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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주(定住)의식 vs. 나그네 의식 na kim 201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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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14.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 SLOW CHURCH

 

* : 사도행전 18 1-3, 고전 16:19

* : 5. 정주(定住)의식 vs. 나그네 의식

 

              “우리는 지역 공동체와 끝까지 삶을 함께 것을 맹세합니다.  우리는 함께 먹고 기도하고 일하고 휴식을 취합니다.  우리는 가장 이상적인 장소를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욕망을 내려놓습니다.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으며 다른 장소에 가면 잘되리라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우리는 상황을 이해하고 다시 평화를 배우는 방법을 배우는 유익을 누립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연습하면서 자신 안에 얼마나 공격적인 성향이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고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하려는 습성을 버리며, 용서하는 법을 배웁니다. 

 

              위의 맹세문은 아이오와 주에 있는 수도원의 정주(定住) 서약입니다.  정주(定住) 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고 산다는 말입니다.  전통적으로 수많은 수도원에서는 수사가 되기 위해서 먼저 정주의 서약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베네딕트 수도원의 규율에는 “우리가 예수를 닮아가기 위해 하는 모든 노력이 이루어지는 작업장은 수도원의 울타리와 공동체에 머무르는 정주(定住)이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개념은 단순히 주거지를 정하고 산다는 것을 넘어서는 성경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을 부르시되 거류민 혹은 나그네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10: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땅에 존재하는 이스라엘과 교회의 정체성이 나그네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였던 그들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정주(定住)하게 하신 하나님,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성도와 교회로 구별하여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나그네의 삶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정주의식(定住意識) 나그네 의식 - 교회에 적합한 생각은 무엇일까요?

 

1. 나그네, 이스라엘의 정체성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이자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나그네로 만드신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사람 아브라함의 인생을 나그네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택하셨고, 그의 후손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택함을 받은 그의 현재는 나그네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정체성이 가장 표현된 것은 바로 바로 앞에서의 야곱의 고백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이가 얼마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47:9)  그는 자신과 조상들이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그들은 애굽에서 400년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앞서 신명기 19:10 말씀과 출애굽기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나그네였었고, 나그네를 보호하고 사랑하야 하며, 나그네였던 시절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비록 지금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적창했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가는 과정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다시 교회와 성도는 세상에서 오직 나그네에 불과함을 확인시켜 주십니다.(벧전 2:11)  교회와 성도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의 정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나그네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을 소유하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정주(定住), 이스라엘의 사명            

 

              우리가 이스라엘과 교회의 정체성이 ‘나그네 정신’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에게 땅을 주신 것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그네로 부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시고 허락하셨던 것일까요?  하나님은 성도들을 교회로 모이게 하시고 세상으로 다시 보내시는 것일까요?  가나안은, 세상은 이스라엘과 교회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가장 먼저 우리가 동의해야 하는 것은 가나안은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는 것입니다.  근동지방 동편의 작은 땅덩이... 젖과 꿀이 흐른다고 표현되었지만 알고 보면 광야와 산악지대가 있는 거친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땅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 허락하십니다.  땅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약속되었습니다.  젖과 꿀은 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땅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으로 들어갑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이 되는 신정국가의 건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소원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작고 못난 민족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왕이 되는 나라,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되는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되었던 집에서 애굽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 너는 알라 오직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대까지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명기 7:7-9)  에베소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세우시고 성도들을 택하신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12) 

 

              그리고 모든 것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에서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허락된 가나안에서 그들은 세상의 복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12:1-3)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은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하고, 교회는 사명을 지역 사회 속에서 함께 감당할 있어야 합니다.( 1:12)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시고 복을 주시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3. 가지 정신의 왜곡

 

              이스라엘이 가지 정신 사이에 영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지켜나갈 그들은 가장 아름답게 하나님을 섬기며 사명을 감당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신을 왜곡하여 해석하고 적용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멸망하고 맙니다.  이스라엘의 정신에 대한 왜곡과 비참한 결말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좋은 거울이 됩니다.

 

              먼저 그들은 나그네 정신을 왜곡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듭 그들이 나그네였음을 강조하십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23:9)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정체성과 하나님의 명령을 망각합니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3:5)  결국 이스라엘의 비참한 몰락의 중요한 원인 하나는 그들의 영적인 정체성을 스스로 외면한데 있습니다.  신약의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비유에서 스스로 나그네 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25:35)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25:43)  교회는 스스로 나그네이며, 나그네를 선대해야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와 성도는 사명에 실패합니다.  하나님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경고하십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또한 그들은 정주(定住)정신을 왜곡했습니다.  정주정신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사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에 주시는 기업으로서의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함께 있지만 세상과 구별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성도와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으로 삽니다.  주권이 하나님께 있고, 목적 또한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간 그들은 정체성으로서의 나그네 의식을 잊습니다.  목적으로서의 정주의식도 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정주의식에서 정체성을 찾았고, 나그네처럼 책임성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그들의 가지 정신의 왜곡은 징계와 몰락의 원인이 됩니다.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가지 정신에서 길을 잃을 교회의 모습을 상실하게 됩니다.  가지 정신에서 분명할 교회는 가장 아름답고 교회답습니다.

 

4. 나그네로 정주(定住)하다.

 

              중세 교회의 역사는 수도원의 역사라고 말할 있습니다.  중세교회가 교황의 횡포와 더불어 부패하고 타락했을 수도원은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종교과 문화, 신학과 철학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지역 사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원을 중심으로 농업과 축산 기술이 개발되고 축적되기도 했습니다.  수도원은 중세 교회 개혁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소원을 내려놓고 내적으로는 말씀으로 새롭게 되고 수도원 밖의 세상에 대해 선한 영향력으로 소통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성공적으로 정주(定住)했습니다.  이것이 베네딕스 수도원의 정신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경건과 거룩한 생활을 추구하며 선교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던 수도원은 중세를 거치면서 변질됩니다.  그들은 나그네 의식에서 정체성을 찾지 않았고, 오히려 세상에 정주하는 교회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발견했습니디.  탐욕에 수도원장들과 고위 성직자들에 의해 수도원은 점점 비대해졌고, 부패와 타락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결과 한편으로는 수도사들의 나그네정신을 강조하는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비롯한 탁발수도원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본질적인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나그네 의식으로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나그네 정신은 신약에서 청지기 정신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나그네는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되신 하나님이 허락하신 세상에서 나그네로, 청지기로 살다가 사명을 감당하고 다시 본향으로 돌아갑니다.  교회는 정주의식으로 끊임없이 사명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릇된 나그네의식은 사명을 좀먹습니다.  한달란트 받은 종의 어리석은 고백은 정주의식, 사명감이 없는 성도와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그네로 만드시고 그의 후손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고, 교회를 세상에서 부르셔서 다시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분명한 정체성과 사명으로 무장하고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보여줄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8장과 고전 16장에서 우리는 정체성과 사명의 조화를 이룬 성도와 교회의 모범을 발견합니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을 발견할 있기를 바랍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유대인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고로 그가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18:1-3)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집에 있는 교회가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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