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樂觀)과 비관(悲觀) 사이(요 11:38-46) | na kim | 2014-12-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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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0. 연약한 인생, 풍성한 은혜 17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낙관(樂觀)과 비관(悲觀) 사이(요 11:38-46)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각입니다. 생각도 일종의 습관과 같습니다. 하지만 습관은 바뀔 수 있으며, 옵티미즘의 힘을 믿으면 스스로의 생각을 바로 잡을 수 있고 재창조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위에 있는 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긍정적인 인생관에 대한 강의를 한다는 어느 강사의 글입니다. 그는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9가지 길’이라는 글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살아가면 우리의 인생의 색깔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런 강의를 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화가 있습니다. 크레이튼 아브람스(Creighton Abrams) 장군의 일화입니다. 그는 베트남 전쟁 지휘관을 거쳐서 미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한 때 베트남에서 적군에게 포위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휘하 장병들을 이렇게 독려했습니다. “이 전쟁이 일어난 후 처음으로 이제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든 적을 칠 수 있게 되었다.” 도널드 맥컬로우는 이런 방식의 사고를 미국 정신의 정수를 보여주는 일화로 소개합니다.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을 달라지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면 삶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물 잔의 비어 있는 반을 보지 말고 반이나 남아 있음을 생각하면서 다시 힘을 내면 된다는 것이지요. 할 수 있을까? “We Can Do It!” 혹은 “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말입니다. 오죽하면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이라는 찬양까지 있을까요? “우린 승리하리라!”라고 외치면서 주먹을 흔들고 노래하면 언젠가는 꿈도, 야망도, 소원도 이뤄진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기도 합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섬기던 교회에 동행의 집사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사람이 선하고 재미있어서 쉽게 친해졌습니다. 교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분위기를 밝고 재미있게 만들 줄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좋지 않은 느낌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큰 병원에서 자세하게 진료를 받아보라는 권유였습니다. 위암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만날 때마다, 또 가정에 심방을 할 때마다 항상 웃으면서 “이 정도는 넉넉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고쳐주실 겁니다. 저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주실 겁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피골이 상접해 가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솔직하게 말하면, 그 분의 음성에서 물기를 느꼈습니다. 아무리 저항하려 해도 질병의 진행 속도는 자신의 의지를 넘어서고 있었고, 부정하려해도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나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고쳐주실 겁니다.”라는 말에서 오히려 더 깊은 절망, 더 깊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처음 큰 병원으로 가라는 권고를 했던 의사가 예상했던 기간에 결국 그 집사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3년째 김현순 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푸른 꿈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왔다가 암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치료하는 과정에 하나님께서 개입해주시고 만져주시고 일어설 수 있도록 인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왔습니다. 올 해 초, 그 기도의 응답으로 치료가 끝났다고 했습니다. 미국에 있는 아들 결혼식에 참석할 정도로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좀 더 길고 힘든 항암 치료의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 부부의 야위어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서 제 마음도 함께 야위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 저희들은 할 수 있습니다. 견딜 수 있습니다. 곧 더 건강한 모습으로 미국에 돌아가겠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그 분들의 이 말씀이, 이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벽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아무리 스스로를 윽박지르고, 아무리 할 수 있다고 주문을 외워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뛰어넘을 수도 없는 벽은 남아 있습니다. 긍정적인 정신이 우리를 좀 더 견디게 하고, 낙관적인 사고가 우리를 좀 더 즐겁게 할 수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잘 될 거야....라는 말은 나의 소망일 수 있지만 현실과는 다른 주문과도 같습니다. 오히려 잘 안될 수도 있음을 인식하고 현실을 인정하거나 목표를 수정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면, 하나님의 내 편이라면 왜 나의 긍정과 낙관이 현실화되지 않느냐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불평을 나사로의 누이들에게서 듣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그들은 삶에 찾아온 한계를 만났고, 그 벽을 넘어서기 위해 이미 예수님을 찾았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지체하셨고, 나사로는 그렇게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왜 그들로부터 이런 원망 듣기를 자초하셨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11:42(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와 12:11(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의 주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중요한 이유 한 가지를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3. 낙관의 한계에서 오는 위로 얼마 전에 어느 T.V.의 공개 강의에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자극적인 책을 썼던 김영하라는 작가가 나와서 인상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강의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군대에서 강의했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한 제대를 앞둔 사병이 질문을 했습니다. 