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눅 12:13-21) | na kim | 2014-09-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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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24. 연약한 인생, 풍성한 은혜 10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눅 12:13-21) “그때 저는 '인간 안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을 생각해 냈습니다. 나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일을 이렇게 내게 계시해주시는구나 생각하니 저는 그만 너무 기뻐서 싱긋 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전부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무엇이 허락되어 있지 않은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당신들과 같이 살면서 일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나이가 찾아와서 일 년 동안 닳지도 찢어지지도 않을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문득 그 사나이를 쳐다보니 뜻밖에도 그 사나이의 등 뒤에 나의 동료였던 죽음의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 이외에는 아무도 그 천사를 보지 못했지만 저는 알고 있었죠. 그리고 채 날이 저물기도 전에 그의 영혼은 그에게서 떠나 버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사나이는 일 년 신어도 끄떡없는 구두를 만들라고 해지만 자기가 오늘 저녁 안으로 죽는다는 것은 모른다.' 그래서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을 생각해 냈습니다. ‘인간 안에 무엇이 있는가?’는 이미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자기 몸에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저는 두 번째로 싱긋 웃었습니다. 친구였던 천사를 만난 일도 기뻤으며 하나님께서 두 번째의 말씀을 계시해 주신 것도 기뻤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전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직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까지나 여기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최후의 말씀을 계시해 주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육 년째 되는 오늘, 쌍둥이 여자아이를 키우는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와 그들을 보게 되었을 때, 저는 엄마가 없더라도 두 쌍둥이는 잘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봐서 살려 달라고 부탁했을 때 나는 그 말을 정말이라 믿고, 아이들은 부모 없이 살아가지 못 한다고 생각했는데 타인이 엄연히 두 아이를 잘 기르고 있지 않은가.' 또한 저는 그 부인이 타인의 아이로 인해 눈물을 흘렸을 때 거기서 살아 계신 신의 그림자를 발견했고, 사람은 무엇으로써 사는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최후의 말씀을 계시하여 저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세 번째로 싱긋 웃었던 것입니다."
- 톨스토이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에서 톨스토이가 던지는 질문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하늘에서 떨어진 한 천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하늘에서 생명이 다한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가는 역할을 하는 천사였습니다. 하루는 그가 어린 쌍둥이를 혼자 키우는 어머니를 데려가야 했습니다. 얼마 전 사고로 남편을 잃고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를 데려갈 수 없었던 그는 하나님께 불복합니다. “산모(産母)의 영혼을 빼올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나무에 깔려 죽고 부인은 방금 쌍둥이를 낳고서 제발 영혼을 거두어 가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발 자기 손으로 아이들을 키우게 해 달라면서 어린아이는 부모 없이는 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산모의 영혼을 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시 내려가 산모의 혼을 거두어라. 그러면 세 가지 답을 알게 되리라.” 그는 산모를 천국으로 데려갔고, 자신은 이 땅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이 그 천사에게 주신 세 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의 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2)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실 이 세 가지 질문들은 톨스토이가 자신의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던지고 있는 질문들입니다. 그는 19세기 중반 봉건 러시아의 지식인으로 살면서 소수의 영주들에게 집중된 부와 수많은 농노들의 핍절한 삶에 가슴 아파했습니다. 신실한 성도였던 그는 심지어 교회조차도 봉건 영주의 편에서 부와 향락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분개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허락하신 것은 재물이 아닌 사랑이며 섬김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단편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한 천사의 음성을 통해서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구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요?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은 무엇이고,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2. 유산을 나누게 하소서! 우리가 읽은 본문은 3부분으로 나뉩니다. 그 첫 번째는 예수님에게 다가온 한 청년의 질문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한 청년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부모가 남긴 유산 때문에 형님과 분쟁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선생님, 내 형님에게 명령하셔서 부모님이 남긴 유산을 나눌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아마도 동생은 형이 동생보다 2배의 유산을 받도록 되어 있는 유대의 법을 인정할 수 없었거나, 형이 그것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재산을 독식하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재산 분배의 문제를 정확하고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에게 14-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4-15)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한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 부자는 꽤 부지런하고 자신의 재산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악하거나 부도덕하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동하고 넉넉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어느 해 가을, 부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넘치도록 추수를 했고, 곡간을 더 지어서 재물을 쌓아둘 계획을 세웠습니다. 