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 칠 때 떠나라!" | na kim | 2014-09-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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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7. 연약한 인생, 풍성한 은혜 9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박수 칠 때 떠나라!”(요 21:19-22) 인터넷이 발달하고 새로운 대인관계의 모델이 개발되고 있는 요즘, 재미있는 용어 하나가 등장했습니다. ‘관심병’(뮌 하우젠 증후군)이라는 단어입니다. 사실 이 질병은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실제로는 몸에 이상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자해를 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게으르거나 다른 목적으로 꾀병을 부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관심병을 가진 사람의 목적은 아픈 척과 역할에서 오는 다른 사람의 관심과 애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로 어린 시절 과보호로 인해 자립 능력이 떨어지거나 어려운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혹은 어린 시절의 정신적인 상처로 타인의 관심을 끄는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경우 발생합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리처드 애셔(Richard Asher)가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의 주인공 뮌 하우젠의 이름을 따서 1951년에 학계에 발표하면서 이것이 정신적 질병의 일종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관심병이 현실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경우는 좀 더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아픈 것이 아니라 누군가 아픈 사람을 극진히 간호하는 모습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칭찬을 얻으려고 합니다. 아이가 아프다면서 계속 병원을 들락거리는 어머니, 애완동물이 아파서 자신의 삶이 무너질 정도로 최선을 다해서 간호하는 주인,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면서 자신을 돌보지 못할 정도로 헌신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 정신적 질병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들의 목적은 자신이 헌신하는 대상의 증상의 호전이나 변화가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서 내가 받는 관심과 칭찬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나아가서 미국의 경영전문지인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사회적 뮌하우젠 증후군'에 대해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은 남자보다는 여성에게 많이 일어나며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서 조직과 관계에 나타납니다. 1) 한 사람이 다른 팀원들을 이간질하거나 갈등을 조장한다. 2) 그 사람이 해결사로 나서는 척한다. 3) 이 사실을 모르는 상사나 동료들은 그 사람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4) 결국 조직의 사기저하, 결속력약화, 생산성저하로 인해 조직은 죽어간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뮌하우젠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연기의 달인이고, 타인을 속이는데 능숙하며, 대체로 머리가 좋은 편이다. 그리고 사회적 지위가 낮지도 않고 지극히 동정 받을 상황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관심을 더 받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관심과 사랑에 대해 연약한 우리들이 함께 주의해야 할 사항입니다.
나를 환호하라! 여러분은 위에 설명 드린 뮌 하우젠 증후군 혹은 관심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질병은 우리에게서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인터넷 공동체인 ‘갈릴리 마을’에 칼럼을 연재했습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였고, 상담을 요청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알게 된 몇 기억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의 대학 선배였다는 한 여집사님을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제 여동생의 담임선생님이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갈릴리 마을에 들어가기 전부터 신앙이나 생활에 대한 상담을 해오셨고, ‘선생님’으로 불리던 분이었습니다. 소위 ‘내공’이 상담한 분이어서 저 역시 그 분의 의견을 존중했었습니다. 워낙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고 강력한 의견을 개진하셔서 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의도가 선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정말 문제가 많아 보이는 한 10대 후반의 자매가 갈릴리 마을에 나타났고, ‘선생님’은 그 자매에 대해 많은 의욕을 보였습니다. 상담자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 많은 개입과 간섭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을 하셨고, 결국 자기 딸로 입양했습니다. 그 선생님의 모든 고민과 결정은 갈릴리 마을에 거의 중계되다시피 했습니다. 정말 많은 갈릴리 마을 가족들이 그 선생님의 수고와 희생을 칭찬하고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상담자로서 저는 많이 걱정하고 반대했습니다. 의욕은 넘치되 잘못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메일로 반대 의견을 주고 받다가 결국 저는 ‘성령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사랑이 없는 목사’로 밀리고 말았습니다. 여러 사람의 비난도 받아야 했습니다. ‘선생님’의 가정에 그 자매로 인해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경찰이 개입했고, 파양되었고, 재판이 열렸습니다. 여러 언론이 그 사건을 보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어린 자매를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선생님’의 노력은 결국 큰 상처와 고통을 많은 사람에게 남겼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한 목회자를 갈릴리 마을에서 만났습니다. 미국 서부에 있는 분입니다. 갈릴리 마을에 많은 헌신과 수고를 하는 분이고 오랜 칼럼리스트이기도 했습니다. 늘 좋은 말, 선한 입장으로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신이 하는 사역을 자세하게, 그리고 헌신적으로 설명했었기 때문에 저 역시 그 분을 많이 존경했습니다. 마침 서부 지역에 집회가 있었고, 그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집회를 갔던 교회의 담임 목사님과 잘 아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갈릴리 마을을 통해서 알고 있는 그 분과 그 담임 목사님을 통해서 듣게 된 그 분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많이 놀랐습니다. 만일 그 분들이 하는 일이 인터넷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두 분은 다른 사람들이 몰라주고 환호해주지 않아도 그런 일을 했을까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 칭찬과 환호가 너무 중요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 인터넷 문화가 ‘좋아요’와 ‘추천수’에 목을 매는 것처럼 신앙생활에서도 ‘인정과 관심’ ‘사랑과 칭찬’이 너무 중요하게 보입니다. ‘뮌 하우젠’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2.