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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즐거움, 즐거움의 한계’(전 12:13) na kim 201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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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2. 연약한 인생, 풍성한 은혜 14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살아가는 즐거움, 즐거움의 한계’(12:13)

 

아이가 연신 다릿짓을 하는 것은 생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넘쳐흘러서 그렇다. 아이들은 생기가 넘치고 마음이 강렬하고 자유롭기 때문에, 뭐든 바뀌지 않고 되풀이되기를 원한다. 아이들은 늘 다시 해주세요.”라고 말한다. 어른들은 다시 하다가 거의 죽을 지경이 된다. 어른들은 단조로움을 기뻐할 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하나님은 단조로움을 크게 기뻐하실 만큼 강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아침마다 해에게 다시 하라!”, 저녁마다 달에게 다시 하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다. 모든 데이지 꽃이 똑같은 것은 자동적 필연성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하나님이 데이지 꽃 하나하나를 따로 지으시면서 절대로 그 일에 지지치 않으시는 것일 수도 있다. 그분께는 영원한 유년의 욕구가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죄를 지어 늙고 말았지만, 우리 아버지는 우리보다 젊으시다. 대자연 속의 반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예술적 재현일 수 있다.“

-The Oxford Dictionary, William Cowper/Oxford, 1997 p.165

 

가일이를 첫 아들로 키울 때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참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제가 지어내서 만든 메뚜기 마왕대장과 수퍼맨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일이가 착한 어린이로 자라지 못하게 하고,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방해하는 나쁜 메뚜기 마왕대장을 통쾌하게 물리치는 수퍼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수퍼맨이 가일이더라....라는 항상 똑같이 반복되는 이야기입니다. 수백 수천번을 들었을 그 이야기를 가일이는 매번 긴장감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듣고 또 들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수퍼맨이 등장할 때 빰빠밤바밤~~’ 하고 음악을 들려주면 주먹을 앞으로 뻗고는 수퍼맨 흉내를 내기도 했습니다. 가일이와 저는 아들로, 아버지로 그렇게 컸습니다.

 

살아가는 일에는 참 즐거운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야말로 깨알 같은 즐거움들을 우리 인생의 길목마다 숨겨놓으시고 찾아서 맛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때로 그 즐거움은 내 입안에서 쓴 모래알로 변하기도 하고, 소화되지 않는 거친 음식이 되기도 합니다. 혹 어제 맛있었던 즐거움이 오늘은 다른 맛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람이 느끼는 즐거움은 다양한 한계를 만나게 되고, 그 과정 속에서 사람은 성장하고 발전합니다. 물론 가일이는 지금 수퍼맨 놀이를 즐기지 않습니다.

 

즐거움을 선택하라.

 

요즘 직업을 선택할 때나 인생의 목표를 정할 때 그 기준에 즐기는혹은 좋아하는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천재가 노력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즐거워할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어 보입니다. 즐거움은 우리 인생의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현대 문화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사업을 선택하는 10가지 기준을 제시하면서 첫 번째로 “make sure you do what you enjoy. It's hard to be productive without the obsessive passion.”라고 권했습니다. 본인이 즐길 수 있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일 아니면 열정에 사로잡힐 수 없고, 열정이 없이는 생산적인 사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즐거움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성장하고 변화합니다. 한 때 즐거웠던 일이 더 이상 즐겁게 다가오지 않는 일은 늘 발생합니다. 취미가 바뀌고 입맛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뀝니다. 그렇게 즐겁고 의미 있게 여겨지던 일들이 지루하고 값없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즐거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는 즐거움 자체가 가진 한계일 수도 있고, 그 즐거움을 취하는 사람에게서 오는 한계도 있습니다. 한 때의 즐거움이 그치게 되고, 우리는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서 분주해집니다. 세상이 급속하게 바뀌고 있고, 즐거움의 대상도 내용도 바뀝니다.

 

2. 한계를 만날 때...

 

우리가 즐거움의 한계를 만나는 원인을 생각해 볼까요? 즐거움의 끝그것은 때로 포만감 이후에 오는 식욕 저하와 비슷합니다. 무엇인가의 결핍에 허덕일 때는 하나씩 채우고 경험하는 것이 즐거웠지만 결핍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더하거나 채우는 것이 무겁게,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최근 즐거워하던 일의 한계를 만나신 적은 없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도서의 솔로몬은 즐거움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선물을 받은 사람이었고, 고백한 것처럼 그는 그 모든 선물을 자신을 즐겁게 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 자신의 능력과 시간과 관계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사람이라면 누리고 싶은 행복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다시 고민에 빠집니다. 즐거움은 채워도 끝이 없고, 아직 채우지 못한 즐거움이 자신의 인생의 시간의 한계를 만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도서를 통해서 과연 무엇이 인간의 참된 만족과 즐거움의 열쇠인지를 고민합니다. 그래서 12:13에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일의 결국은 포괄적입니다.

 

3. 하나님의 성실하심

 

만일 저에게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아마도 저는 반복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좋은 말로 제가 창조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실은 성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는 것, 변화가 없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은 다릅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같은 놀이를 끊임없이 계속하자고 요구합니다. 아이들이 금방 했던 이야기를 잊어서일까요? 조금 전에 했던 놀이를 망각했을까요?

