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에 이르는 오직 한 길 1 - 사도 바울을 통해 전하신 복음(갈 1:1-5) | na kim | 2015-02-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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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21. 생명에 이르는 오직 한 길 1 사도 바울을 통해 전하신 복음(갈 1:1-5)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후 로마에 감금되기까지 약 30년 간 사도로서 로마 제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3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 중에 갈라디아, 소아이사 및 마케도니아(북부 그리스)와 아가야(남부 그리스) 지방에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그는 교회를 세우고 계속 방문하거나 혹은 편지를 통해서 감독하고 도왔습니다. 갈라디아서의 수신자로서의 갈라디아 교회는 이렇게 사도 바울의 도움을 받았던 여러 교회 중 하나입니다. 바울은 A.D.48년 경 그의 많은 서신서 중에서 최초로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갈라디아는 특정한 하나의 도시를 말한다기보다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했던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아, 루스드라와 더베의 네 도시들을 가리킨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각 도시마다 교회가 있었고 ‘하나님의 교회’(갈 1:13)라고 불리는 보편적인 교회가 지방교회들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종파나 개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지역과 교통의 환경에 의한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각 그룹들을 지칭해서 1:2와 1:22에서 ‘갈라디아의 교회들’ 혹은 ‘유대에 있는 교회들’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 이유로 각각 예배를 다른 곳에서 드릴 수 밖에 없었지만 한 지역의 이름으로 된 같은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은 결국 ‘갈라디아 교회’이며, ‘고린도에 있는 여러 교회’ 또한 ‘고린도교회’인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형태는 같은 지역에 수많은 교회들에 있지만 서로 아무런 교류와 연대가 없는 관계 속에 경쟁있는 오늘날의 교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의 신앙, 하나의 목적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1. 바울의 사도성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서두에서 늘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사도성에 관한 것입니다. 자신의 사도성이 의심되고 있는 상황에서 복음을 바로 전하기 어렵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 1:1) 이 편지가 선교지에 보내는 첫 편지임을 감안할 때 이후 편지들에서는 이만큼 강력하게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선교 환경이 점점 좋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갈리디아에 있는 도시들을 방문하고 교회를 설립한 이후 교회는 성장과 시험에 동시에 놓이게 됩니다. 성장은 복음으로 인한 교회의 성장이었지만, 시험은 거짓 선생들로 인한 신학적, 신앙적인 오류를 만들어 냈습니다. 특별히 거짓 선생들은 복음이 아닌 복음 전달자로서의 바울을 공격했습니다. 바울을 공격하는 것은 복음을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성을 부정했고, 따라서 바울이 전한 복음 또한 거짓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의 사도성을 부정하는 그들의 논리는 우선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사도로 세운 거짓선지자로 몰아붙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바울이 전했던 복음의 핵심을 희석시켰습니다. 그들 바울이 전한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에 무엇인가 덧붙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은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또한 모든 유대적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행 15:1,5) 그들은 이방 교회에 대한 혈통적, 영적 우월성을 포기하지 못했고,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바울을 공격했고 교회를 흔들었습니다. 2.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의도적으로 1절과 3절에서 그의 ‘사도성’과 ‘은혜와 평강’의 신적인 기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이 사람에게서 난 것도, 말미암은 것도 아닌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 ‘은혜와 평강’ 또한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고 선언합니다. 그의 사도성과 성도와 교회가 누리는 은혜와 평강은 그 기원이 같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1,3절에서 이 두 가지를 병열해서 배치하고 있는 것은 다소 의도적입니다. 바울의 사도성이 예수님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면 은혜와 평강 또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다면 바울의 사도성 또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란, 원래 유대주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신분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기보다 높은 분으로부터 주어진 바 임무와 권위를 향유하는 특별한 메신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의미에 근거해서 12제자를 선택하셔서 ‘사도’로서의 사명을 주십니다. 따라서 신약 성경에서 사도는 ‘예수님에 의해서 개인적으로 선택되고 부르심을 받고 임명되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가르치도록 자격이 부여된 사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러한 소수의 사람들 속에 있으며 신적인 이유와 기원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의 서두에서 자신과 함께 하는 선교팀 모두를 대표해서 인사하면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평강과 은혜를 전합니다. 