘용기’라는 덕목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의 삶에 가시와 엉겅퀴를 주시고 그것을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시는 수단일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겨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용기를 냅니다. 두려움과 체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환경을 이기는 용감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두려움과 염려 외에는 그의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모세를 대신할 수 있습니까?” 여호수아의 머리가 땅에 박혀들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를 허락하십니다. 바로 ‘용기’입니다. “두려워하지도, 염려하지도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 하나님은 군사도, 돈도, 권력도 주지 않으셨지만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미디안 족속과 싸워야 하는 기드온에게도 그랬고, 다윗의 왕위를 잇는 솔로몬에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문제를 이길 수 있는 용기있는 마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이 주는 어떤 고난과 고통 앞에서도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주신 하나님’(벧후 1:3)은 주님이 허락하신 것을 붙들고 세상을 넉넉하게 이기는 성도로 살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자신감을 상실한 교회와 성도에게 하나님은 용기있는 마음을 선물하십니다. 용기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3. 서로 어깨를 걸다. 하지만 그것으로 부족합니다. 아무리 용기를 내려고 해도 우리의 마음은 쉽게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사람에게 사람을 주셨습니다. 내 어깨가 자신감을 잃고 용기마저 채울 수 없을 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어깨에 내 어깨를 걸 수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날마다 죽음을 맛보며 광야를 헤매던 다윗에게는 요나단을 허락하셨고, 다시 애굽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모세에게는 아론을 주셨습니다. 두려워 떠는 제자들은 모이게 하셔서 서로 경쟁이 아닌 의지하고 돕도록 하셨고, 바울에게는 바나바와 실라를, 베드로에게는 누가를 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해 말합니다. 8절에서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이라 함은 루스더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던 경험(행 14:19), 빌립보에서는 귀신들인 여종을 낫게 했다가 주인에게 고소를 당해 감옥에 갇힌 경험(행 16:19-24), 에베소에서 데메디리오를 비롯한 우상을 만드는 은장색들의 소동과 폭동으로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의 곤경에 빠졌던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고난이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고후 1:8)라고 했습니다.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의 큰 고통(고후 1:8)이었습니다.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고후 1:9)고 할 만큼의 깊은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그 고통의 정도를 ‘큰 사망’(고후 1:10)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만일 그가 혼자 그 많은 고통의 여정을 견뎌야 했다면 그는 그 사망에서 헤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고난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고난 속에 혼자 버려짐’일 것입니다. 혼자 그 길을 가야 한다면 그는 스스로 포기하고 단념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늘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두 번째 편지를 쓰는 지금도 디모데를 비롯한 선교팀과 함께 마게도냐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의 모든 선교에는 동역자들이 함께 있어서 쳐진 그의 어깨를 북돋우며 꺾어진 무릎에 새 힘을 공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가 바울과 함께 했습니다. 그들은 위해서 기도하며 영적으로 교제하며 일꾼들을 파송하여 바울을 섬기도록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영으로 교제하던 그들은 서로를 도우며 격려하며 복음에 합당한 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할 때 우리는 오히려 고립됩니다. 내 연약함을 형제들에게 내려놓고 그들의 어깨를 기댈 수 있는 것 또한 큰 용기입니다. 연약함은 부끄러움이 아닌 연합의 필요를 발견하는 길입니다. 4. 도와주소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두 가지를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그들이 당한 고난의 현실의 치열함입니다. 죽음이 그들 곁에 있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그들 안에 살아 있는 ‘소망’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 ‘소망의 견고함’을 고백했습니다. 그 소망이 견고해질 수 있었던 것은 함께 하는 동역자들과 교회의 기도와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이 고난 가운데 죽음의 향기를 맡았다면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고후 1:9)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할 때 소망이 살아나며 그 소망이 우리의 삶의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10절의 사도 바울의 확신을 다시 묵상해봅시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10) 사망의 고통 가운데서 건지심을 맛본 사도 바울과 선교팀은 이후에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더욱 큰 용기와 자신감으로 복음이 명령하는 사명에 충성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바울은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12) 하나님께 함께 기도하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요, 그 결과 그들 모두는 어떠한 고난 앞에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성도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자신감이 한계를 만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어주십니다. 그 용기가 한계를 만날 때 우리의 어깨 옆에 다른 어깨를 허락하십니다. 그 어깨조차 힘을 잃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생명이 되십니다. 새로운 마음 가질 수 있도록 도우시고, 같은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은혜로운 선물 3종 세트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용기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 / 함께 어깨 걸 수 있는 성도와 교회 /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 이 세 가지 선물로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늘 감사하며 늘 기뻐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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