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Slow Church의 비전 | na kim | 2015-09-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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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16. SLOW CHURCH * 본 문 : 고린도후서 5장 18-19절 말씀 * 제 목 : 2. Slow Church의 비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안과 밖이라는 경계를 허물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를 만드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을 “내 편 혹은 네 편”, “교회 안 혹은 밖”의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곳에 가까운 사람과 아직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전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크리스토퍼 스미스, 존 패티슨, Slow Church(새물결 플러스, 2015) p. 56 세익스피어는 그의 희극 “As you like it"(당신의 뜻대로 하세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은 연극 무대 / 그리고 모든 사람은 그 속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일 뿐 / 그들은 등장과 퇴장을 반복한다.” 슬로우 처치를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를 이 대사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조를 하나의 드라마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피조 세상이 함께 말하고 반응하는 공연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케빈 벤후저(Kevin Vanhoozer)라는 신학자는 “창조라는 드라마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배우와 관객의 역할을 번갈아가며 맡는다. 다시 말해 인생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공연하는 무대다. 신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고 무엇을 행하셨는지,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께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학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을 하나님의 또 하나의 창조로 본다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드라마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아직 제대로 이야기를 풀지 못한 안타까운 드라마입니까 이미 클라이막스를 지났습니까? 아직 반전을 노리고 있습니까? 혹은 아무도 보지도, 듣고 싶어 하지도 않는 지루한 드라마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드라마에서 주연은 누구이며 관객은 누구입니까? 1. 즉흥극, 우리 인생 연극의 장르 중에서 즉흥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배우들이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호흡으로 완성되는 극입니다. 물론 공연되는 모든 드라마에서 배우의 특성이 반영되고 일정한 애드립이 허용되지만 즉흥극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연극을 끌고 갈 수 있는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와 최소한의 소도구만 제공할 뿐, 그 외의 모든 것은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몫입니다. 최근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개그 콘서트 등의 오픈된 무대에서의 코메디 프로그램에서 자주 사용되는 관객 참여형 코메디에서 그 한계와 장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단 이런 코메디는 위험합니다. 관객이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예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주 재미있거나 아주 당황스럽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습니다. 즉흥극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상대 배우의 반응에 집중해야 합니다. 호흡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했을 때 상대방은 다음 대사를 이어갈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둘째, 상대 배우의 말에 “예!” 혹은 “아니요!”라고 단답형으로 대답하면 곤란합니다. “예... 그렇습니다만, 제 생각에는....”이거나 “아니요, 왜냐하면...”으로 말을 이어가야 합니다. 셋째, 내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게 말할 수 있는 소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연극을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원칙은 “실수란 없다!”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대사, 상대방이 하는 모든 말은 서로가 합의한 결론으로 나가는 과정입니다. 21세기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이로 인정받고 있는 톰 라이트 목사는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창조의 역사를 5막으로 구성된 드라마라고 설명합니다. ‘창조-타락-이스라엘-예수-교회’라는 5막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섯째 막이 공연되고 있고, 교회에 속한 우리는 극의 진행을 고민하면서 각자 맡은 역할을 창조적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1) 이전의 막들이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를 고민하면서, 2) 극의 전체적인 주제와 흐름을 유지해야 하고, 3) 그 속에서 각자 창의적으로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교회의 미래를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드라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도록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2. 창조의 드라마, 끝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를 설명하는 단어 중 하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가치와 철학이 해체되고 ‘가벼움’만 남았습니다. 얕은 물이 쉴 새 없이 소용돌이치고 있고, 인류를 설명하고 지탱해오던 무거운 가치들은 소용돌이 속에서 방향을 잃고 떠다니고 있습니다. ‘다양성과 다원화’, ‘스피드’가 핵심 가치로 출렁이는 포스트모던의 격랑 속에서 슬로우 처치는 ‘더 깊은 곳에 닻을 내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삶’을 지향합니다. 이런 기다림은 게으름이나 패배주의와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핵심적인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며,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슬로우 처치는 만물이 창조의 절정인 종말론적 구원을 향해 나아간다는 신학적, 신앙적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세상의 모든 가치와 생각, 문화와 국가 체계까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그 속에서 교회와 성도의 역할을 고민합니다. 