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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길 예수 2 - 다른 복음은 없다.(갈 1:6-10) na kim 2015-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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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4. 오직 한 길 예수 2

 

다른 복음은 없다.(1:6-10)

 

현대 사회를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다양성(多樣性)이며 또한 다원성(多元性)입니다. 개인의 인권과 자기 삶의 방식에 대한 자유가 인정되고 그 어떤 선택도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면 그것이 선하지는 않아도 제한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인정합니다. 이러한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분야가 바로 동성애에 관한 것이고, 가장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바로 신앙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은 변했습니다. “개인이 자신의 성적인 정체성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데 왜 그들의 권리를 법적으로 제한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젊은 세대들에게 인정되고 있습니다. 다양함이 곧 아름다움일 수 있다는 사고입니다. 나아가서 다양성에 대한 인정은 우리가 가진 신앙과 신관(神觀)에 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날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다른 종교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견지해야 하며 공격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저급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가진 종교나 신념을 의욕적으로 전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선언은 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안에서 인정될 수 있지만 궁극적은 구원으로 가는 길은 각각 다양하며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학교 교육을 통해 확산되고 있고, 기독교 신앙은 이미 사회 문화와 제도로부터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갈라디아서 16-10절의 말씀은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대부분의 서신에서 바울은 편지의 서두에서 인사말을 하고 난 다음 그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아주 심각한 어조로 자신의 입장을 전합니다. 그는 왜 분노하고 있고,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다른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1:6)

 

바울은 인사말을 마친 후 바로 갈라디아 교회가 ‘.....을 떠나고 ....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그 내용은 심각합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부르신 이를 떠났고,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교회이고 예배하고 있고 여전히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떠났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메타디네미라고 하는 헬라어는 흥미 있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충성의 대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로 군대에서 배반하거나 이탈한 군인에 대해 쓰거나, 정치나 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입장을 바꾼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단어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꾸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변절자이며 이탈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일관되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고후 5:18에서 선언한 대로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는 말씀은 우리의 구원과 관계된 모든 것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믿는 성도들의 어떤 행위로 공로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사도행전 15: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에 소개되는 유대주의자들의 소위 행위의 복음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로 시작한 구원의 복음은 모세의 율법으로 완성된다.

2)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는 성도가 율법을 지킴으로 개인적으로 성취된다.

3) 성도와 교회는 그리스도가 미완성한 일을 율법을 통해 완성시킨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믿음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지 사람의 그 어떤 노력이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이 아니면 그 누구도 얻을 수 없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복음을 버리는 것은 결국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족한 분으로, 미완의 하나님으로 만듭니다. 바울은 5:4에서 너희는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선언합니다.

 

2. 거짓 교사들의 활동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1:7)

 

여기서 교란하다는 말은 흔들다’ ‘선동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거짓 선생들로 말미암아 한편으로는 지적인 혼란함을 경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쟁과 파벌에 휘말립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다음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고 공의회의 이름으로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15:24)

 

거짓 교사들의 특징은 그들이 복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고백하고 함께 예배합니다. 다만 그들은 주로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첫째 그들은 복음을 인정하지만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복음을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합니다. 다만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다만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복음만으로는 부족하고... 이것이 더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시작된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말하지만 복음에 무엇인가 자신의 생각이나 이익을 더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자기 성취를 맛보려 하거나 자신을 세우려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 외의 것은 모두 비복음(非福音)이요, 복음에 추가되거나 결핍된 것은 거짓입니다.

 

또한 그들은 교회를 소란하게 하고 분당과 파벌을 만듭니다. 한 몸된 교회가 분열을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아픈 일입니다. 성도들의 아픔보다 몸의 찢어짐을 경험하시는 그리스도의 아픔이 더욱 큽니다. 오늘날 분열과 파벌을 거듭하는 교회의 모습은 2000년 전 거짓 교사들로 말미암은 교회의 분열을 경험했던 초대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3. 바울의 분노, 하나님의 분노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활동과 교회의 어리석은 반응에 대한 사도 바울의 반응은 먼저 놀라움이었습니다. 그는 6절에서 이상하게 여긴다는 말로 그의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은혜의 부르심을 입은 교회와 성도들이 은혜를 부정하고 행위를 강조하는 논리에 속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탄식하기를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3:1)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1:8-9절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분노를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8-9)

 

바울은 이 이후에도 이렇게 강력한 분노와 저주를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저주를 받는다라는 표현은 아나데마’(anadema)라는 말인데,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에 의해 멸망 받도록 저주된 사람들이나 사물에 임하는 하나님의 재앙, 즉 신적 금지령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아간의 범죄가 좋은 예입니다. 여리고성을 정복하고 얻은 노획물은 아나데마아래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불태워야 하고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간이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 아래에 있던 물건들과 교류함으로 자신 또한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아나데마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즉 갈라디아 교회가 그들과 교류해서는 안되며 누구든지거짓 교사가 되거나 그들과 교류할 때 함께 아나데마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이 놀라운 분노와 저주는 혹시 지나친 것은 아닐까요? 함께 교회였고, 그들 역시 자신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있을 것인데, 저주 아래 놓은 사람들로 두 번씩이나 선포하는 것은 극단적인 언어 사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분노의 마음을 드러내신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광이 가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성도들이 완성해야 할 무엇인가 부족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 2: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에서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거짓 교사들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망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한 영혼의 소중함을 압니다. 그는 9: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에서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저주(아나데미) 아래 있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복음을 왜곡하는 것은 구원의 길을 파괴하는 것이요, 교회를 분열하게 하는 것 또한 구원의 통로로서의 교회를 무너지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의 마음과 교회를 향한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4. ‘다른 것없는 것입니다.

 

당시 유행되는 구원과 진리에 대한 견해는 절대적인 진리로서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다른 여러 가능한 길이 있다는 것과 복음도 시대가 변하면서 함께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오직 하나의 복음만이 있으며 이 복음은 변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6절부터 9절까지 매 절에서 반복되는 다른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AB가 모두 복음인데 바울이 전한 복음이 A라면 유대주의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B이다라는 뜻일까요? 바울은 다른 복음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7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1:7)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 아닌 다른 복음은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이란 또 하나의 복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복음(非福音)’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며 교회를 해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10절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 라고 고백했습니다. 복음의 종으로서의 자신의 역할과 복음 자체의 역할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자신의 생각이니 이익을 덧붙여서 전하는 것은 모두 자신과 사람들의 유익 혹은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결국 자신들의 기득권을 복음 앞에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를 해치는 자들로 남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며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복음 앞에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헌신함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전하신 복음이요 우리들에게 있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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