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 church- : 3.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 na kim | 2015-11-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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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29.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 SLOW CHURCH * 본 문 : 고전 1:1-3, 엡 1:22-23 * 제 목 : 3.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우리 교단은 지금 멕시코 국경 지역에 교단 교회 개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음 달에 있을 총회가 내려야 할 결정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8-9년 전 비슷한 상황 속에서 조지아 지역의 몽고메리에 교단 교회를 개척해서 성공한 사례가 있고, 그 학습 효과가 이번 교회 개척 계획을 추진하는 배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 몽고메리 지역에는 현대 자동차가 자체 공장을 건립하고 현대차의 미국 내 생산을 추진했습니다. 현대 기아를 비롯한 다양한 업체들의 입주가 예상되었고, 우리 교단의 몇 교회가 연합하여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지금은 교회 개척을 후원했던 교회들보다 더 크고 든든한 교회로 성장해 있습니다. 최근 한국의 기업들이 미국과 국경을 나누고 있는 멕시코에 공장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이미 실행 단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 교단들도 또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미 몇 교회가 세워져 있고, 우리 교단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상 명령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선교전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지상 명령에 의하면 교회가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땅 끝으로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땅의 끝’은 어디일까요? 그것은 아직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과 우리 교단의 선교 전략, 서로 충돌하는 지점은 없을까요? 공장이 건설되고 한인들이 들어가고 짧은 기간 큰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지역에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는 움직임과 아직 교회가 없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으로 가서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명령에 아무런 갈등은 없는 것일까요? 교회의 성장을 논하면서 눈에 보이는 양적인 결과를 강조할 때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그것이 너무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된다는데 있습니다. 땅 끝으로 가서 제자를 삼는 교회가 아니라 성공할 수 있는 지역에 가서 큰 교회를 세우는 것이 목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성장론자인 맥가브란과 와그너는 잃은 양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예로 들면서 “양이 있지도 않는 험한 산골짜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느라...” 교회가 많은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이 비유의 핵심을 완전히 왜곡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잃은 양, 잃은 동전, 잃은 아들에 대해 말씀하실 때의 초점은 바로 ‘땅 끝’에 대한 예수님과 관심과 일치합니다. 얼마나 많고 크냐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에 초점이 있고, 그 사랑과 관심에 마음과 삶의 가치를 두고 있는 교회의 헌신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교회는 천천히 한 걸음씩 이 어두운 시대를 걸으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땀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1. 몸 된 교회 vs. 지역 교회 Slow Church라는 개념이 생소하기 때문에 몇 가지 개념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교회’라는 개념을 가르치셨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에게는 다소 생경한 개념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와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를 말씀하시면서 ‘교회’라고 선언하셨습니다.(“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마 16:18)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의 교회’는 세상의 그 어떤 권세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실질적으로 무너지고 있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권위 또한 무너졌습니다. 손가락질 당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비현실적인 선언에 불과한 것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교회’라는 단어에는 크게 두 가지 구별된 개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고린도전후서는 ‘지역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반면 에베소서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두 개념을 구별하기를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교회’라는 표현이 115회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 약 20회에 걸쳐서 예수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를 말하고 있고, 나머지는 각 지역교회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몸 된 교회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 모두를 가리키고 있고, 지역 교회는 한 특정한 지역에 개척되어 함께 예배하는 성도의 무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다음의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지 지역 교회인지를 구별해볼까요? 마 18:17 / 엡 5:27 / 고전 3:3 / 엡 4:4 / 엡 5:27 / 계 2:5 2. 교회는 거룩합니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 중 하나는 ‘시온성과 같은 교회’(210장)입니다. 1. 