모두가 그를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그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눅 12:2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 12:20) 이어서 예수님은 부자의 삶을 해석하시기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1)고 하셨습니다. 다시 처음 질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 청년이 질문은 해결되었을까요? 3. 돈, 선과 악 사이에서 우리가 재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몇몇 말씀이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감독은)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딤전 3:3) 성경적인 관점에서 돈의 문제를 바라보려는 성도들은 아주 일반적인 두 가지 실수와 만나게 됩니다. 첫째는 돈에 더욱 집착하는 것이며, 둘째는 돈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 세상에 살면서, 특히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를 살면서 돈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돈은 힘입니다. 돈은 능력입니다. 돈은 때로는 삶의 목표가 되며, 좌절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돈에 집착하는 것은 돈의 노예가 되어 숭배하는 태도라면, 돈을 애써 무시하려는 태도는 돈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돈에 인격성을 부여하여 그것이 가진 영적인 지배력을 경계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여기서 ‘재물’로 번역된 아람어 원어는 ‘맘몬’으로 ‘돈’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돈을 하나님 섬기듯이 섬길 수 있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관점에서 돈은 악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돈, 즉 물질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이자 선물입니다. 성경은 돈을 악하다 말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거나 숭배하려는 사람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4.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다시 예수님을 찾아온 청년의 요구에 주목해 봅시다. 그는 지금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님으로부터 영적 권위를 느낀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떤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의 기대는 그가 당면한 물질의 문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물질의 문제에 대한 집착은 예수님이 전하는 천국 복음에 대한 그의 접근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답은 가장 먼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연설명하시기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생명’이란 생명 그 자체를 말한다기 보다는 ‘가장 소중한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한 것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모든 탐심’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탐심의 도덕성을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합법과 불법, 도덕과 비도덕을 막론하고 탐심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려주신 이야기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그는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어리석다고 부르는 이유는 눅 12:20에서 예수님께서 그를 설명하시기를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라고 하셨기 때문이지, 우리의 상식으로 그는 오히려 자신의 소유를 더욱 풍성하게 만다는 지혜와 성실함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유산에 대한 요청을 한 청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유대의 상속법에 대한 불만 혹은 형님에 대한 불만을 해결하고자 할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어리석다’고 말씀하셨고, 마음과 삶의 변화를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어리석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 주신 수단과 목표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재물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도구입니다. 비옥한 밭, 잉여 수익, 큰 창고, 수익성 높은 재테크, 노년을 위한 준비 등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살면서 누려야 할 일반 은총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행복이라는 밭’을 경작하기 위해 허락하신 것이 ‘재물이라는 쟁기’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수단과 목표의 우선순위를 바꿉니다. 재물이라는 쟁기가 없이는 행복이라는 밭을 일구지 못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보다 많은 쟁기를 확보하는데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여 정작 밭을 황폐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산의 상속문제로 형님과 분쟁하는 동생, 넘치는 재물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 생각했던 부자... 그리고 우리들 모두는 이 첫 번째 어리석음의 범주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쟁기에 관심이 있습니까? 밭에 관심이 있습니까? 그들의 어리석음의 두 번째 우리는 그들이 시간에 대한 준비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미래’를 준비했지만 ‘영원’을 준비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미래를 행복하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미래는 하나님의 영원 앞에 무너집니다. 당장 내일이라는 미래도 그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앞에 자신의 안락한 삶을 위해 유산의 상속권을 주장하는 청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만드는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영원함에 대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요? 성도와 교회는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삶을 해석하시되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과 기쁨을 즐거운 마음으로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앞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통한 복되고 감사하는 삶을 살 때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며, 우리가 그 기쁨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쌓은 재물’이 ‘모든 탐심’과 관계있다면,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은 솔로몬의 모든 영광보다 더 아름다운 들꽃의 찬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쟁기를 모으느라 밭을 잃는 어리석은 농부가 아닌 허락하신 쟁기로 행복의 밭을 풍성하게 일구는 지혜로운 성도와 교회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그곳에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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