즉흥극에서 이야기의 기본적인 구조를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의 드라마에서 ‘종말론적인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분이시면서 한편으로는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화해와 회복’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긍휼하고 무한하신 기다림 속에 이루고자 하시는 변화는 곧 화해와 회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화해와 회복의 선물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확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역, 화목하게 하는 일을 우리들에게 위임하시고 함께 이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의 동참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창조적 사역에 동참하는 것은 감사하고도 거룩한 일입니다. 우리가 단순한 영적인 소비자로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교회의 섬김을 받고 소비하고 다시 받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경험하고 우리 또한 ‘화목하게 하시는 말씀을 증거하는 일’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저 시간의 강물 위에서 둥둥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목적하는 항구가 있고, 그 목적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즉흥극’의 주연으로 각자의 삶을 사는 성도에게도 하나님의 성품과 닮은 창조적 삶이 필요합니다.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변화의 핵심은 화해와 회복입니다. 변화의 동력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오기까지 진노가 아닌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이 말에서 하나님 대신 ‘교회’ 혹은 ‘나’를 대입해 봅시다.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오래 참습니다. 내가 원하는 변화의 핵심은 화해와 회복입니다. 변화의 동력은 세상에 대한 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오기까지 분노가 아닌 사랑으로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라는 역할을 창조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적 관계 속에 서로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교회와 세상의 관계이면서, 하나님과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일에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슬로우처치의 역사관이 종말론적이며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사역이 핵심이라고 할 때, 성도와 교회의 화목하게 하는 직분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의 농사’에 동참하는 사역입니다. Slow Food를 나누는 식탁에서 생산에 능동적으로 동참하는 소비가 발생하는 것처럼 성도와 성도, 교회와 성도, 교회와 교회, 나아가서 교회와 사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서로에 대해 감당하면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적 경영에 동참하하게 됩니다. 로핑크는 ‘Jesus and Community'(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화해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피조물이나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평등하게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특정한 장소와 시간과 민족을 선택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이방 민족의 포악하고 잔혹한 삶과는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로 성장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이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율법보다 뛰어난 구원의 길을 허락하십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은혜를 힘입어서 먼저 자신의 변화와 부흥을 경험하고 자신이 길이 되어서 세상의 변화와 부흥을 인도하게 됩니다. 4. 좋은 교회, 슬로우 처치 사도행전 2장에서 우리는 교회가 누리는 축복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말론적인 기쁨입니다. 사도행전 2장 42-47에서 초대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초대교회의 정서를 한 단어로 표현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궁핍과 핍박과 고난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며 복음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기쁨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섬김을 받기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섬겼기 때문에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영적 서비스의 소비자로 기쁨을 누린 것이 아니라 생산자로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종말론적이며 천국의 기쁨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따라서 좋은 교회란 효율적인 면에서 우수한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숫자가 좋은 교회를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숫자가 좋은 교회의 증거는 아닙니다. 좋은 교회는 기쁨이 있는 교회입니다. 흩어지는 교회, 찾아가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섬김과 나눔과 헌신과 희생의 기쁨이 종말론적으로 해석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슬로우처치가 지향하는 교회는 교회 건물 안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주위의 형제와 자매와 이웃, 심지어 나의 원수까지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몸 된 자로의 삶을 사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온전히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할 때, 사랑과 인내로 섬길 때 우리의 삶에는 기쁨이 넘치며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는 함께 연극을 만드는 배우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교회와 성도가 있고, 그렇지 못한 교회와 성도도 있습니다. 함께 만들어가는 창조의 드라마를 인식하는 교회와 성도는 사소한 역할에도 최선을 다합니다. 천천히 지경을 넓혀가고 관계를 넓혀갑니다. 그들의 만드는 연극의 한 부분은 늘 흥미진진하고 모두가 더 많이 참여하고 싶어 하며 역동적인 삶의 상호작용이 계속됩니다. 슬로우처치의 가장 중요한 비전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화해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돕고, 모든 피조물이 각자가 부름받은 자리에서 함께 성장함으로써 샬롬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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