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과 자유 사이’(신 34:4-12) | na kim | 2014-10-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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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8. 연약한 인생, 풍성한 은혜 12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책임과 자유 사이’(신 34:4-12) “나는 내 과거를 바꿀 수 없었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통제할 수 없었고, 잘못된 것들을 다 고칠 수 없었다. 과거에 고통스러웠던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이 치유해 주셔야만 한다. 다른 사람들이 아직도 내게 화가 풀리지 않았다면, 계속 분노를 품고 살거나 이겨내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아직도 깨진 것들이 있다면, 그 깨진 파편들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모자람의 위안, 도널드 맥컬로우/IVP, p.199 몇 년 전, 상담 사역에 열매가 보이기 시작하고 목회에도 재미가 붙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선배 목사님 한분이 저희 집을 방문했습니다. 아침 식사를 제가 좋아하던 식당에서 대접하려고 집을 나서던 때였습니다. 갑자기 어지러워지면서 몸의 균형을 잃고 말았습니다. 제 인생에서 저의 몸으로 처음 경험하는 묘한 느낌이었습니다.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은 말짱한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길게 느껴졌지만 사실은 몇 초 만에 다시 몸을 일으켰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선배 목사님이 제가 일어나도록 도와주시면서 처음 던진 말이었습니다. “응도 니 생명 보험을 들어 있나?” 저는 그 이후로 건강검진을 해봤구요, 그리고 꽤 보장이 많이 되는 생명 보험을 들었습니다. 물론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건강에 별 이상은 없습니다. 과로하지 않으면 되고, 저 자신을 조금 돌보면 되는 문제였습니다. 책임질 수 있을까? 사실 그 선배 목사님의 질문이 제 마음에 다가왔던 것은 아주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신학교를 함께 졸업했던 동기 목사님들 중에서 벌써 소천하신 분이 있고, 사모님을 먼저 떠나보낸 분도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목회를 그만 둘 수밖에 없는 분들도 있고, 아예 제대로 시작도 못해본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좋은 교회, 좋은 성도들과 함께 목회를 하고 교회를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짧은 순간 위기를 경험하고 보니 가장 먼저 생각되는 것은 역시 가족들이었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목회자와 다시 시작하면 될텐데, 가족은 저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제 가족과 제가 섬겨야 할 하나님이 주신 사람들에 대해 좀 더 많은 고민과 더불어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가 아무리 책임을 지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들과 할 수 없는 때와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도널드 맥컬로우 목사가 고백하는 대로, 우리는 이미 책임질 수 없는 수많은 일들과 부대끼며 살고 있습니다. 책임지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일들도 많습니다. 그 중에서는 오히려 책임을 지지 말아야 하고,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일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2. 성장을 위한 책임감, 성숙을 위한 한계의 수용 우리는 어려서부터 ‘책임’에 대한 감각들을 배우고 익힙니다. 내가 맡은 일을 잘 마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잘 만들어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해주지 않아도 자신의 삶의 영역을 잘 정리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습니다. 오랜 시간 그렇게 책임감을 배우고 실천하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성장해 있습니다. 어느새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을 의지하고 있고, 일과 관계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되는 일들이 생기게 되고 내가 아니면 안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가 성장하기 위해 책임감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었다면, 이제 나는 얼마나 더 얼마나 많이 책임을 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때 우리는 또 하나 우리의 인생에서 학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책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세상의 문제들을 자원해서 짊어지고 해결하고 싶어도 내가 하지 말아야 하고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로소 우리의 삶이 성장의 단계에서 성숙의 단계로 전환하게 됩니다. 우리는 책임을 수용하면서 성장하지만 한계를 수용하면서 성숙하게 됩니다. 우리의 한계를 수용하는 일은 두 가지 이유에서 쉽지 않습니다. 첫째는 내가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이며, 내가 아니면 그 일과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을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책임이란 무거운 짐이면서도 우리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중심에 있기를 원하고, 보다 많은 일을 결정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일이 많다고 불평하면서도 그 일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협력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도 정작 그 일을 독점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둘째는 두려움과 불안함 때문입니다. 대부분 내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일들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일들, 내가 평생 일군 가치들은 모두 나의 책임의 영역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런 것들에 대한 책임을 놓는 순간 내 삶의 가치도 함께 무너지는 것 같고, 그것들에 대한 사랑과 의무를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그 대상을 걱정하고 염려하며 잘못될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3. 모세가 만난 경계(境界) 신명기 마지막 장은 모세의 죽음과 여호수아의 사역의 시작을 소개합니다. 모세는 정말 자신의 삶을 다 바쳐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했지만 정작 요단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자신의 모든 사역을 여호수아에게 인계해야 합니다. 모세의 시대와 여호수아의 시대를 긋는, 보이지 않는 가녀린 경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호하고 분명합니다. 