 

생각해보면 하나님만큼 지루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매일 해를 동쪽에서 띄워야 하고, 매일 같은 별들을 하늘에 심어야 합니다. 매일 밤과 낮을 바꾸셔야 하는데, 그 일을 창조 때부터 하셨고 이 세상을 마감하실 때까지 하셔야 합니다. 조금의 오차도, 조금의 멈춤도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가장 창조적인 분이 조금의 변화도 없이 우주를 반복해서 움직이시는 일에 헌신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지겨우실까요?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얼마나 지겨우실까요? 사람들은 늘 범죄합니다. 각각 다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비슷합니다. 연약한 사람들, 이기적인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죄와 악의 패턴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비난하고 비판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도와주고 협력해서 세워주면 다시 넘어집니다. 조상 때도 그랬고 후손도 그러하며 수천년 전 이스라엘이 그랬는데, 오늘날 한국 교회가 그렇습니다. ‘으이그.... 이 지겨운 군상들....’ 이라며 한숨 쉬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넘어서시는 분입니다. 솔로몬은 일의 결과를 경험하고 들어야 알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일의 미래를 아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충성을 맹세하고 헌신을 다짐합니다. 좀 있으면 배반하고 좀 있으면 우상을 섬길 것이고 좀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떠나서 자신의 생각대로 살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척 합니다. ‘제발 좀 뻔 한 일 그만해라...’는 말이 하나님의 입가에 맴돌지 않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그 성실하심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피조세계로부터 즐거움을 느끼시는 일에도 지치지 않으십니다. 성도와 교회의 변화를 기뻐하시고 기대하십니다.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의 기쁨이 될 자격이 있고, 기대의 대상이 될 만한 결과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어리지만 교회와 성도의 성장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스스로의 기쁨을 얻으시는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단순한 반복이 아닌 목적 있는 하나님의 역사(歷史)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해가 뜨는 일, 별이 뜨고 지는 일은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평생에 변함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의 시간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모든 반복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역사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짧은 인생을 사는 인류가 파악하고 분석할 수 없는 변화들이 영원한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 반복을 통해 지속적 변화를 만드시고, 그 속에서 피조세계로 말미암은 즐거움을 오늘도 창조하고 계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쉽게 즐거움의 끝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영원이 아닌 점의 인생을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짧고 간결한 점 안에 우리 인생이 경험하고 누리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성급하고 단순하게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하나님!

 

인생의 즐거움에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쉽게 지치고, 즐거움의 대상 또한 우리를 지속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또 다른 즐거움을 추구하는 일에는 신비와 기쁨도 있을 수 있지만, 고통과 추구 자체의 한계를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이 때 우리는 중요한 발견과 결단을 해야 합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다 지칠 때, 나의 가장 깊은 갈구와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것은 결국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초월적인 즐거움의 근원을 찾으려고 합니다. 나의 즐거움이 목적이 아니라 초월적인 즐거움을 만남으로 나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각 나라와 문화에서 철학이 생기고 종교가 생깁니다. 솔로몬의 한계, 사람의 한계는 바로 여기까지였습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고 불리는 이어령 교수는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통해서 자신이 결국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과정을 고백합니다. 인생의 모든 즐거움이 다할 때 사람을 자신을 지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가 노년에 사랑하는 딸을 잃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고백한 시가 있습니다.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1)

 

하나님, /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촛불 하나 올린 적이 없으니 / 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 어떻게 저 많은 별들을 만드셨습니까

그리고 처음 바다에 물고기를 놓아 / 헤엄치게 하셨을 때 / 저 은빛 날개를 만들어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를 때 / 하나님도 손뼉을 치셨습니까

 

! 정말로 하나님 / 빛이 있어라 하시니 거기 빛이 있더이까

 

사람들은 지금 시를 쓰기 위해서 / 발톱처럼 무딘 가슴을 찢고

코피처럼 진한 눈물을 흘리고 있나이다

 

모래알만 한 별이라도 좋으sl / 제 손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아닙니다.

하늘의 별이 아니라 / 깜깜한 가슴속 밤하늘에 떠다닐 / 반딧불만한 빛 한 점이면 족합니다.

 

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 때묻은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것을 저 무지한 사람들의 / 가슴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2)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닙니다. / 어렴풋이 보이고 멀리에서 들려옵니다

 

어둠의 벼랑 앞에서 / 내 당신을 부르면 / 기척도 없이 다가서시며

"네가 거기 있었느냐" / "네가 그 동안 거기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달빛처럼 내민 당신의 손은 / 왜 그렇게도 야위셨습니까 / 못자국의 아픔이 아직도 남으셨나이까

도마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나도 / 그 상처를 조금 만져볼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혹시 내 눈물방울이 그 위에 떨어질지라도 / 용서하소서

아무 말씀도 하지 마옵소서 / 여태까지 무엇을 하다 너 혼자 거기에 있느냐고 / 더는 걱정하지 마옵소서 / 그냥 당신의 야윈 손을 잡고 / 내 몇 방울의 차가운 눈물을 뿌리게 하소서

이어령 교수는 자신이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던 딸 이민아 목사의 죽음을 접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어떤 의미 있는 죽음도 아픈 삶만큼 못하다.” 그는 딸의 죽음 앞에서 자신에게 있던 모든 즐거움의 한계를 뼈저리게 경험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의 끝에서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시선과 자신의 한계가 만나는 지점, 그곳에서 그는 엎드려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시작합니다. 비로소 그가 누리던 즐거움의 끝이 새로운 시작을 만나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즐거움의 한계는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출발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연약한 인생의 즐거움이 우리의 가치를 두고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인생이 없습니다. 가볍고 일시적인 즐거움을 선으로 삼는 우리 시대의 문화 속에서 마르지 않는 신적(神的)인 즐거움의 샘을 우리의 삶 깊은 곳에 심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참된 즐거움이 있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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