시온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없다 허락하신 말씀대로 주가 친히 세웠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 흔들 자가 누구랴 모든 원수 에워싸도 아무 근심 없도다 2. 생명샘이 솟아 나와 모든 성도 마시니 언제든지 흘러 넘쳐 부족함이 없도다 이런 물이 흘러가니 목마를 자 누구랴 주의 은혜 풍족하여 넘치고도 넘친다 3. 주의 은혜 내가 받아 시온 백성 되는 때 세상 사람 비방해도 주를 찬송하리라 세상 헛된 모든 영광 아침 안개 같으나 주의 자녀 받을 복은 영원무궁 하도다 아멘 우리가 먼저 생각한 구별에 따르면 이 찬송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허락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로 드리는 찬송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허신 영광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고 영광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이는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갈등하고 분열하고 손가락질 당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핍박받고 때로 사라지기도 합니다. 지역교회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지역 교회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에 허락하신 가치를 따라 삽니다. 교회는 거룩할까요? 예, 그렇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거룩하고 영광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허락하신 지역 교회로서의 초대교회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울까요? 예... 그래야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에 허락하신 아름다운 가치가 지역에 세워진 각 교회에서 구현되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여전히 연약합니다. 여전히 부족함에 허덕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오늘날 지역 교회의 거룩성은 교회가 가진 가치와 비전, 그리고 교회의 헌신에 달려 있습니다. 지역 교회의 부족함과 연약함이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함과 영광을 가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3. 세상 사람 vs. 세상의 문화 혹은 권세 또 하나 우리가 정리해야 할 개념은 교회의 선교의 대상이면서 존재의 터전이 되는 ‘세상’입니다. ‘교회’라는 표현이 중의적이었던 것처럼 세상 또한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과 교회가 싸워야 하고 구별되어야 하는 세상(롬 12:1-2)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사신 세상은 세상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선교의 대상이자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선교의 주체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세상의 사람은 교회가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구현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만 세상은 아닙니다. 성경의 곳곳에는 하나님의 백성 혹은 교회가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변화시킬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 혹은 교회가 세상의 영향에 의해 동화되어 갈 것인가? 에 대해 언급합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요1 4:4-5)에서 세상은 사탄의 권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 속에 있지만 세상의 권세와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같은 말씀이 성경의 곳곳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우리가 앞서 생각했던 무형 교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세상을 넉넉하게 이깁니다. 세상의 어떤 권세도 교회를 흔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에 부르심을 받아서 각 지역에서 모이는 교회는 다릅니다. 핍박과 압제가 있고, 유혹과 시험이 있습니다. 부흥하고 성장하며, 흔들리고 쇄락합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 구별된’ - 쉽지 않는 중의적 개념 속에 오늘 교회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4. 예수님을 닮아가는 교회 요즘 한국 교회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현상 중 하나는 ‘작은 교회’에 대한 관심입니다. 단순히 적게 모이는 교회의 유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장과 효과를 목표로 하지 않는 교회, 사람과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를 말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과 관계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교회를 말합니다. 지난 해 10월에 열린 포럼에서 감신대 이정배 교수는 “콘스탄티노플 이전까지의 교회 공동체가 예수 삶에 초점을 둔 탓에 당시 세상을 불편하게 만들었듯이 오늘의 교회 또한 작은 교회 운동을 통해 성장과 번영에 대한 고착화된 개념을 뒤집는 대역전의 삶을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미국과 한국에서 개신교회의 성장은 멈추었습니다. 지난 한 해 한국 교회는 최소 5만 이상의 성도가 줄었습니다. 각 교단 별로 부지런히 대안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양적 성장, 수와 크기의 성장에 대한 우상을 버리지 않는 한 대안은 없습니다. 오히려 대안은 복음의 본질에 있습니다. 땅 끝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드는 사역에 교회의 본질적인 대안이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복음이 부족할 때는 복음 자체가 중요했고, 매체가 부족할 때는 매체를 통한 전도가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고 그 사람들이 모인 한 교회, 한 교회가 중요합니다. 그들이 있는 곳이 땅 끝입니다. 그 교회가 뿌리내린 사람들이 땅의 끝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모든 지역, 모든 사람들 속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주고 증거하고 살아야 합니다. Slow Church는 21세기의 교회가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찾아가는 복음적이며 본질적인 대안입니다. 천천히 걸어야 길가에 핀 들꽃들을 만나는 것처럼 천천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시간을 걸으며 복음의 본질을 만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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