이 시기에 모세가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모세가 해야 하는 일은 이스라엘과 후계자 여호수아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당부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축복하는 일입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맡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지 말아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맡기시는 일을 대신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미 가나안 시대는 여호수아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모세가 넘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모세에게 허락되지 않은 시간, 모세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사역의 한계를 정하셨던 시기에 모세의 육체적인 능력에 대한 묘사를 잊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능력있는 지도자였습니다. 더 많은 일을 더 오래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에 대해 오해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모세도 경계를 분명하게 지킵니다. 모세가 하지 말아야 할 일들과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경계는 단호하고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여정’의 작가이면서 탁월한 기독교 문필가였던 프레드릭 뷰크너(Fredrick Buechner)에게는 거식증에 걸린 딸이 있었습니다. 목회자인 자신이 아사직전의 딸을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 괴로워하던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아비 노릇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딸을 돌보는 것이었고, 필요하다면 천지를 움직여서라도 딸을 건강을 되찾아 주는 것이었지만, 내 아버지가 나를 돌보실 수 없었던 것처럼 나도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내게는 딸을 건강을 찾아 줄 지혜도, 능력도 없었다. 그렇게 다른 인간을 변화시킬 능력은 우리 중 누구에게도 없다. 만일 있다면, 그것은 끔직한 능력, 설령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라 해도 결국 상대의 인격을 침해하는 능력이 될 것이다. 우리가 찾아간 정신과 의사들 말로는, 나는 딸을 고쳐줄 수 없다고 했다. 내가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가 해 보려는 시도를 중단하는 것이었다. 마음속으로는 그 말이 맞는 줄 알면서도, 절박한 간섭의 광기, 뭔가 해보려는 광기는 그치지 않았다. 내 모든 말과 행동은, 자유를 찾겠다는 딸의 결의를 더 굳혀 줄 뿐이었다. 딸은 다른 모든 것 중에서도 특히 내게서 자유로워지려 했다. 딸이 다시 건강해질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자유로 건강을 선택하는 것뿐이었다. 아비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뒤로 물러나 딸에게 그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딸이 그 자유로 삶 대신 죽음을 택할 수도 있다는 모험까지 감수하면서 말이다.” (Fredrick Beuchner, Telling Secret, p.26-27) 때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뒤로 물러나 다른 사람의 선택과 책임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의 연약함에 대해 변명하고 싶은 욕구를 자제해야 합니다. 비행을 저지르는 자녀의 행동을 여러 가지 말로 합리화해주려는 시도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녀의 선택과 판단을 대신해줌으로 자녀에게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려는 시도 또한 포기해야 합니다. 내가 하면 더 잘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하면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정말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대신 수고해주고 결정해 주려는 모든 노력들은 절제되어야 합니다. 경계가 필요합니다. 4. 한계에서 시작되는 두 가지 자유 책임과 능력에 대한 한계를 인정하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중요한 자유가 찾아옵니다. 첫 번째 자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선택의 자유입니다. 때로 그것이 다소 불편하거나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하더라도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자유의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선택해야 책임을 집니다. 내가 그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선택을 대신할 때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참된 책임을 질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스스로 성공하고 실패하고, 스스로 교훈을 찾고 자신의 삶의 지혜로 만들 수 있도록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내가 책임감을 통해 성장해온 것처럼,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요, 삶의 경계를 통해서 성숙함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의 자유는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관계하고 있는 모든 일과 사람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것은 내 삶에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시도와 같습니다. 나아가서 자신이 하나님이 아닌 줄 알면서도 ‘책임’이라는 말을 통해 control하려 한다면 결국 나는 ‘미치거나 속이거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걱정하고 분노하고 결국 정서적인 위기의 반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혹은 나는 할 수 있다고, 상대방도 그것을 좋아하고 서로에게 유익하다고 스스로를 속이게 될 것입니다. 책임에 대한 나의 한계를 인정하면 비로소 나와 그 일, 나와 그 사람 사이에 적절한 공간이 마련됩니다. 그 공간은 자유의 공간이며 바로 하나님의 일하시는 영적인 공간입니다. 그 또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나의 개입과 간섭을 포기하고 그에게 참되고 영원한 아버지가 계심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나는 자유하게 되고, 나의 자유는 나의 책임의 대상들을 자유하게 할 것입니다. 그 자유의 공간은 하나님께 맡겨지게 될 것이며, 성령은 마음껏 역사하실 것입니다. 자신의 평생을 바쳐서 인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 앞에서 떠나보내는 모세의 심정을 생각합니다. 나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그들을 맡기시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무척이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이 그어 놓으신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였을 때 그도, 여호수아도, 이스라엘도 자유를 얻습니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 편히 잠들게 되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시대를 살게 됩니다. 책임의 한계, 영적 성숙으로 가는 우리가 반드시 걸어야 할 길입니다. 책임진다는 말로 우리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자리를 빼앗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를 영원히, 무한히 책임지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 책임의 자리를 내려놓고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믿음과 용기가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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