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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감각 이상의 존재(고후 4:16-18) na kim 201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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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3. 연약한 인생, 풍성한 은혜 15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사람, 감각 이상의 존재(고후 4:16-18)

 

주변 세계의 축소는 내명 세계의 성장을 독려할 수 있다. 비록 이 한계는 우리를 죽음에 더 가까이 데려가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온전하게 경험할 사실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바로 죽음 속에도 삶이 있다는 사실이다.”

- 모자람의 위안, 도널드 맥컬로우, IVP p.229

 

오늘 오전에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외할머니께서 소천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올해로 99세 되신 할머니, 최근에 좀 건강이 좋지 않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어제 저녁 식사까지 편하게 하시고, 평안하게 부르심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수요일 말씀을 준비하는 내내 마음이 많이 울렁거립니다. 거제도에 있던 마음의 고향과도 같았던 외갓집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할머니는 참 사랑이 많았던 분이셨고,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한 달만 더 사시면 100세까지 사셨을텐데...라며 어머니와 농담 아닌 농담을 했습니다. 모든 장례의 절차가 은혜 가운데 마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감각할 수 있음은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 가진 오감(五感)은 삶을 유지하고 세상과의 교감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살아가는 즐거움을 취하는데도 큰 역할을 합니다. 요즘은 마음의 직관적 느낌을 강조하는 육감(六感)을 강조하기도 하고, 성도들은 하나 더 붙여서 영감’(靈感)을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 바꾸어 말하면 그것이 없으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은 여러 가지 감각을 잃으면 생명을 잃는 것일까요?

 

1. 먹는 즐거움을 아십니까?

 

소믈리에라는 직업이 있습니다. 그들은 포도주의 맛을 감별하고 가치를 구별합니다. 고객의 입맛과 기호에 맞는 포도주를 추천하고 구매와 저장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일반인들은 구별할 수 없는 맛의 미묘한 차이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맛에 대한 특별한 감각을 타고나는 경우도 있고, 부지런히 개발해서 얻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어릴 때 동물들이 들판에서 나는 풀을 먹는 것을 보면서 신기하게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먹을 수 없는 풀을 어떻게 이렇게 맛있게 먹을까 하는 것이 어린 저의 의문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혀에는 1만 여개의 미뢰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각 미뢰에는 50여개의 세포가 신경 단위를 통해서 뇌에 정보를 전달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는 약 2만 여개, 토키는 17천 여개의 미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토끼나 소는 사람이 풀에 대해서 느끼지 못하는 특별한 맛을 혀로 느끼면서 맛있는 식사를 즐길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보면서 왜 이렇게 맛있고 신선한 풀을 즐기지 못하고 깎고 벗기고 끓여서 먹느냐고 조롱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즐거움 중에 하나는 먹는 즐거움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설명하실 때 다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에 비유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도 사람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먹고 마시는데 있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 같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함께 나누는 식사를 강조하고 그 시간을 통해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습니다.

 

2. 감각은 후퇴합니다.

 

하지만 먹는 즐거움도 식어질 때가 있습니다. 가끔 몸이 아프거나 충격과 스트레스를 받을 때 우리는 소위 입맛을 잃습니다. 감각하는 즐거움이 쇠퇴한다는 것, 오히려 감각이 괴로움이 될 수 있다는 경험을 우리는 사는 중에 하게 됩니다.

 

저는 요즘 시력의 감퇴를 많이 느낍니다. 미국 와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눈으로 알러지를 심하게 앓은 결과라고 위안을 삼았지만 실은 노안이 온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습니다. 발광(發光)하지 않는 글을 읽는 일이 많이 불편합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눈이 적응해서인지 책 읽는 일이 점점 불편해지고 편지의 작은 글씨는 자꾸 무시하게 됩니다. 손에 잡히는 곳에 reading glass가 없으면 읽는 일을 포기해버리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감각의 쇠퇴를 경험하지 않으십니까? 감각의 한계를 느낄 때 여러분은 마음에 어떤 울림을 가지십니까? 그것은 슬픔입니까? 아픔입니까? 체념입니까? 감각의 쇠퇴에 대한 저의 느낌은 약간의 불편함과 함께 오는 경이로움입니다. 삶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방에 불빛이 조금 어두워진다고 해서 구조물이 바뀌지는 않는 것처럼 제가 느끼는 감각이 조금 둔해졌다고 해서 제가 사는 세상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다만 좀 불편하고 좀 힘이 들 뿐입니다. 저의 오감이 그 능력을 조금씩 잃어갈 때 내 안에서 무엇인가 삶의 두께와 깊이를 더하는 것이 꿈틀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만날 때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경이감’(驚異感)입니다. ‘이게 뭐지?’에 해당하는 이 감정은 세상을 새롭게 만나고 배우는 가장 큰 감정적 통로일 것입니다. 자녀들의 행동의 발달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반응하는 부모를 통해서 자녀는 또 자신을 발견하고 성장시키기도 합니다. 이렇게 경이감은 사람의 성장에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어느새 세상에 대한 경이감이 사라질 때가 있습니다. 외부 세계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모든 것에서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바로 그때 우리 안에 생기는 또 하나의 감각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능력이 쉽게 간과할 수 있고 무시되기도 한다는 것 입니다.