학벌도, 재산도, 재능도 없는 자기 같은 사람이 어떻게 사회에 나가서 성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 병사에게 “잘 안될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피곤에 지쳐서 잠을 자고 있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일어나서 그 대답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오늘의 시대는 참으로 성공하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여기 연병장에 모여서 강의를 듣고 있는 청년들 중에서 보란 듯이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성공이나 성취를 목표로 하고 살 때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청년들에게 ‘자신만의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에 대해 말합니다. ‘감성근육’(感性筋肉)을 키워서 자신의 삶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키워나가라고 권면합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다른 인생의 성공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강의가 얼마나 옳은지에 제가 평가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재미있고 자극적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마음 깊이 동의할 수 있었던 주제는 “잘 안될 겁니다.”에 있습니다. 그의 말은 옳습니다. 연병장에 있는 수많은 군인들은 곧 사회로 쏟아질 것이고, 군에서 배운 “하면 된다!”는 정신 하나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군대보다 더 차갑고 날카로운 사회의 현실들을 만나고 좌절과 절망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군대를 피할 수 없는 대부분의 청년들이 그러 할테고, 그 중에 소수와 군을 피할 수 있었던 일부가 자신의 성공을 즐기는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김영하 작가의 강의는 “할 수 있다!”에서 출발하는 청춘이 아니라 “잘 안될 수도 있다.”는 아주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인식에서 출발하는 청춘으로 자신을 준비하게 만드는 유익한 강의였습니다. 낙관론의 한계가 주는 위로가 있습니다. 나의 낙관(樂觀)이 현실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 내가 아무리 최선을 대해도 최선의 결과를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런 일은 나의 인생에서 반복될 것이며, 나뿐만 아니라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상황 속에 살고 있다는 것 – 우리는 여기서 낙관(樂觀)이 아닌 비관(悲觀)을 선택해도 잘못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때로 절망해도 되고, 때로 낙심할 수 있고, 때로 주저 앉아서 펑펑 울며 세상을 원망해도 된다는 안도감 말입니다. 도널드 맥컬로우 목사는 자신의 목회에서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질병으로 죽어가면서도 오직 믿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을 이기려고 애쓰는 성도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계속 형제님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일이 가능하고 또 형제에게 그 능력이 임하기를 기도하지만, 안타깝게도 형제의 질병은 악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하나님의 뜻은 치유에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보다 먼저 만나실 준비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는 이런 권면을 받은 성도들은 대부분 안도감을 보여주었다고 말합니다. 낙관적인 태도를 지키지 않으면 마치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목회자로부터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내적인 자유를 권면 받은 것입니다. 비로소 그들은 인생을 마칠 준비를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추억을 나누고 보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용서하고 사랑을 마음껏 베푸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인생에서 가장 복된 시간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4. 또 하나의 위로, 무덤에서 또 하나 낙관론을 포기하면서 얻는 강력한 위로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서만 있는 독특한 위로입니다. 나사로와 누이들은 그들의 질병에 대해 끝까지 절망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이를 보낼 때에도,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릴 때도 그들은 낙관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죽음이 임했습니다. 나사로는 무덤에 누워 있습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절망하고 난 후에 다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인생이 만나는 가장 큰 절망은 죽음에 있습니다. 대부분 넘어서고 극복할 수 있지만 죽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두렵고 어렵습니다. 질병은 약을 쓸 수 있고, 수술할 수 있고, 치료의 과정을 만들 수 있는데, 죽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덤으로 가십니다. 인생이 만난 가장 높고 두터운 벽 앞에 섰습니다. 그 너머에 있는 나사로를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이제 일어나 나오너라!” 나사로는 그 높고 두터운 벽을 넘어서 다시 생명의 세계로 나왔습니다. 더 이상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을 인정할 때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또 하나의 위로는 바로 ‘의탁’에 있습니다. 이제 나 자신에 대한 어떠한 희망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벽을 만났을 때 그러하고,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벽들을 만날 때 그렇습니다. 내가 하려고 하지 않고, 나의 의지로 두려움과 절망을 숨기려하지 않고 팔과 다리에 힘을 빼고 하나님께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아무 것도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하지 않기로 결단하셨던 것처럼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리는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이 낙관론을 접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성도에게 주시는 참된 위로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통과 눈물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고민합니다. 좀 긍정적으로 살고 자신의 능력을 믿으면서 살다보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낙관론이, 긍정적인 사고의 유익함이 사람들의 마음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 어떤 낙관론과 긍정적인 사고도 결국 사람이 가진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사람은 범죄하고 이기적이며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와 성도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세상의 슬픔과 고통 속에서 내가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최악의 결과조차도 내 삶을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맡기는 훈련을 하게 됩니다. 내 삶을 가장 아름답게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마치 십자가에 누운 예수님처럼, 마치 무덤에 누웠던 나사로처럼 자신을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는 사람만이 참 자유와 평강을 얻습니다. 연약함에서 오는 위로,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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