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조금 전에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거듭 물으셨고, “내 양을 먹이라!”고 거듭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이미 함께 있었던 모든 제자들보다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늘 눈에 거슬리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보다 표현도 적고 일도 적게 하는 것 같은 제자, 하지만 주님 가까이에서 자신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제자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과 사명을 확인하는 그 자리에서 자신보다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에 대한 마음과 시선을 억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을 드립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인정과 사랑에 늘 목이 마른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제가...’라고 하는 말은 베드로에게서 반복되는 멘트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베드로의 열심과 관심을 많이 이해하고 수용하셨습니다. 문제는 베드로가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는 늘 더 많은 관심, 더 많은 인정, 더 많은 사랑을 갈구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의 이러한 성품은 제자들이 ‘누가 더 큰 자인가?’를 놓고 다투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더 많은 관심과 사랑, 인정과 칭찬을 받기를 원하는 일은 교회의 공동체성을 깨뜨리는 역할을 하는 일이 많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연약함을 극복하지 못할까요? 3. 인정받는 일에 실패하다. ‘모자람의 위안’을 쓴 도널드 맥컬로우 목사는 책에서 관심병의 원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청중의 박수를 원하고 또 필요로 한다. 유년기에는 특히 그렇다,. 다른 사람들의 존중은 내가 나를 존중하는 데 꼭 필요한 원재료다. 이미 1902년에 사회학자 C. H. Cooey는 ‘거울 자아’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자기 이해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나의 인식에 기초한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20세기 중엽까지 그냥 묻혀 있었는데, 이후 정신분석 이론들이 성격 형성에서 대인 관계의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연구가 왕성하게 진행되어, 이제 인간의 자아상이 타인들의 반응에 기초한다는 것이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타인은 부모다. 부모가 애정 어린 피부 접촉과 인정의 말을 통해 그들을 수용하고 있음을 전달해 주어야만, 자녀에게 건강한 자기 존중감이 발달된다. 이 외에 친척, 교사, 지도자, 동료들도 자아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정받을 때 우리는 스스로 세상의 한 자리를 차지할 가치와 자격이 있다고 느낀다. 인정이 없으면,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수치심에 짓눌리기 쉽다.” (도널드 맥컬로우, 모자람의 위안 (IVP, 2006) pp.133 맥컬로우 목사는 ‘인정받는 일’에 대한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자아를 인식하고 성장시키는데 인정을 받고 또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다만 성장하는 과정에서 1)충분히 인정받지 못했거나, 2) 잘못된 것을 인정받았거나, 3)인정을 받아야 할 부분에 대해 비판을 받았거나, 4)인정받는 일에 불평등을 느꼈을 경우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인정받는 일에 목말라하고 지나치게 관심을 받으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자아’를 인정받기를 원하면서 정작 다른 사람의 인정과 관심을 통해서 자아를 발견하려는 공허함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것 같은데 정작 다른 사람의 칭찬에 목을 맵니다. 자존감이 높은 것 같은데 정작 다른 사람의 사소한 비판에도 불같이 화를 냅니다. 잘잘못의 평가와 판단을 자신이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의존합니다. 결국 인정받는 일에 실패하면서 마치 패배자로 살게 됩니다. 4.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찾다. 우리는 언제 인정받는 일에 벽을 느낄까요? 아마도 때로 우리는 실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로 잘못을 범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나를 옳지만 내가 속한 사회적 관계가 부도덕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준이 다르거나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원래 그 사람이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일 수 있고, 나쁜 마음을 먹고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이유로 우리를 인정하지 않든, 그것은 나의 가치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인정받는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내 인생이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분명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우리는 오히려 중요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가로막고 있는 그들에게서 벗어나서 좀 더 넓고 다양한 환경 속에서 참된 나 자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기다워짐’의 은혜를 발견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고, 좀 더 해방된 자아와 인격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자기다워진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계획하신 독특한 한 개인이 되어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에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분명한 목적의식으로 살고 있고, 내 인생에서 그 목적의 성취를 경험할 때 나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판단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서로 협력하고 도울 수 있지만 그들의 평가가 나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그들의 좋은 평가가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 아니며, 그들의 나쁜 평가가 나를 넘어지게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늘 저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것처럼 보였던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내가 준 너의 사명에 충실하라.” 성도는 각자 주님이 허락하시는 삶의 분량이 있습니다. 사람의 평가와 판단이 아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치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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