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 - 새로운 관계의 시작(갈 2:15-21) | na kim | 2015-04-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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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5.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오직 한 길 예수 6 칭의 - 새로운 관계의 시작(갈 2:15-21) “이것이 복음의 진리이다. 이는 또한 그 안에 모든 경건의 지식이 담겨 있는 기독교 이론의 중요 부분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부분을 잘 깨달아서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치며 계속하여 그들의 뇌리에 박히게 해주는 것이다,” 마틴 루터는 오늘 본문이 말하는 ‘칭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칭의교리’를 ‘중요한’, ‘가장 중요한’, ‘가장 원리적이며 특수한 기독교의 교리 부분’이며 ‘진정한 기독교인을 만드는 이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갈라디아서 전체를 요약하는 한 단어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본문 갈 2:16에서 우리는 칭의 교회의 핵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사도 바울은 ‘의롭게 되다’라는 동사를 16절에서 3번, 17절에서 1번 사용하고, 이것을 의미하는 ‘칭의’라는 명사를 21절에서 다시 사용합니다. 칭의 교리가 왜 중요하며, 그것이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칭의, 새로운 관계의 시작 ‘칭의’란 ‘정죄’의 반대말로 법정 용어로 이해하면 됩니다, 성경이 이해하는 정죄와 칭의는 구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신 25:1) ‘정죄하는 것’는 누군가를 유죄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의롭다 하는 것’은 그 누군가의 죄가 없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과연 사람은 의로울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죄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우리를 의롭게 여기신다 한들, 우리의 연약함은 끊임없는 범죄의 가능성 앞에 우리를 노출시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보다 우리의 범죄의 가능성이 더 큰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영적 현실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칭의’의 개념을 일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깨끗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영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아들은 여전히 세상의 더러운 것들로 얼룩져 있지만 아버지는 아들로 그를 맞이합니다. 오히려 아버지를 떠나기 이전보다 더 깊은 관계가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충분한 자격이 있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그 아들의 아들 됨을 선언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었다가 아버지께 용납된 아들이 되어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칭의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그러면 실컷 자기 마음대로 범죄하면서 살다가 마지막에 용서해주세요... 나 예수 믿어요...하고 죽으면 천국 가겠네...” 이런 얄팍한 논리가 칭의의 깊은 의미를 설명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칭의란 우리로부터 시작되는 보상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은혜의 의미입니다. 여전히 우리를 더럽고 수치스러운 삶의 현실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책임을 면제해줄 뿐만 아니라 영접하고 의롭게 여기십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들어갈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여기심으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의 은혜의 관계 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들에게 부여하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 의로움을 가는 두 가지 길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얻는 두 가지 길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모든 율법을 다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인정받는 길이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의로움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는 스스로를 의롭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우리에게는 자격도 능력도 없지만 오직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바울의 입장은 물론 후자입니다. 1)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을까? 율법이란 하나님의 계명 전부를 의미합니다. ‘율법의 행위’란 그것에 순종하는 모든 삶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삶으로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모세의 율법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고행’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율법을 만족시키는데 있기 때문에 율법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하고 율법이 금하는 모든 것을 하면 안되었습니다. 그들은 최고의 법으로서의 십계명에 도덕적인 법을 부과했습니다. 예배와 관련된 의식법도 부과했습니다. 점점 많은 전통과 관례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만일 네가 이 모든 것을 행하고 그 어떤 것에도 실패하지 않으면 너는 상급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영접하실 것이다.” 성경은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사도 바울은 이 본문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구원의 자격을 얻는 사람들에게 왜 하나님이 은혜가 필요한지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의 앞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2) 믿음으로 의롭게 되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사람으로 살았고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율법을 완전히 만족시킨 유일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율법 앞에 완전할 수 없는 우리들 모두를 대신하는 죽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안에서 그의 의를 힘입게 됩니다. 성도와 교회가 의롭게 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무력한 우리 자신을 인정하고 자기 주장과 의를 자랑하여 했던 과거를 버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인 확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삶을 위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아닌 영원한 피난처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삶을 의지하고 순종하며 그 길을 함께 걷고자하는 결단이 있어야합니다. 3. 강조하고 또 강조하라! 이론적으로 칭의로 가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율법에 의한 것과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16절에서 세 번이나 강조합니다. 성도와 교회의 칭의는 율법으로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1) 우리가 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먼저 바울은 ‘우리가 안다..’는 표현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앞서 공개적인 논쟁을 했던 베드로를 말합니다. 비록 우리가 논쟁하고 다툰 것처럼 보이지만 신학적인 입장을 같다는 것입니다. 2) 우리도 믿는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믿고 있음을 다시 강조합니다. 사람의 의롭게 됨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을 알 뿐만 아니라 그대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3) 성경이 증거가 된다. 바울은 나아가서 자신들의 지식과 믿음의 근거가 성경에 있음을 밝힙니다. 성경은 사람의 죄와 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바울은 이 말씀 그대로 갈 2:16 하반절에서 고백합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4. 새로운 삶을 살다. 이러한 고백의 결과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암송하는 갈 2:20의 말씀을 봅시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렇게 놀라운 은혜가 예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의 만족을 통한 칭의를 주장하는 것은 도대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크게 네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즉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은혜입니다. 율법은 예수님에 의해 만족되었습니다. 셋째 자신의 행위에 대한 신뢰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는 것은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넷째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새로운 삶의 출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마틴 루터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주장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복음을 듣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행한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복음을 듣겠다. 왜냐하면 그것이 율법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그 복음을 통해 예수께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시려고 고통 받으시고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그 모든 일보다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큽니다. 그 은혜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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