이 평강과 은혜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그것이 우리(사도 바울과 선교팀)에게 있고,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있습니다. 같은 믿음으로 같은 교회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도성을 ‘거짓되다’고 말하면서 ‘다르다’고 주장하는 소수의 무리로부터 교회와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 사도성의 신적인 기원과 신앙의 신적 기원을 함께 주장하면서 인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바울을 통해 전하신 복음 3절과 4절(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은 형식적인 인사로 보이지만 실은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은혜와 평강’은 사도 바울이 증거했던 구원의 복음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평화, 인간과의 평화, 자기 자신과의 내적인 평화로서의 화해, 즉 평화의 성격을 가집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자발적인 은혜가 인간의 어떤 공로나 행위, 자격이나 가치에 관계없이 임한 것입니다. 이 은혜와 평화는 사람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어떤 가능성과 근거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가능합니다. 그래서 4절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십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그 뜻에 순종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이었고, 그 열매는 우리의 구원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사도 바울을 통해 전한 복음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근본적으로 죄를 사하기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의 속죄 제사이며 이것을 통해서만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되고 우리가 용납된다고 가르칩니다. 2) 그리스도는 지금 이 세대에서 우리를 구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본질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것이었다면(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그의 죽음의 목적은 우리를 이 악한 현세대로부터 구원하는 것입니다. 내세만 바라보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악한 세대 가운데 구별되고 거룩한 삶을 사는 성도와 교회로 만들기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죄 사함과 악한 세대로부터의 구별된 삶 –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입니다. 3)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면 그 십자가의 기원은 오직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1:4上) 성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시고 참된 평강을 주신 것, 바울에게 사도직을 주셔서 복음 전하는 일에 평생을 헌신하게 하신 것, 그리고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구원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그 뜻이 우리의 구원을 이룬 것처럼 이제 교회와 성도된 우리 또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뜻이 우리의 삶을 통해 육신이 되는 영광이 있어야 합니다. 4절을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희생의 제물이며, 그 목적은 우리를 악한 세대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본질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 4. 영광이 하나님께 영원토록 있습니다. John Stott 목사는 갈라디아서를 연구한 그의 책 Only One Way에서 본문의 내용을 해설하기를 ‘인간의 구원을 위한 신적 사역의 삼 단계’를 추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 1단계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제 2단계는 이와 같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바울을 사도로 임명하신 것입니다. 제 3단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에 전하신 ‘은혜와 평강’이 오직 믿는 자들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 단계에 대해서 각각 성부와 성자가 함께 일하시며 계속 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순종의 결과이면서 또한 자발적인 결단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으로서의 자신의 뜻으로 결단한 것입니다. 십자가와 영광은 참으로 거리가 먼 것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허락하신 아버지의 영광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들과 아버지의 고통스런 결단과 헌신을 통한 놀라운 구원의 은혜와 평강의 삶을 경험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무한 영광입니다. 무한 감사입니다. 자신의 사도적 기원뿐만 아니라 복음적 기원까지도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음을 선언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도자로서의 헌신된 삶 또한 신적 기원이 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얻은 성도가 함께 십자가를 질 때 십자가의 영광은 곧 성도와 교회에 허락된 영광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단순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영광 안에 자신과 모든 교회가 함께 거하기를 소망하는 찬양을 드립니다. 영광이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께 세세토록 있을 것이며, 믿음으로 함께 십자가를 지고 살기를 소망하는 모든 성도와 교회에도 허락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부정하고 외면하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는 오늘날의 성도와 교회, 가장 중요한 사명은 십자가의 영광을 우리의 삶을 통해 증거하고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신앙의 선배들처럼.... 십자가를 영광스럽게 하는 성도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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