 

3. 날로 새롭도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를 통해서 육체적 감각의 한계와 그 한계를 넘어서는 세계를 소개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고통과 핍박의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그는 날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다시 분쟁 중에 있었고, 그 분쟁이 핵심은 세상적인 분파의식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주의적 기독교가 가장 강력했던 힘을 발휘하고 있는 지역이 고린도였고, 그들은 교회를 통해서 자신들의 만족을 구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면서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수습하는 과정에 고린도전후서를 기록하게 됩니다.

 

그는 수차례에 걸린 전도 여행 가운데 지치고 힘든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이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고, 연약하게 부숴 질 질그릇’(고후 4;7)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이제 연로한 사역자로 날로 후패해지고(waisting away) 있다고 고백합니다. 겉사람이 날마다 후패해진다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16절을 다시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고후 4:16) 우리의 겉사람이 날로 허물어져감을 느끼면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가?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롭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다음 말씀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0-11)

 

그는 새로운 경이감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를 위해 헌신할수록, 복음을 들고 세상에 나갈수록, 핍박과 고난이 극심할수록 그는 자기 안에 차오르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느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랄하고 생동감 넘치는 새생명이 점점 후패해지는 자신의 삶 안에 가득 차오름을 느낍니다. 새생명의 향기가 관계를 통해서, 사역을 통해서, 그가 만나는 새날을 통해서 넘실거립니다. 그는 날로 새로운 삶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생명의 삶, 어쩌면 날이 갈수록 주님의 품으로 더 가까워지는, 더 어린아이와 같은 영적 경이감으로 살아가는 삶일 수 있습니다.

 

4. 사람, 몸 이상의 존재

 

우리가 실낙원(Paradise Lost)의 저자로 잘 알고 있는 존 밀턴(John Milton)은 시력을 잃고 난 다음 영적인 통찰력을 얻습니다. 실낙원과 복낙원, 그리고 투사 삼손과도 같은 세계적인 명작품은 그가 새롭게 얻은 영적 감각의 열매입니다. 베토벤 또한 청각을 잃고 다른 모든 소리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그의 말기 작품은 모두 모든 소리로부터 단절된, 오직 마음에 울리는 소리만으로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물론 밀턴이 시력을 잃지 않고, 베토벤이 청력을 잃지 않았어도 그런 작품 활동이 가능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감각을 잃고 얻은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보이는 무엇인가를 찾았고, 들리지 않는 고요한 세상에서 자신만의 소리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1) 그것은 먼저 사람이 몸 이상의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음과 감각됨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감각의 즐거움이 취하는 것도 사람의 가치를 떨어뜨립니다. 성경은 다양하게 감각의 즐거움에 취하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인 사람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2) 또한 그것은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보다 감각할 수 없는 세계가 더 넓고 깊으며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상상력(想像力)이라는 독특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때로 그 상상력이 주는 줄거움에 취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은 감각이 아닌 마음의 능력으로 즐거움을 얻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사람의 여러 기능 가운데 가장 하나님을 닮은 기능입니다. 3) 마지막으로 사람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감각할 수 없는 것에서 영원을 느낍니다. 고후 4:18을 봅시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영원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서 하나님을 향기와 손길을 느낍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영원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봅니다.

 

어릴 적에는 나비를 보고 놀라고 새를 보고 즐거워했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모든 것에서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느낍니다. 나를 위해 이 세상에 그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느낍니다. 꽃은 지고 잎은 떨어지지만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생각과 계획은 변함이 없습니다. 더 큰 감사와 더 큰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영원하신 주님을 향합니다. 우리는 몸 이상의 존재, 감각 이상의 존재입니다. 그 너머에 있는 주님과 교통하는 즐거움과 감사가 늘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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